아크로 편집실 - 아크로 주요 논쟁 Archive, 좋은 글 다시 보기
바이올로기 님과 이덕하가 인터넷에서 몇 합을 겨루었다. 두 사람 모두 동의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둘 중 하나는 바보다. 물론 정신지체자라는 의미에서 바보라는 뜻이 아니라 진화 생물학을 아주 이상하게 배웠다는 말이다.
바이올로기 님은 진화 생물학 박사라고 스스로 밝혔으며 이덕하는 심지어 학사 학위도 없으며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도 없다. 이덕하는 “자칭 재야 진화 심리학자”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보고 “당신은 진화 생물학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진화 생물학 박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보니 이덕하는 역시 사이비였군”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꽤 있는 것 같다. 만약 논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나 같아도 그런 상황에서는 이덕하가 바보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칭 재야 과학자가 엉터리일 가능성은 90% 또는 99%다.
하지만 논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계급장이 아니라 내용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을 위한 글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분은 아래 글들을 보시라. 나와 바이올로기 님의 글은 모두 아래 링크에서 인용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을 고쳐 주십시오(공개 청원) --- 이덕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34
2013년도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 --- 이덕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46
EBS 수능 교재(2013년 발행)의 진화 관련 오류들 --- 이덕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53
http://bric.postech.ac.kr/myboard/read.php?id=159886&Page=2&Board=sori&FindIt=&FindText=&divpage=
Re: 진화생물학 전공자입니다. --- 바이올로기
http://bric.postech.ac.kr/myboard/read.php?id=159946&Page=2&Board=sori&FindIt=&FindText=&divpage=
바이올로기 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 (고교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 --- 이덕하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C80/54
http://bric.postech.ac.kr/myboard/read.php?id=161086&Page=3&Board=sori&FindIt=&FindText=&divpage=
Re:여기서 이러지 말고 --- 바이올로기
http://bric.postech.ac.kr/myboard/read.php?id=161846&Page=3&Board=sori&FindIt=&FindText=&divpage=
바이올로기 님과 나는 진화 생물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문제에서 의견이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유전자 수준의 자연 선택과 개체 수준의 자연 선택”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음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도킨스는 "자연 선택의 단위는 단지 개인 뿐이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이올로기)
내가 그 문장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도킨스는 자연 선택의 단위를 이야기할 때 개인(개체)이 아니라 유전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합니다. (이덕하)
그러자 바이올로기 님이 이렇게 응답했다.
도킨스가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라고 했다는데, 그건 선택의 단위가 개인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바이올로기)
나는 이 말을 비판하고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귀찮아서...
그런데 칼도 님이 이런 말을 남겼다. 칼도 님은 몇 년 전에 BRIC에서 내가 일으킨 소동(?)에서 내 편을 들어주었다가 된통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다.
1. 바이올로기라는 분이 궁색한 처지에 빠진듯 하네요. 인간적으로, 이 반론을 보기 전에 장기휴가를 떠났기를 바래 봅니다.
2. 바이올로기님 왈: "도킨스가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라고 했다는데, 그건 선택의 단위가 개인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정말 똑같을까요?^^ (칼도)
http://theacro.com/zbxe/895380
나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이올로기 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전체 내 갈등”이 개체 수준의 선택과 유전자 수준의 선택이 똑같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때로는 개체의 번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유전자가 자연 선택될 수도 있죠. (이덕하)
그러자 바이올로기 님은 조롱을 퍼부었다.
배움에 대한 생각없이 논쟁만 하려고 하는 모습의 결과가 바로 님 바로 그 댓글입니다.
유전자끼리의 antagonism이 개체수준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하나요.. 그런 표현 중 하나네요.
님, 그냥 그렇게 사세요.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서..
제가 괜한 참견을 했네요...
자기가 비웃음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제가 상관할 이유가 없었는데.. (바이올로기)
위의 인용문을 볼 때 바이올로기 님은 “유전자 선택과 개체 선택은 구분된다”는 이덕하의 생각은 진화 생물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이비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에 나도 한 마디 했다.
It’s not only individual selection, it’s not only group selection, it’s not only intragenomic conflict, but all of these processes can occur.
ELLIOTT SOBER
http://boa.unimib.it/bitstream/10281/9831/1/IntervistaSoberEng1.0.pdf
The phenomenon of meiotic drive provides empirical support for the primacy of genic selection over individual selection.
LEDA MURLAS COSMIDES AND JOHN TOOBY
http://citeseerx.ist.psu.edu/viewdoc/download?doi=10.1.1.140.5960&rep=rep1&type=pdf
위의 Sober의 글과 Cosmides & Tooby의 글을 보고도 손발이 오그라드시겠군요. (이덕하)
그러자 바이올로기 님이 이런 답글을 달았다.
아이고,
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시던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닌데,
교과서를 바꾸고 싶다면서요. 그러면 주류 진화생물학계의 입장을 잘 알아야지요.
학자들 사이에서 selection에 대한 개념이 다 같은 건 아니지만,
주류 진화생물학계에서 쓰는 selection 개념을 말씀드릴게요.
bric 게시판에서 이런 걸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돌연변이가 individual의 fitness를 올려서 probability of reproduction이 올라가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돌연변이의 allele frequency가 올라가서 집단 내 모든 개체가 그 mutant를 갖는 현상을 positve selection (엄밀하게는 adaptiv evolution),
반대로 돌연변이가 fitness를 낮추어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allele frequency가 낮아져서 결국 그 돌연변이가 집단 내에서 소실되는 과정이 purifying selection.
이 두 가지, positive selection, purifying selection이 바로 selection입니다.
님이 가져온 그 비주류 논문들이 말하는 selection은 뭐지요? 거기에서 말하는 selection에 대한 정의는 정말 모호합니다. 그래서 비주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genic selection 사람들이 늘 예로 드는 gametic drive. 이 현상에 대한 주류의 입장은 rice의 1984년 논문 (sexual dimorphism)에 나와 있어요. 또 genic selection 사람들이 예로 들곤 하는 retrotransposon에 대한 주류의 입장은 lynch의 2002년의 genome complexity에 관한 논문을 보시구요.
genic selection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를테면 어떤 개체가 retroransposon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한 집단 혹은 한 종의 모든 개체가 retrotransposon을 하나 더 갖게 되지요? 즉 evolution이 일어나게 되지요? 답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retrotransposon이 하나 더 있는 게 개체에게 유리하든지 (positive selection) 아니면 별로 상관없든지(drift). 어느 경우든 선택의 단위는 individual입니다.
도킨스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이기적 유전자, 그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책의 내용만을 보건대 genic selection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individual 레벨에서의 selection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고요. (바이올로기)
사실 위 답글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내 생각을 비판했기 때문에 논쟁이 가능해진 것이다.
1. 우선 “유전자 선택과 개체 선택은 구분된다”에 대해 이덕하 같이 자신만의 세계에서만 사는 사람만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한심하다는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비주류 과학자도 있다는 입장으로 바이올로기 님이 한 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내가 인용한 Elliott Sober는 누구인가? 그는 David Sloan Wilson와 함께 아래 책을 썼다.
『Unto Others: The Evolution and Psychology of Unselfish Behavior』, 1998
이 책은 자연 선택의 수준과 관련된 논쟁에서 집단 선택 옹호론자들에게는 (좀 오바해서 말하자면) 성경처럼 중시되는 책이다. 집단 선택 옹호론자들의 글에 이 책이 엄청나게 많이 인용된다.
Wilson is a prominent proponent of the concept of group selection (also known as multi-level selection) in evolution. He and Elliott Sober proposed a framework called multilevel selection theory, which incorporates the more orthodox approach of gene-level selection and individual selection, in their book Unto Others.
http://en.wikipedia.org/wiki/David_Sloan_Wilson
Tooby & Cosmides는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계의 대빵이다.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든 좋아하는 이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John Tooby is an American anthropologist, who, together with psychologist wife Leda Cosmides, helped pioneer the field of evolutionary psychology.
http://en.wikipedia.org/wiki/John_Tooby
집단 선택 논쟁과 관련하여 Wilson & Sober와 Tooby & Cosmides는 거의 양극단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유전자 선택과 개체 선택은 구분된다”는 이덕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 같다.
2. 위의 인용문 중 도킨스에 대한 것만 보자.
도킨스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이기적 유전자, 그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책의 내용만을 보건대 genic selection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individual 레벨에서의 selection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고요. (바이올로기)
정말 어이가 없다. 도킨스가 genic selection을 주장하지 않았다니.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 수준에서 진화를 보아야 한다고 가장 줄기차게 주장하고 다니는 사람이 도킨스다. <확장된 표현형>의 8장 “무법자 유전자와 변경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intragenomic conflict 또는 selfish genetic element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구절만 인용해 보겠다.
Natural selection is the process whereby replicators out-propagate each other. They do this by exerting phenotypic effects on the world, and it is often convenient to see those phenotypic effects as grouped together in discrete ‘vehicles’ such as individual organisms. This gives substance to the orthodox doctrine that each individual body can be thought of as a unitary agent maximizing one quantity—‘fitness’, various notions of which will be discussed in Chapter 10. But the idea of individual bodies maximizing one quantity relies on the assumption that replicators at different loci within a body can be expected to ‘cooperate’. In other words we must assume that the allele that survives best at any given locus tends to be the one that is best for the genome as a whole. This is indeed often the case. A replicator that ensures its own survival and propagation down the generations by conferring on its successive bodies resistance to a dangerous disease, say, will thereby benefit all the other genes in the successive genomes of which it is a member. But it is also easy to imagine cases where a gene might promote its own survival while harming the survival chances of most of the rest of the genome. Following Alexander and Borgia (1978) I shall call such genes outlaws. (『The Extended Phenotype』, 133쪽)
내가 한국어판을 인용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홍영남 서울대 교수의 엉터리 번역 -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
http://scientificcritics.com/news/view.html?section=79&category=82&no=375
도킨스는 여기에서 개체 선택(orthodox doctrine that each individual body can be thought of as a unitary agent maximizing one quantity—‘fitness’)을 selfish genetic element(cases where a gene might promote its own survival while harming the survival chances of most of the rest of the genome)와 대비하고 있다.
내가 도킨스를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도킨스가 다윈의 아들이라고 믿지도 않으며 신도림 역에서 “도킨스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니지도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도킨스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Hamilton과 Williams의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 썼기 때문이다. 바이올로기 님은 비주류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무시할지 모르겠지만.
「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 I and II(1964)」, William Hamilton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 Critique of Some Current Evolutionary Thought(1966)』, George C. Williams
3. 위의 인용문 중 일부다.
어떤 돌연변이가 individual의 fitness를 올려서 probability of reproduction이 올라가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돌연변이의 allele frequency가 올라가서 집단 내 모든 개체가 그 mutant를 갖는 현상을 positve selection (엄밀하게는 adaptiv evolution),
반대로 돌연변이가 fitness를 낮추어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allele frequency가 낮아져서 결국 그 돌연변이가 집단 내에서 소실되는 과정이 purifying selection.
...
genic selection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를테면 어떤 개체가 retroransposon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한 집단 혹은 한 종의 모든 개체가 retrotransposon을 하나 더 갖게 되지요? 즉 evolution이 일어나게 되지요? 답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retrotransposon이 하나 더 있는 게 개체에게 유리하든지 (positive selection) 아니면 별로 상관없든지(drift). 어느 경우든 선택의 단위는 individual입니다. (바이올로기)
위의 구절이 무슨 뜻인지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겠다. 여기에서 retrotransposon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일반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어떤 유전자가 개체에게 끼치는 영향을 세 가지다. 개체의 번식에 이롭거나, 해롭거나, 상관이 없다. 어떤 유전자가 개체의 번식에 이롭게 영향을 끼치면 그 유전자는 gene pool에서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어떤 유전자가 개체의 번식에 해를 끼치면 그 유전자는 gene pool에서 점점 더 적어지게 된다. 어떤 유전자가 개체의 번식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냥 운에 의해 gene pool에서 많아지기도 적어지기도 한다. (바이올로기 님의 글에 대한 이덕하의 해석)
번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직계 자손만 따지면 고전적 적합도가 되고 방계 자손(예컨대 동생의 직계자손)도 따지면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가 된다. 게다가 적합도 개념은 온갖 방식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프다. 하지만 개체 수준의 적합도 개념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지금의 논쟁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위에서 인용한 도킨스가 말했듯이 “This is indeed often the case”이다. 따라서 바이올로기 님처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무방할 때가 많다. 하지만 intragenomic conflict 또는 selfish genetic element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개체의 번식(그것이 고전적 적합도든 포괄 적합도든)에 해를 끼치는 유전자가 gene pool에서 퍼질 때가 있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만약 유전자가 개체의 번식에 해를 끼치면 그 유전자를 품은 개체의 자손의 비율이 점점 줄어든다. 따라서 결국 그 유전자가 gene pool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점점 줄어들 것 같다. 하지만 안 그럴 때도 있다.
4. meiotic drive를 아주 거칠게 설명해 보겠다.
(성염색체나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유전자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유성 생식을 하는 종에서 어떤 allele이 어떤 정자에 들어갈 확률은 보통 50% 정도다. 하지만 meiotic drive는 그 비율을 왜곡한다.
어떤 싸가지 없는(outlaw) allele인 A가 있다고 하자. 그 유전자가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자. 첫째, 그 유전자는 meiotic drive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 유전자가 어떤 정자에 들어갈 확률은 50%가 아니라 80%다. 둘째, 그 유전자는 뭔가 문제를 일으켜서 개체의 번식율을 갉아 먹는다.
겁나게 단순화된 모델로 따져보자. population genetics 입문서에서는 말도 안 되게 단순한 모델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모델이 쓸모가 있다. 나는 여기에서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개체가 동시에 한 번 번식하고 즉시 죽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같은 locus에 A를 두 개 가진 개체가 없다고 가정하고, 유전자 A를 가진 개체끼리 짝짓기를 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정들을 하나씩 없앨 때마다 숫자를 따지기가 점점 더 복잡해지겠지만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요점은 유지될 것 같다.
전체 개체 수가 1000 마리인데 A를 품고 있는 개체가 100마리라고 하자. 한 locus에 allele이 두 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gene pool에서 A가 차지하는 비율은 100/(1000*2)=5%다.
A를 품고 있지 않은 개체들끼리 짝짓기를 하면 자식을 10마리 낳는데 A를 품고 있는 개체의 경우에는 자식을 9마리 낳는다고 가정하자. 위에서 말했듯이 A는 개체의 번식률에 지장을 준다.
A를 품고 있는 개체 100마리가 A를 품고 있지 않은 개체 100마리와 짝짓기를 한다. 그래서 100*9=900마리의 새끼가 태어난다. A를 품고 있지 않은 개체 400마리가 A를 품고 있지 않은 개체 400마리와 짝짓기를 한다. 그래서 400*10=4000마리의 새끼가 태어난다. 다음 세대의 개체수가 총 4900마리가 된다.
만약 meiotic drive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gene pool에서 A가 차지하는 비율은 (900*0.5)/(4900*2)=4.59%다. 하지만 meiotic drive가 일어나면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위에서 meiotic drive가 일어난다고 가정했다. 그러면 gene pool에서 A가 차지하는 비율은 (900*0.8)/(4900*2)=7.35%다.
A가 5%에서 7.35%로 늘어난 것이다.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A를 품고 있으면 번식에 손해를 본다. 하지만 유전자 A의 입장에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gene pool에서 더 퍼질 수 있다. 즉 이득을 본다.
5. 위에서 제시한 시나리오가 그냥 시나리오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래 책에 인용된 수 많은 논문들이 어떻게 학술지에 실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Genes in Conflict: the Biology of Selfish Genetic Elements(2006)』, Burt, A. & R. L. Trivers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은 바로 Robert Trivers다.
6. 최근에 진화 생물학자들이 자연 선택의 수준과 관련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다음 글모음에서 시작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THE FALSE ALLURE OF GROUP SELECTION (Steven Pinker)
Stewart Brand, Daniel Everett, David C. Queller, Daniel C. Dennett, Herbert Gintis, Harvey Whitehouse & Ryan McKay, Peter J. Richerson, Jerry Coyne, Michael Hochberg, Robert Boyd & Sarah Mathew, Max Krasnow & Andrew Delton,Nicolas Baumard, Jonathan Haidt, David Sloan Wilson, Michael E. Price, Joseph Henrich, Randolph M. Nesse, Richard Dawkins, Helena Cronin, John Tooby.
http://edge.org/conversation/the-false-allure-of-group-selection
Edge에서 듣보잡 비주류만 모아 놓았다고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이덕하
2013-08-18
바이올로기님이 진화 생물학 박사가 맞는가요? 오마담님이 브릭에 다른 닉으로 가입하셔서 헛소리 하는 것 아닌가요.
별로 어려운 책도 아닌데 바이올로기님이 관련 내용을 전혀 모르시는 듯. 개인은 유전자의 자동차라는 비유도 본 것 같은데

최익곤씨나 양동봉씨가 처음에는 그래도 교수나 학자들한테 왜 틀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진 다음에는 그냥 기피대상으로 인식되고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고 도망다녀요. 이제는 학부생들한테도 그냥 무시당하죠. 제가 처음 이덕하씨를 본 5-6년 전에는 최익곤이나 양동봉씨보다는 훨 나은 경우라고 생각했지만, 이후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꺼고, 굳이 상대하려고 안하겠죠. 속으로 웬 병신인가 하고 있을껍니다.
브릭에서 글을 자꾸 올리며 이런 저런 주장을 하자, 사람들이 글에 데이타가 없다는 했는데, 그러자 이덕하님은 다음에는 데이타나 통계등을 포함시켜서 글을 쓰겠다고했어요. 이게 벌써 5년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의 글에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글 쓴거 본 기억이 없어요. 저런게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어려운것도 아니예요. 다만 주변에 그런걸 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아고라나 다음 카페 같은데서 과학한다고 으시대면 뭐 하겠어요.
시간에 매우 쫓기고 있기 때문에 댓글 같은 건 달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어서 간단하게 적습니다. 평서체로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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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논쟁의 태도와 자세다. 혹은 논쟁의 방법론이다.
진화심리학과 진화론의 각 논점에 대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논쟁 상대방에 대한 예의에서 두 분 (이덕하 님과 바이올로기 님) 가운데 한 분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혹은 둘 다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허나 내가 보기엔 한 쪽에 더 큰 문제가 있는 듯하다.
논쟁에서의 지적 우월성(예컨대 진화론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지적 우월성) 싸움은 사실 아주 저급한 논쟁 유형(의 하나)이다. 물론 지적 우월성 측면에서 나보다 못한 수준의 논객들이 분명 있을 수 있다. 허나 나보다 몇 길 위를 날고 기는 논객들은 그 이상으로 수두룩할 수도 있다. 즉 내(혹은 네)가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똑똑해도 나는 지적 도상이라는 한 좌표상에 박혀 있는 일개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겸허함을 망각한 나 잘났네/너 못났네 논쟁은 말 그대로 논쟁의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헌데, 두 분은 쥐뿔도 모른다는 둥, 둘 중에 하나는 바보라는 둥, 입문서/개론서/교과서 다시 읽고 오라는 둥, 그야말로 치기어린 유치한 논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두 분 다 남들을 위해 가르치겠다는 욕망(좋게 말해 유능한 교사/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탁월한 책을 저술해 자기 전문 분야를 독자 대중들에게 흥미롭게 소개하겠다는 포부 따위)이 있다. 헌데 위와 같은 논쟁 태도와 의식 수준으로는 애초에 자격 미달이다. 즉 애초에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지닌 자들이 어떻게 남의 무지와 오류를 비웃고, 조롱하고, 타박하고, 공박하고, 피식 웃어대는 것으로만 일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대체 가르친다는 게 무엇인가? 가르치지만 실제로는 배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배우는 자로서 겸허해야 하는 게 아닌가? 배우는 자가 어떻게 남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 그토록 공격적 비난과 비아냥으로만 일관할 수 있단 말인가. 나 또한 어떤 사안에 대해선 무지할 수도 있고, 치명적 오류 또한 숱하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올바른 논쟁(의 방법론)이란 나와 네가 노출하고 저지르는 무지와 오류를 객관적 시각에서 서로 분석 ·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나가는 상호작용적 과정이다. 이런 상호작용적 과정에서 상대방의 무지와 오류는 지적하고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으나, 건설적 논쟁 유지의 관건인 겸허함과 객관적 태도는 잃지 말자는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바이올로기 님의 이덕하 님 글에 대한 처음 단계의 반응/응답/논평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바이올로기 님은 상당히 친절하고 상세하게 이덕하 님의 주장을 나름 분석 ·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그렇게 정성스럽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조언해줄 수 있겠는가. 이런 성의 있는 비판자/논평자를 만났다는 것은 이덕하 님한테는 일종의 축복이고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이덕하 님이 자기 글을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비판자/논평자를 되도록이면 많이 만나고 싶기 때문이랄 수 있다. (자기 현시욕, 자기 우월성 과시, 뜨고 싶은 욕구의 표출 따위는 논외로 하자.) 그리하여 자신의 논리/이론을 더 튼실하게 가다듬고 수정하고 더욱 더 발전시켜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순수한 욕구를 정말로 고맙게 충족시켜주는 한 비판자/논평자를 이덕하 님은 만났다는 것이다. 바로 바이올로기 님이었다.
나에게 여기까지의 두 분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진화론/진화심리학 관련 정규 학위 소지자와 이른바 재야 진화심리학자 사이의 아름다운 토론/논쟁(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즉 처음 단계에서 보였던 두 분의 아름다운 관계 양상이 어떻게 해서 저런 저열하고 유치하고 부끄러운 양상으로까지 악화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논객(하하하 님?)이 지적했듯이, 왜 이덕하 님은 저렇게 친절한 바이올로기 님까지 적으로 돌리게 됐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무지 이해 불가능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앞에서 지적했듯이, 문제는 논쟁의 태도/방법론이다. 결코 진화론/진화심리학의 논점을 놓고 벌이는 시시콜콜한 무지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쪽이 (혹은 양쪽 다) 올바른 논쟁 개념을 다시 되짚어보고 그 태도와 방법론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 네 가지 예를 든 이유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정말 모르면서 지적하고 있구나"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담당자들은 "기무라의 중립진화론도 모르면서 떠들어? 전혀 읽어 볼 가치가 없군"하는 반응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바이올로기)
제 의견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과학에서 말싸움이 도통 무슨 쓸모인지 모르겠습니다. 논문 제출하고 학회에서 검토받고 학술지에 실리면 되는거 아닌가요?
오마담님이나 혹은 다른 전문적으로 과학을 훈련받은 사람들은 대충 비슷한 생각입니다.
다만 이덕하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중 이런 훈련을 받지 않으셨으나, 책과 사유를 통해 어느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분들은 정규 '과학' 과정을 하고 계신게 아니라, 스스로의 지식에 바탕을 둔 '논리적 사고'의 결과의 글쓰기를 하고 계신 거지요.
즉, 문제는 이분들의 글이나 생각이 과학적인 검증을 받을 수 있는 영역 밖에 놓여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검증된 논문/자료들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실험-검증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 -- 즉 데이터 -- 가 없기 때문에 "과학적 결과"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학의 과정에 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글들을 좀 못견뎌 할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글들을 엄밀한 "과학"이 아닌 "에세이"나 "사유집"으로 생각하면, 이런 글 들이 허용이 안될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쪽에서나 읽는 쪽에서나 이런 내용을 '과학적 결과'라고 내세우거나 받아들이게 되면, 말싸움이 날 수 밖에 없겠죠.
getabeam /
“아무리 검증된 논문/자료들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실험-검증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 -- 즉 데이터 -- 가 없기 때문에 "과학적 결과"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터”보다는 “reference”겠지요. 학술지에 실린 리뷰 논문에서 새로운 데이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그것이 과학적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 글에 reference가 없거나 빈약한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그것으로 공격을 당할 때 저는 항상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정규 과정을 밝지 않는다고 reference를 달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최근에 쓴 글의 경우에는 특히 <사이언티픽 크리틱스http://scientificcritics.com>에 실은 글의 경우에는 reference을 이전 글보다 훨씬 충실하게 달고 있습니다. 물론 논문 수준에는 턱없이 못 미치겠지만요.
또한 이 본문만 하더라도 그냥 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도킨스도 인용했고, selfish genetic element를 다룬 책 중에 가장 권위가 있어 보이는 책(이 책에 대한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실린 서평을 보십시오)을 언급했습니다.
단순히 Reference만 가지고 논문을 쓰는 경우 즉 "Review Paper"의 경우에는, 새로운 주장 이나 가설, 자신만의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그 논문을 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요약 정리해주고,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게 그 문제점에 대해 논의해 보는 거지, 다른 새로운 주장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리뷰논문은 새로운 과학적 결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어떻게 보면 그 효용이 제한적입니다. 물론 대가가 제대로 잘 써준 review paper는 논문 읽기 게을러 하는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 )
오마담님이나 다른 분들이 간혹 이덕하님에게 문제를 제시했던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독창적인 주장을 하시는 글들을 간혹 쓰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제대로된 데이터가 갖춰지지 않은 새로운 주장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과학적 주장이라고 할 만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용의 적절성을 떠나서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으로 선악구도를 만드는 것도,
대부분의 문장에 '~인 것 같다'는 표현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글쓰기도,
글 전체의 내용이 아닌 일부만 잘라 맥락을 제거한 후 반박하는 방식도 불편합니다.
셋 다 진지하게 과학을 하는 입장과는 거리가 먼 거 아닌가요.
깝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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