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한나님이 올리신 <금강산 가는 길2> 포스팅에 올렸던 댓글인데, 분량도 길어지고 좀 아깝기도 해서 별도 본글로 올립니다. 조금 있다가 로자한나님 글에 달았던 댓글은 지우겠습니다. 로자한나님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제8요일>. 워낙 어렸을 때 읽은 작품이라 디테일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지만, 2차대전 끝나고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다 파괴된 동유럽 어느 나라가 배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고픈 젊은 연인들인데, 그렇게 할만한 공간- 4개의 벽과 하나의 천장을 갖춘 공간-을 단 몇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방황하죠. 인간 존엄성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건드리는 실존이랄까... 어려서 그랬는지 그 연인들의 절박한 갈망이 잘 이해되지는 않더군요. 제일 마지막에 여자가 포격으로 무너진 길거리 폐허에 드러누워 연인에게 와서 자기를 가지라고 울부짖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아마 저 작품을 읽은 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넘어가던 무렵 아닌가 싶은데, 어리다는 건 제가 남녀의 정념을 이해하기에는 어렸다는 얘기지 무슨 초등이었다는 말씀은 아니구요^^ 실제로 작품의 내용이나 표현에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재나 줄거리, 분위기 등이 2차대전 이후의 암울한 분위기를 적절하게 형상화해서 히트한 것 아닌가, 그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작품에 대해서는 대학생이 된 뒤에도 문예지  등에서 한두번 누군가 언급한 것을 봤을 겁니다. 그러니 저 작품의 제목과 내용이 동기화(synchronized)될 수 있었겠지요. 다만,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구해질 듯하다가 못 구하고... 그런 좌절이 되풀이되면서 여주인공이 막판에 저런 폭발을 했던 모습만은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집에 책이 좀 많았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별 것 아니겠지만 60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좀 특이한 편이었습니다. 누가 독서 지도해주는 일도 없어서 집에 있던 책을 이것저것 잡다하게 읽었고, 그러니 사람들이 잘 모르는 책도 읽었는가 하면 남들이 대부분 읽는 책은 또 안 읽은 경우도 많구요.

 

중고등학교 때 신구문화사(확실치는 않은데)에서 나온 [전후세계문제작품집]이라는 작품집에서 저 <제8요일>을 읽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기억이 분명치는 않구요. 세계 여러 나라의 2차대전 이후 문제작들을 소개해놓은 저 책에서 몇 개 기억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특히 佛蘭西(당시에는 프랑스를 이렇게 썼죠^^) 작품집이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날 벽을 뚫고 지나가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사나이... 온갖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이 재능을 일종의 병으로 여기고 의사와 상담합니다. 의사가 약을 조제해주지만 이 친구는 너무 바빠서 그 약을 먹는 걸 잊어먹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되죠. 그 여인을 만나기로 한 날인데 몸이 좀 찌뿌드드해서 감기약이라고 먹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의사가 지어준 '벽을 통과하는 병'의 치료약을 잘못 먹은 것이었죠.

 

이 친구가 여인을 만나려고 신나게 벽을 통과하는 순간, 그 약의 효력이 발동되어 이 사나이는 영원히 벽속에 갇히게 되었다는... 그리고 사람들이 그 근처에 가면 지금도 그 가련한 사나이가 벽속에서 신음하며 토해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들린다나 뭐라나... ^^ 하여튼 이 비슷한 스토리였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우리나라 어느 극단이 저 스토리를 극화해서 공연한다는 얘기를 본 것 같기도 하구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역시 프랑스 작품인데 어느날 정부가 법률을 개정, 사람에 따라서 한 달을 마음대로 늘려서 살 수 있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가령 세금을 많이 내거나 국가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달이 30일이 아니고 35일 40일 60일 이렇게 막 늘어나는 거에요.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별볼일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 달이 20일로 줄어들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대혼란이 일어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도(?)의 혜택을 적극 활용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심지어는 이 늘어나는 시간을 거래하는 암시장까지 형성이 됩니다. 주인공(아마 소설가였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은 처음 이 제도에 대해서 시큰둥하다가 누군가의 꾀임에 빠져 자신도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들입니다. 그리고 8월(가령)의 마지막 날(31일)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8월 32일이 되어있는 거에요. 말 그대로 여분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신기한 경험도 하지만, 곧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이 8월 40일쯤에 만난 사람을 9월 1일에 만나보면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냥 8월 31일까지만 살았거든요. ㅎㅎㅎ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작 심각한 일은 이 주인공이 9월 50일쯤에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거에요. 불타는 사랑을 나누고 10월 1일에 이 여인을 만나러 가보니 이 여인은 "이 뭐 병?" 이러는 상황이 된 겁니다. 이 여인은 9월 30일까지만 생활했으니까요.

 

좌절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 주인공에게 뉴스는 "정부가 새로운 달력법을 여러 부작용 때문에 폐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런 소식 따위가 뭐란 말인가, 나에게는 그따위 소식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독백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납니다(그런 것 같습니다^^).

 

로자한나님 덕분에 정말 저로서도 거의 40여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봅니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시간과 체력만 허용하면 옛날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풀어보고 싶기도 한데, 그것도 쉽지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