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813165715&section=03

프레시안에 역사문제 연구소장 서중석 교수의 이승만에 관한 책 발간과 관련 대담이 실렸습니다
(추가 작성분 8월 15일 8시 :  아래 토론 가운데 이승만이 대단한 위인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이걸 보면 관점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승만 대단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저 욕심많은 늙은 정치인일 뿐
이승만이 독립운동시 분파주의나 횡령은 다 아는 사실이고 김구 암살에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그렇고 권력욕도 대단하고 김구가 시장에서 배추 시레기 주어다가 국끓여먹을 때 미국에서 스테이크 먹고 말로 독립운동 하던 인간이고
프레시안 기사는 역사학자가 한 대담이기에 나름 근거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부합하고요 백보 양보해서 한국전쟁에서 나라 망하지 않게 하고 한미 방위조약 잘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무슨 국부니 건국의 아버지는 생뚱맞지요 그냥 저냥한 대통령이고 무능하고 아첨꾼에 둘러싸여 그 전쟁중에도 권력유지하려고 어거지쓰고 계엄령 선포하고 국회의원 버스채 납치하고 권력욕의 화신일 뿐이지요 )

프레시안 : 한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때때로 듣는다.

그런데 이 전쟁을 가만히 보면,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그렇게까지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의미의 한국전쟁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대응엔 문제가 많았다.

프레시안 : 미국의 대응에서 어떤 점이 문제였다고 보나.

서중석 : 1950년 5월 하순부터 6월 25일까지 북한에서 군과 물자가 집중적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왜 미국이 이에 관한 정보 보고를 중시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 보고를 중시하고 잘 대응했다면) 미국은 전쟁을 미연에 막거나 전쟁 초기에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적극 참전한 건 다 인정하고 중시한다. 그건 미국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모두 미국은 늦게 참전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전쟁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참전했다.

또 하나는 전선 교착 문제다. 1951년 5월쯤 되면 중국군이 또 밀리기 시작해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이 교착됐다. 그러면 빨리 전쟁을 그만두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후 2년이나 더 끈다.

이건 휴전 회담 때문인데, 미국도 1951년 5~6월경엔 이 전쟁에서 승자가 있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표가 휴전 회담을 제안했을 때, 미국이 바로 응한 것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거냐를 가지고 4개월 정도 설왕설래 끌었고, 그다음에 18개월이라는 긴 기간이 포로 문제로 늘어졌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공산 쪽 책임도 크다. 이데올로기 전쟁, 이념 전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 위신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도 미국이나 중국이나 시간을 질질 끈 면이 있다.

그런 점도 오늘날 되새겨봐야 한다. 사실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른 것 아닌가. 지금의 휴전선하고 1951년 5~6월 전선하고 거의 똑같다. 그때 전쟁을 그만뒀다면 피해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공산군 물리친 '국부' 이승만? "잘한 게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땠나.

서중석 :
이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경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특히 1949년 9-10월부터는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면 북한이 쳐들어올 것에도 대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전쟁 전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대부분의 전사 연구가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이 병력면에서 약간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아주 많았던 걸로 보진 않는다. 전투에 투입될 수 있던 인원을 이것저것 다 합쳐도 북한군은 20만 명을 못 넘었다. 남한의 전투 병력을 보면, 육군은 9만 명을 약간 넘었다. 경찰을 비롯한 다른 병력을 다 합쳤을 때 14만∼16만 정도로 잡는다.


북한이 자주포라든가 전차, 야크기를 갖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까지 우세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하천이 많기 때문에 시설만 제대로 해놓으면 방어하기가 좋은 면이 있다. 그런데 방어 시설을 잘 갖췄나? 이런 데서도 문제가 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병의 3분의 1(2분의 1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건 믿기 어렵다)이 휴가 상태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을 해가지고 주요 장교들은 술에 흥청망청 녹초가 된 채 일요일을 맞이한 걸로 돼 있다.
그것 말고도 군 일부에서 '대전차 방어 시설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제대로 안 했다.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도, 대비했다고 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이 스스로 공언한 만큼만이라도 대비했으면 전쟁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대비를 충분히 했다면 전투 양상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개전 직후) 중부 지방으로 북한군 3개 사단이 내려왔는데, 우리 6사단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막았다. 오히려 초반전엔 승리했다. 7월 1일 이전까지는 북한이 중부 전선으로 내려오는 걸 저지했다. 그러니 서부 전선에서도 그만한 노력을 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거다. 그런 노력을 했나? 너무나 문제가 많았다고 당시 지휘관은 물론 많은 군사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 않나.

특히 사단장 교체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요 사단장을 교체했다. 전쟁 초기에 사단장의 힘이라는 건 아주 중요한 거다. 사단이 제대로 살아남느냐, 뿔뿔이 흩어져버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사단장이던 이형근(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 <편집자>)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신임 사단장들이) 자기 사단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의 사람들…'낙루' 국방부 장관과 '북어 사건' 총참모장

프레시안 : 그런 의문은 여전히 온라인 공간에서 회자되고 있다.

서중석 :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군 경력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다만 영국 상선의 선장은 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국회에 나와 '5000톤 배 하나 주면 공산당을 다 치고 바다를 다 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했다. 또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런 흰소리를 하는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앉혔다. 그 전엔 내무부 장관을 맡겼고, 1950년 들어서는 국무총리 서리에 앉혔다. 신성모 같은 사람이 요직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낙루(落淚)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 노인네가 하문(下問)을 하면, 그 당시엔 하문이라고 했는데, 신성모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런 '낙루 장관', '지당(至當) 장관'이 많았다. 대통령이 방귀를 뀌니까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하여튼 이 전 대통령은 군에 대해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낙루 장관'을 국방부 장관에 2년 넘게 앉혀 놓았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해임하지 않았다. 1951년 들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하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국회에서도 세게 나오고 그러니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신성모 장관을 해임했다. 그러고 나서 또 요직인 일본 주재 대사를 시켰다.

총참모장 채병덕도 마찬가지였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데, 일제 때 야전군을 맡아본 적이 없다. 후방 일을 해서 작전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채병덕도 신성모 못지않게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파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김구 암살 사건에도 연루돼 있다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인물이다.

채병덕은 1949년에 총참모장이 됐다가 몇 달 후 '북어 사건'으로 해임됐다. 당시 38선에선 남북 간 물물 교환이 많았다. 그걸 장교들이 얻어 쓰기도 하고 군에서 필요한 비용으로도 쓴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북어 사건이 터졌는데, 사단장이던 김석원이 '채병덕 총참모장이 북한과 물물 거래를 하는 데 관여한 것 아니냐'고 맹렬히 공격하고 대통령에게 항의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 두 사람 다 물러나게 했다. 1949년 10월, 채병덕은 그렇게 해임되고 예편됐다. 그런데 두 달 후, 대통령이 채병덕을 현역으로 복귀시켰다. 하필이면 전쟁 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에는 다시 총참모장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는데, 채병덕은 작전을 제대로 펼친 게 없다.
먼저, 몰래 달아나고 또 달아나며 국민에겐 거짓말 방송

프레시안 :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떠오른다.

서중석 : 대통령은 또 어땠나. 전쟁이 났을 때 이 양반은 그야말로 노인네 모습이더라. (물론) 이분도 전쟁(을 이끈) 경험이 있을 수가 없다. 국가의 중요한 장도 1945년 이전엔 맡을 수가 없지 않았나. 행정 경험, 전쟁 경험 같은 게 없거나 아주 약할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가 간다.

. 그런데 6월 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고도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 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논의하거나 세운 게 없다.

대통령은 6대 독자라 그런지 자기 목숨을 굉장히 중시했던 분 같다. 그날(6월 25일) 밤이 되니까 불안해졌는지, 피신하겠다고 했다. 존 무초 초대 주한 미국 대사가 오니까 무초 대사에게 '피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 큰일 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무초 대사가 오히려 말렸다.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날은 이 노인네가 안 움직였다.


그다음 날은 월요일이니까 제대로 된 국무회의도 열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전황을 정확히 알리는) 방송이라도 했어야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진주만 기습 사건이 나니까, 미국 사람들을 단결하게 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으면 이 전 대통령도 국가 원수로서 국민한테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어떻게 해나가겠다' 하는 중요한 연설을 바로 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러자 6월 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체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비밀이 새 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진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프레시안 : 이때까지 국민들은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서중석 : 그렇다. 대전에서 대통령이 방송국 책임자를 불러 자기 말을 전국 방송으로 내보내게 했다. 거기서 녹음한 거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6월 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몇 차례 내보냈다.


 대통령은 대전에 가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하다가 7월 1일에 또 피신했다. 대전이 함락되는 건 7월 20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7월 10일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위태롭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피신할 준비를 하더라도, 7월 초까지는 대통령이 전체 상황을 파악하면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7월 1일 새벽 3시에 이번엔 대구 쪽으로 가면 게릴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그러고 나서 목포에서 또 배로 부산까지 갔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은 전쟁 났을 때 피신만 하고 다녔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국회는 이승만 정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私刑)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그러자 이 전 대통령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하고 관제 민의를 만들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대통령이 그런 난세 중의 난세를 초래한 것이다. 거기다 계엄령 해제를 국회에서 결정하면 대통령은 바로 집행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 그거 헌법 위반이다.

이렇게 부산 정치 파동 과정에서 위헌·위법을 이승만 정부가 너무나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1952년 7월 4일 발췌 개헌을 해가지고 영구 집권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

그러고 있으면서 과연 전쟁 수행을 제대로 했겠나. 전선에선 사람들이 피 흘리고 있는데 (임시 수도) 부산에선 정부가 이렇게 위헌적인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했다는 건 참 수치스런 일 아니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략가 이승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프레시안 : 두 가지를 추가로 짚었으면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대통령이 영락없는 노인네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와 달리, 이 전 대통령이 몸을 피하면서도 미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반전의 계기를 만드는 등 냉정한 전략가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도 '전략가 이승만'의 공이라는 의견이다.

서중석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전략 같은 건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지켜주던 나라 아닌가. 미국은 자발적으로 앞장섰다. 무초 미국 대사가 바로 본국에 보고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이 전 대통령 말을 듣고 참전한 게 아니다. 자기들의 세계 전략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제를 보면, 정전협정 체결 후 한국에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미국으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연출이긴 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아주 세게 주장한 것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조약엔 북한이 쳐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승만식) 북진 통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한국의 행정 관리 아래 있다고 미국이 인정한 영토에 대한 무력 공격에 대해서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북한이 한국을 공격했을 때는 조약이 적용되지만 반대의 경우엔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 <편집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전쟁이 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즉각 개입하도록 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도 그간 끊임없이 나왔다. 북한이 침략할 경우 미국이 일정한 절차를 밟아 개입하도록 돼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