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러하듯이 귀한 집 남식, 여식으로 자라나 어느덧 세상에 나가보니 '귀한가 어떤가는 모르지만' 남의 집에도 남식과 여식이 있고 부모 형제라는 게 자기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수줍게 봉긋 솟고 사타구니에 방초가 자라는가 싶더니 자꾸 남의 집 여식과 남식에게 눈이 간다. 뭔가 모르겠지만 어떤 욕구가 이는데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마구 손에 잡히는 걸 부수어버리고도 싶고 무언가 큰 것을 쌓아올리고도 싶다.

자아와 양가감정이 등장한다. 그들은 아직 모르나 평생을 지고 가게 될 짐.

짝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경합이 치열하다. 누군가는 일찍, 누군가는 또래와 비슷비슷한 시기에, 누군가 한참 철이 지나서야 짝을 짓고, 또 누군가는 평생 혼자 살아간다.

짝을 짓지 못하면 어떡하나, 내가 고른 짝이 불량품이면 어쩌나. 혼례를 앞두고 가슴 속 그래프는 지직거린다. 짝을 지었다. 한 고비를 넘은 셈. 한동안 좋다. 세상에 못할 것이 없고 세상이 둘을 축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짝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서 채 짝을 짓지 못한 다른 암수들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윽고 콩깍지는 벗겨지고 누군가 말마따나 이제 인생은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힘들다. 그래도 아직 짝을 보며,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느낀다. 그래도 내가 니들보다는 낫지라는 그 우월감을 어찌 벗어던질 수 있으리. 그것마저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동류들 틈에 끼어 나름의 깜냥으로 세상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정말 삶은 절절하다. 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은 새로 짝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짝을 짓고 나 거치게 될 불안을 익히 아는 터라 또 속으로 고소해한다. 그 놈의 양가 감정. 하하. 하긴 혼인이라는 걸로 치자면 나중에 그것과는 음가가 다른 양가 감정이란 게 또 있다. 이것 역시 무시못할 놈.

자신에게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계속 남들과 비교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자기보다 없고 못 배운 것으로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갑자기 얼굴에 화기가 돌고 엔돌핀이 마구 분출된다. 상대적 행복감을 느낀다. 짝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다. 짝은 화답한다. 둘은 몰아지경에 빠진다. 자기들이 옳게 보았노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안다. 그게 딸딸이에 불과하다는 걸. 그 구슬픈 풍경이라니. 그들은 입으로 선언하면 그게 곧 올바른 것이 된다. 검증 따윈 필요 없다.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검증이 두려운 거다. 그들이 자식을 키운다. 바담풍 바람풍하며.

보고 있으면 재미나다. 지지고 볶다가 가끔 행복하다 그러며 살면서 옆집 사람들을 보며 자기는 언젠가는 그네들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망상을 안고서 자위를 하며 자기 동류들을 비웃는다. 지들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남들은 없나? 여전히 유효한 명제 - 동류는 동류를 기피하는 법 .  동류이면서도 동류라는 걸 인정 못한다. 결국에 도와줄 사람은 그 동류란 걸 알면서도.


그런 부부 중에 암컷의 마음과 몸을 요리하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철든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연민이 앞서니까. 어린 사람들을 가지고 놀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현실에서 그 암수를 가지고 노는사람들은 적지는 않다. 그 쾌감이란. 그들 역시 도찐개찐이지만. 하긴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나름 재미는 있다. 나도 가끔 그 상황에 개입한다. 비열한 경우에 한해서.

짝을, 핏줄을, 회사 동료들 바라보며 찬성과 인정이란 화답을 바라는 그 눈빛이란. 순한 동물의 눈을 닮았다. 이면에 도사린 공포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을 낫기도 하지만.

제대로 보았는가는 자신만이 안다. 타인의 동의가 곧 자신이 제대로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건 봉건이다.

적지 않은 여자들은 자기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여기서 여자는 어린이로 치환해도 좋다. '어떤' 남자들도 여자가 자기 편을 들어주길 원한다. 하지만 편들어 주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그 어떤 남자나 여자는 짝을 위해 주되 짝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상응하는대가를 치르되 그 잘못을 넘어서는 부당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쓰다보니 미몹에서 지껄였던 이야기 되돌이표다.

혼자서 움직이는 건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환경이다. 가끔 혼자는 하나로 변해 다른 몇몇 하나들과 힘을 합쳐 무리와 맞선다. 어떤 파열음이 있고 상황은 파국에 이르지 않는 채 끝나고 하나들은 흡족해 하며 다시 혼자가 되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람을 읽어내는 좋은 방편은 상대에게 몸을 굽히어 권력을 주는 것. 어릴수록 권력에 취하다 권력에 먹힌다.

암컷을 제어하지 못하는 수컷, 수컷을 제어하지 못하는 암컷으로 이루어진부부란 말 그대로 비극이다. 세상에 혼자 살아도 남편보다, 아내보다, 아내를, 남편을 잘 아는 사람들도 있다. 짝을 제어하는 자들은 내가 그린 풍경에 들어서서 짝이 잘못 본 걸 알면 무작정 짝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는다. 그때 표정 자체가 다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이 들어 남들도 한 때는 네오와 트리니티였지만 지금은 메로빈지언과 그의 짝 그리고 그 옆의 1회용 여성 같은 모습으로 남았다는 걸 아는 게 철이 드는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성체들은 나에게 '저들도 귀한 남의 자식 아들 딸'이라고 으르렁거린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 속에 담긴 ,그 주체못할 두려움이 깔린 으르렁. 그건 내가 할 소리. 그래서들 그렇게 귀한 남의 집 자식들을 이용해 먹었나?

아 이건 부부의 일면만 본 것이다. 내가 자신의 암컷과 함께 있을 때 걱정하는 수컷들을 많이 보아서. 주로 그들 세계에서 잘 나가는 수컷들이 그런다. 나는 지네 암컷에게 큰 관심 없는데. 그들이 상용하는 언어를 빌려 쓰자면 "니네들 옆에 있을 정도 여자들한테 정을 주기엔 내 인생이 아까운데". 이건 내가 잘났거나 그 여자들이 별 볼일 없는 존재란 뜻이 아니다. 그 수컷들이 별 볼일 없는 부류란 소리지.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언어로 표현한 것.

이건 어디까지나 일면을 들여다본 것. 그리고 부부는 조직의 다른 이름. 그러니까 개인, 조직, 사회라는 삼발이.


도덕이란 게 별 게, 무척 높고 깊은 어떤 게 아니다. 어린 사람들이야 꼴까닥 할 즈음까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냥 대개 내가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건 남들도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건 남들도 원한다는 걸 아는 일이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 己所欲 施於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