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포스트 콜로니얼 문학이론>>이란 책의 역자 서문의 첫 문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번역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 나)"와 "비아(非我,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했던가?"라고 씁니다. 식민지 시대, 무정부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신채호는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는 헤겔주의적 역사관(그리고, 이를 그대로 반복하는 맑스주의적 역사관)을 표명합니다. 여기서 헤겔주의적 역사관이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의 주인과 노예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과 이를 통한 역사 전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나와 나 아닌 것의 이분법을 통해,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분법을 통해, 식민지 시대에 민족이라는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정립에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겠죠. (물론, 번역자는 신채호의 역사관이 이렇듯 협소한 이분법에 종속되지는 않는다고 씁니다. 제가 신채호를 읽은 적이 없으므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겠네요.)

탈식민주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나는 누구이고, 나 아닌 것은 누구이며, 나는 나 아닌 것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그 관계란 자명하게도  지배와 피재배의 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 관계를 통해, 예속된 노예로서의 식민지 주체는 나 아닌 것인 지배하는 주인과 관계를 맺으며, 주인을 마주하면서 "나"라는 자기의식, 즉 정체성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로부터, 나의 나 아닌 것에 대한 투쟁(혹은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공격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투쟁은 신채호, 헤겔, 맑스에게 있어 모두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죠. 식민지 시대 피지배자의 지배자에 대한 투쟁, 노예의 주인에 대한 투쟁,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투쟁 말이죠. 그런데, 그 투쟁 가운데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주체를 가정할 수 있어서, 역사가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에 따라 흘러가고, 지배와 예속의 역사가 투쟁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간편하겠습니까? 단적으로 식민지 부역자들을 "나"라는 범주에 넣어야 겠습니까? 아니면, "나 아닌 것"이라는 범주에 넣어야겠습니까? 혹은 일본에서, 혹은 미국에서 공부를 한 식민지 지식인은 내부자(insider)이겠습니까? 외부자(outsider)이겠습니까? 그리고 정신대나 징용, 징병의 경우,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나"라는 자기의식,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을 어떤 정도로 가지고 있었을까요? 혹은 민족이라는 자기의식과는 동떨어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쯤에서 탈식민주의 문학에 대한 얘기는 접고, 원래 이글의 목적이었던 정신분석학에 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 나의 나 아닌 것에 대한 공격성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의 해리에게 잘 나타나죠. 해리는 사람들을 친구와 빵꾸똥꾸로 분류를 하고, 자기 편은 친구, 자기 편이 아닌 경우는 빵꾸똥꾸가 되는 것이죠. 해리는 아직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는 헤겔적 경쟁(rivalry)이라는 상상의 세계 속에 머무릅니다. 그리하여 해리는 또래 친구인 신애가 가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어야합니다. 심지어 극중 줄리엔(줄리엔 강 분)이 신애를 목마를 태우자, 그것을 "질투"하여 자신도 줄리엔과 "같은" "말"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해리의 아빠가 줄리엔과 같지 않자, 이번에는 줄리엔 "같은" 말이 아닌, 줄리엔을 갖기를 원하게 되죠. 그래서 해리는 줄리엔을 탈 수 있는 조건인 시험 성적 100점을 획득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해리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카우보이가 말을 타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 까지하죠. 이와 같은 "줄리엔"이라는 질투의 대상이 등장 하기 바로 이전 장면에서, 해리가 신애와 어떤 상상적 경쟁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는 길이 같았던 신애에게 해리는 "왜 자꾸 날 따라와?"라고 신애에게 말하자, 신애는 "가는 길이 같아서 그러잖아!"라고 대답하고, 해리는 다시 "이렇게 붙어서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친구로 생각할 거 아냐?"라고 말하자, 해리는 "사람들이 왜 우리를 신경쓰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줄리엔이 등장하는 것이죠. 해리의 신애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이와 같이 상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죠. 이미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친구"인 신애와의 실재적인 관계는 보지 못한 체, 사람들이 자신과 신애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다시, 친구와 빵꾸똥꾸로의 분류로 넘어가서, 해리는 친구에게 친구라는 증표를 보여줍니다. 해리 자신의 신체에서 떨어져나간 이빨을 보여주는 것이죠. 저의 <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유아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똥을 엄마에게 선물로 준다고 썼었는데, 해리는 바로 그와 같은 단계에 위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상적 단계에서 유아는 엄마와  분리되지 않은 체로 남아 있죠. 마치 해리가 친구와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그리하여, 해리는 친구인 정음(황정음 분)에게 아몬드 좋아하냐고 묻고는, 전혀 더럽다는 의식이 없이 자신이 빨아 먹고 남은 아몬드 초콜렛의 아몬드를 정음에게 줍니다. 해리는 아몬드는 싫어하기 때문에, 초콜렛만 빨아먹고 아몬드는 정음에게 주는 것이죠. 또한 백김치를 먹고 싶어하는 친구인 세호에게는 빨간 김치를 입으로 빨고서는 백김치랍시고 세호에게 주기도 합니다. 똥이 더러운줄 모르고 선물로 주는 아이처럼, 빨아먹고 남은 아몬드와 백김치에 대해 더럽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죠. 해리 자신과 친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더러울 것이 없는 것이죠. 마치 엄마가 빨아 먹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전혀 더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이렇듯, 신애와의 상상적 경쟁 속에 놓여 있는 해리는, 자기 편인 친구와 자기 편이 아닌 빵꾸똥꾸로 나누는 해리는, 신애를 통해, 신애와의 경쟁관계를 통해, 상징의 세계, 언어의 세계로 진입을 할 것입니다.

<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늑대소년"이 형성하게되는 "신체적 자아 정체성"에 대해서 썼었습니다. 음식물을 섭취하고 배설하는 하나의 그릇과 같은, 혹은 우유병과 같은 것으로서 신체라는 자아 정체성을 유아가 어떻게 형성하는 가에 대해 썼었죠. 이는 "나"라는 신체가 "나 아닌 것"을 "집어 삼키는" 메카니즘이기도 합니다. 유아는 입을 통해 나 아닌 것, 즉 나의 바깥을 테스트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상상적인 신체적 자아 정체성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정체성이 상상적인 것인 이유는 이 신체의 안과 바깥, 나라는 내부와 나 아닌 것이라는 외부를 가르는 신체적 자아 정체성은 상상되지 않고서는,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을 정도로 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국가와 같이 말이죠.) 입을 다물고 있어서 매끈하게 내부와 외부로 나눠지던 강장동물과 같은 것으로서의 인간은 입을 여는 순간 그 매끈하던 표면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죠. 하나의 주름(fold)이 생기는 셈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하나의 단세포에서 계속해서 주름이 생기는 것으로 인간이 되겠군요.) 외부와 내부가 겹쳐지는 주름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고선, 무엇이 나인지, 무엇이 내가 아닌지를 되물을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나 아닌 것과 어떤 관계들을 맺게 되는지를 되물을 수 있겠죠.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것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까지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낯선 것, 이질적인 것, 참을 수 없는 것을 하이데거는 unheimlich라고 말합니다. 저 독일어에서의 Heim은 "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집처럼 편안한(homely)"라는 의미가 되고, 이것에 부정어(un)가 붙어서, unheimlich, 즉 기이한, 낯선 등등의 의미가 되는 것이죠. 이 단어는 위에서 유아가 어떻게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함으로써, 나라는 내부와 나 아닌 것이라는 외부를 구분함으로서 유아의 신체적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는지를 보였던 것처럼, 하나의 공동체가 어떻게 울타리를 치고,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이질적인 것, 낯선것을 배제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되는 지를 보이기도 하겠네요. 따라서,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이 울타리 안으로 침범해 올 경우 그것은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배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인간의 신체적 자아 정체성이, 혹은 상징에 의해 구성되는 정체성이 그 근본으로부터 안과 밖이 뒤섞여 있는 체로 탄생을 한다면? "나"라는 자기의식이,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이 이질적인 것을 포함한 체로 탄생하는 것이라면? 하이데거의 반동성은 그 낯선 것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에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당신 자신이 그 낯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당신 자신이 만일 이방인이라면? 당신 자신이 망명자라면? 당신 자신이 내부자도 될 수 없고 외부자도 될 수 없다면? 그리하여 스스로 "경계인"일 수 밖에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