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이사를 했습니다. 이 전의 전세집 주인에게 돈을 받아야 하고, 이사하는 과정을 챙겨야 하는둥
눈 코 뜰새 없이 바쁠 때, 엄마는 고슬고슬한 밥을 지었습니다. 엄마에게 침대를 옮겨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엄마는 엄마대로 밥을 하고, 저는 제 일에 충실하는 하루를 보냈지요.
이사가 거진 끝났다싶으니 저녁이었습니다. 그 바쁜와중에 엄마는 비싸보이는 생선한마리와
잘 지은 밥, 그리고 몇 가지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냥 짜장면이나 하나 시켜먹지 뭐하러 귀찮게 그런일을
하냐는 저의 핀잔을 가볍게 무시하던 엄마가 차린 밥상은 이사하느라 수고한 '가족'들의 밥상이 아니라,
10년전에 '죽은' 아버지를 위한 밥상이었습니다.
엄마는 10년 전 부터 항상 그래왔습니다. 가족의 안녕이 필요한 시간이 오면 아버지를 위한 밥상이
으레 차려졌습니다. 엄마와 '미신'이다, 아니다 하고 논쟁할 마음은 한 치도 없기에, 오랜만에 아버지와
겸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음예공간예찬'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음예란 구름이 하늘을 덮어 어둡다는 뜻입니다.
더 알아듣기 쉽게 풀자면,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완전히 밝지도 않고, 그럼 그림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늘 역시 아닙니다. 서양인식이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은 동양만의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예' 는 과학적사고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입니다. 제가 희미하게 느낄 수 있는 '음예'는 
대낮에 내린 햇빛이 한옥 마당에 반사되어, 창호지문을 통과하고 황토벽에 흡수되어 겨우 남은 
어스름한 빛, 어둠입니다. 끌로드 모네의 수련을 보기에는 부족한 빛이지만 먹을 갈아 붓으로 친 대나무를 
보기에는 부족함 없는 빛입니다.  
음예공간예찬의 저자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 뿐만 아니라, 놋그릇에 담긴 된장국 또한 '음예'이며, 
동양여성의 작고 검은 눈 역시 '음예'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점점 사라지는 '음예'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책입니다. 동시에 서양과학이 동양에 '침투'하지
않았으면 '음예'적인 동양과학, 적절한 단어가 없어보이기에 임의로 설정합니다, 이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과학은 서양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리엔탈과 옥시덴탈의 프레임을 넘은 순수한 '과학적 사고'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과학은 세상의 여러 요소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인문학, 정확히 동양의 인문학을
판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박혀있는 돌에도 생명이 있다는
동양의 인식은 실제로 돌에게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돌의 생명은 '나름의' 해답을 찾기위해 세우는 가정일 뿐입니다. 가정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과학에선 중요할 지 몰라도
동양의 인문학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찾는 것이 동양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사고는 필요합니다. 물에도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밝혀내는 것은 꽤나 중요해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학적 사고는 다른 의미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세계世界에 집중한 나머지, 관觀을 보지 못합니다.
과학적 사고에서 세계가 틀리게 되면, 세계관 또한 없습니다. 이성적이고 철저한 분석은 과학이 발전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양적 인문학을 분석하기에 가장 큰 한계이기도 합니다.  


물론 과학을 내세운 사이비들에 대한 날선 비판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일반인에게는 과학으로 사기를 치고, 과학자에게는
동양적 인문학으로 변명을 하는 이들의 행태는 사기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과학적 사고는 주의해야 합니다. 역할을 넘는 실수를 하고 있지 않은지 인문학적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한의학과 굿 역시 마찬가집니다. 흔히 과학에서 하는 것처럼, 심각한 오류가 발견 됐다고 폐기하는 결정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인간에 대한 인식, 사후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과학이 할 일은 이러한 인문학들이
과학의 이름을 은근슬쩍 빌리고 있진 않은지 '견제' 하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칼을 쥔 것은 과학입니다.
과학은 '진정한' 동양적 인문학의 발전을 도우는 일을 충분히, 그리고 훌륭히 할 수 있습니다.  

날 선 비판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적으로 날이 섰는지, 과학적으로 날을 세웠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참조 : 음예공간예찬, 다니자키 준이치로. (1996.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