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영화는 남성 감독에 의해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성의 존재는 언제나 부차적이다. 그러나 남성적인 상상력의 공간에서도 그 뒤편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여성'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남성 감독과 남자 주인공이 인지하지 못하게 몰래 쓴 여주인공들의 '편지'들을 읽을 수 있다면, 완고한 남성 중심 서사에 '균열'을 만드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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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아시스>의 한 장면,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영화도 성문제에 있어선 전혀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강간당하는 여주인공들

남성 주도의 영화 서사에서 강간이 자주 등장하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김기덕의 영화야 인용하기도 지겨울 만큼 소문난 마초 영화라 제쳐두더라도,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영화에서조차 강간당하는 여주인공은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수자의 욕망을 포착한 영화로 찬사를 받은 <오아시스>가 그러했고, 은폐된 국가폭력을 과감히 다뤘다는 <실미도>에서도 강간 장면이 나온다. 이에 비하면 주워온 여자니까 어떻게 해도 괜찮다는 <귀여워>의 묘사는 차라리 제목대로 '귀여운' 수준이다. 이번 달 초에 개봉한 <연애의 목적>에서도 강간 장면이 등장하고 있으니 '강간'은 제작된 시기와 감독의 성향과 상관없는 단골메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강간을 당하거나 성적 접촉을 당한 여성들이 결국에는 좋아하게 된다는 '강간신화'는 꾸준히 영화 속에서 재확인되는데 문제는 이게 마치 여성 욕망의 '전형'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다. 남자 주인공의 폭력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할 목적으로 '여자는 강간을 즐긴다'라는 식의 묘사가 횡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실제의 '여성'을 보기보다 남성 욕망의 '거울'만을 발견한다. 

여기서 남성의 욕망은 불행한 '역설'에 빠진다. 여자를 그토록 '밝히는' 남성들이 실제의 여성을 만나지 못한다는 '역설'! 얼핏 강간 신화는 남성 욕망의 일방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남성이 그토록 욕망했던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림으로써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도록 한다. 관계할 수 있는 상대방 성(性)의 부재 속에서 강간의 욕망은 결국 나르시시즘 내지는 동성애로 귀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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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의 목적>은 사랑을 소통의 문제로 다루는 드문 영화지만, 여성의 지위에 대해 특별한 성찰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 싸이더스
소통 혹은 기만적인 화해 : <연애의 목적>의 경우

<연애의 목적>은 문제가 많은 영화다. 강간을 당하고도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강간 신화'가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전의 남성 영화와는 달리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연애의 목적>은 유림(박해일 분)을 '멜로 왕자'로 묘사하기를 그만둔다. 강간당해도 좋아할 만큼 멋지게 포장된 왕자님을 내세워 '강간 신화'를 정당화하기보다 남성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멋있기는커녕 이기적이고 추잡하며 끈적끈적하게 '추근댄다'. 이 모습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홍(강혜정 분)이 유림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유림의 강간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강간과 스토킹에도 '불구하고'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하고 박력 있는 남성적 폭력성에 여성이 반하게 되는 다른 '강간 신화'와 달리 <연애의 목적>에서 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는 홍의 상처에 유림이 공감하면서부터다. 사랑은 강간이 아니라 '소통'인 것이다!

<연애의 목적>은 사랑을 소통의 가능성으로 다루는 몇 안 되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유림처럼 뻔뻔하기도 하다. 과연 어떤 여성이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이렇게 쉽게 용서한단 말인가? 가해자가 별다른 사과 없이 내미는 화해의 손길은 뻔뻔하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관계'가 기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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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클레머는 자신의 각본에 따라 에리카를 점령하기를 원했다
ⓒ MK 프로덕션
남성의 신화를 깨뜨리는 충격 요법 : <피아니스트>의 경우

<연애의 목적>이 여성이 놓인 불리한 사회 지위에 대한 별다른 성찰 없이 조금은 뻔뻔한 화해를 시도한다면, <피아니스트>의 경우는 남녀를 억지 화해시키는 대신에 차라리 관계를 붕괴시키더라도 소통의 문제를 더 치열하게 다룬다. 

에리카(아자벨 위페르 분), 그녀는 삼십대 중반의 성공하는 데 실패한 피아니스트이며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자신의 방을 두고도 밤에는 어머니와 한 침대에 잠든다. 학생들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해 조그만 실수에도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차갑게 대하는 선생님이지만, 집에서는 면도날로 상처를 내며 자위행위를 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포르노와 함께 정액이 묻은 티슈를 음미하기도 하며, 자동차 극장에서 관계를 즐기는 남녀를 훔쳐보는 걸 즐기는 특이한 인물이다.

마조히스트이자 대인기피증마저 있는 완벽주의자. 이런 에리카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답시고 소유물처럼 에리카를 닦달해왔다. 삼십 중반인 에리카에게 아직도 전화하고, 잔소리하고, 감시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봐야할까? 예쁜 새 옷을 사고 집에 늦게 들어온 에리카와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장면에서 우리는 에리카의 비뚤어진 성격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에리카와 함께 영화의 중요한 한축을 이루는 발터 클레머(브누아 마지멜 분)는 젊고 잘생긴 공대생이다. 에리카에게 한눈에 반해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그녀의 학생이 된다. 연애 대상인 다른 여성에게처럼 그는 그녀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남성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발터 클레머의 끈질긴 구애는 <연애의 목적>의 유림 못지않게 집요하다. 화장실까지 쫒아와 문틀을 뛰어넘는 그의 적극성은 결국 결실을 맺어, 에리카는 어머니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금남의 구역인 자신의 방에 그를 데려오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장 욕정에 취해 미쳐버릴 것 같은 그에게 제시된 것은 화답 대신 에리카의 편지 한 장이었다.

문제는 에리카가 발터 클레머의 연애 각본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에리카는 편지에서 클레머에게 자신의 각본을 알려준다. 그것은 어머니 대신에 클레머가 형벌의 집행자가 되는 것이다. 에리카는 채찍과 밧줄 같은 각종 고문기구를 클레머에게 보여주며 자신을 숨이 쉬기조차 어렵게 단단히 묶어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올라타고 앉아서 처절하게 학대해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강도 높은 고문과 강간을 주문하는 여성? 이건 '강간 신화'의 반복이 아닌가? 그러나 에리카의 마조히즘은 여성이 강간을 '즐기는' 기존의 '강간 신화'를 반복한다기보다는 그로부터의 폭력적인 '이탈'을 꿈꾼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기존 '강간 신화'의 마조히즘이 여성을 수동적인 상황에 계속 묶어둔다면 에리카의 자발적인 편지는 남성의 각본을 거부하는 여성의 '자율적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발터 클레머의 '남성적' 각본과 피억압자가 으레 욕망해야 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착한 사랑'이라는 각본 모두를 동시에 위반하며 편지는 그녀의 진의를 베일에 씌운다. 

<연애의 목적>에서도 편지의 역할을 하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홍을 배신한 옛사랑과의 통화 내용이 녹음된 카세트였다. '진정한' 사랑을 꿈꿨던 여성이 파렴치한 유부남에게 배반당해 얻은 상처가 그 테이프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유림이라는 캐릭터가 180도로 변신하게 됨을 목격하게 된다. 

처음에 유림의 관심이 쾌락을 위해 여성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관심에 가까웠다면, 이 테이프를 듣고 유림은 홍의 상처를, 그러니까 여성이 담화의 장에서 부당하게 밀려났던 슬픈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사실을 통해 자신 내부 남성의 각본을 반성하고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각본의 '수정'은 여성이 남성의 각본과 어느 정도 합의할 때만 가능한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에리카의 편지는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두 가지 각본을 모두 이탈하는 것이었으므로 클레머에게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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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에리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클레머는 끝까지 그녀를 외면한다.
ⓒ MK2 프로덕션
클레머는 에리카가 진지하게 쓴 '다른' 각본에 대해 멸시와 모멸로 일관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나한테 해"보라며 사랑을 위해 양보하는 에리카의 노력조차 클레머는 끝까지 외면하는 것이다. 클레머는 "당신에게는 고약한 냄새가 나"라고 말하며 자신을 찾아온 에리카를 차갑게 대하는가 하면 영화 종반부에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에리카의 편지대로 그녀를 정말 때리고 '강간'해버린다!

설마 에리카가 정말로 원했던 게 폭력과 강간이었을까? "네가 원한 거니까 나는 책임 없어"라고 말하는 클레머.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각본만이 정상이라는 남성의 신화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에리카의 편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변태'로 몰기보다는 이를 남성적 담화의 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수 없는 여성의 현실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편지가 말하는 것

에리카의 편지처럼, 여주인공들의 행동들은 왜 이해하기 힘든지 묻지 말자. 남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화 속에서 그와 '다른' 여성의 논리가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제시되는 건 차라리 당연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클레머의 경우에서처럼, 안 그래도 난해한 그녀의 편지들은 제대로 읽히는 것 같지도 않다. 

오늘도 많은 영화에서 남성 신화의 뒤편에 갇힌 여주인공들은 편지를 쓰고 있다. 남성의 담화 안에서 의미를 확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웃으며 여성의 편지는 고정된 '각본'들을 이탈할 것이다. 그러나 편지는 항상 엉뚱한 곳에 배달된다나? 슬프게도 그녀의 편지들은 항상 '뒤늦게' 발견되고 이해된다.

우리가 '강간 신화'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나 진짜 이성애를 꿈꾼다면, 지금이야말로 그녀들의 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가끔은 오해하고 실망하더라도 진짜 사랑은 '소통'을 꿈꾸는 것이므로.

덧붙이는 글 | 1. <피아니스트>의 분석은 2003년 <이프> 봄호에 실렸던 정희진의 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많이 갖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가장 알려진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나치 치하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다루는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이니 반드시 확인해야겠다.  

3. <연애의 목적>은 이어진 지난 기사에서 한번 다루었으니 자세한 내용소개를 피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