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강간이 되기 위해서는 섹스가 필요하고 섹스가 되기 위해서는 성적 흥분 내지 발기가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야한 옷을 입으면 성적흥분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야한 옷과 강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말은 순 과학의 교권, sein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규범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인과관계를 인정하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과학의 교권'이나 'sein의 영역'에서 쓰는 말이 아니라 '도덕철학의 교권'이나 'sollen의 영역'에서 쓰는 말입니다.  

규범학으로서의 법학을 배울 때 맨 처음에 입학하자 마자 sein과 sollen의 의미, 구별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배웁니다. sein과 sollen을 다루는 과목이 법학개론과 법철학이니 전체로는 두학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 sein과 sollen은 이덕하님께서 늘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과학의 교권,  도덕철학의 교권에 각각 해당합니다. 


유발한다는 단어에는  책임. 즉 규범적이고 sollen 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에서는 야한 옷은 강간을 유발한다고 할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덕하님 처럼 말하면 강간에 대해서  여자에게 책임을 묻는 뉘앙스가 내포돼서 말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을 이덕하님께서는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덕하님께서 "나는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규범학에서는 이런 경우에는 '유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조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강간범이 강간을 할 때,  그 강간범을 낳은 어머니도 강간의 조건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가 강간범이 될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강간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물론 강간범의 어머니 뿐만 아니라 그 강간범의 어머니의 부모도 강간의 조건이 되죠. 그 강간범의 어머니의 부모가 그 강간범의 어머니를 낳지 않았으면 강간범이 태어나지 않았고 그러면 그 강간범이 강간을 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가 없죠.

그래서 규범학에는 이 조건을 어느 정도에서 제한하느냐를 가지고 논의를 합니다.  그런 제한이 없으면 강간범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모두가 강간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규범적으로 현상을 정의할 수가 없어집니다.

이처럼 
 규범학에서는 조건이라는 단어와 유발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됩니다.  이덕하님도 '유발'이라는 단어를 쓰지 마시고 '조건'이라는 단어를 써보시길.  그러면 여성주의자들의 비난이 없어질 겁니다. 

“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라는 명제의 경우  "흡연은 폐암의 조건(중의 하나)이다" 라는 것에 비해 규범적인 요소가 엄청 강합니다. “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라는 명제의 경우 흡연하는 사람에게 흡연의 책임을 묻는 뉘앙스를 내포시켜 말해집니다.

말, 단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인문학이 원래 그렇고요. 단어나 명제에서 풍기는 그 미묘한 뉘앙스를 어떻게 과학으로 정의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분명히 있고, 감수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습니다. 규범학은 그것까지 다룹니다. 이덕하님께 규범학이나 법학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보시길 권합니다.

언중이 일상에서 말을 할 때는 거의 대부분 sollen의 차원에서 말을 합니다.  이덕하님의 주장에 대해서 언중 (아크로논객까지 포함한)들이 반발을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