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금지법은 몹시 위험한 법입니다 

국정원에서 호남 차별 댓글 쓰고 5.18에 북한군이 왔다는 글을 썼다고 해서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자고 하는데요 

차별금지법은 국보법 + 동성혼+ 다문화문제 + 재외국인 문제 + 지역차별이 얽혀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다양한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차별 금지법으로 아우르고 

그걸 하나의 법안으로 통과시키려는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분명 저 법의 취지 자체는 모두가 공감할수 있지만 

포함된 몇가지 부분으로 인해서 국론분열이 예상되며 

통과시킨 쪽이나 반대 한 쪽 모두 큰 상처를 입을수 밖에 없습니다 

야권은 국정원사태에서 얻어야 할건 차별금지법 통과가 아니라 지역 차별 금지법의 통과입니다 

이 당연한 결과를 가지고 차별금지법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로 싸우면 국정원 대선 개입이라는 엄중한 사태에서도 

아무 소득조차 못 올릴 겁니다 

상처만 입고 예전 국보법 사태랑 똑같은 결말을 낼 수 밖에 없는 거죠 

국보법 사태 링크입니다.

2004년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의 가르침

폰트크기조절

[기고] 아직도 '왕재산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

[이부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04년의 정국은 소용돌이로 시작해서 소용돌이로 끝났다. 그 소용돌이의 핵심은 국가보안법의 개폐 문제였다
. 그 과정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고 교훈을 얻는 일은 바로 내일 닥칠 과제다. 이 검토 작업은 또다시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이른바 '2013년 체제'를 순항토록 하는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필자의 책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에 실린 글을 좀 더 손질한 것이다. (필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연합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 정국을 파란에 몰아왔고 탄핵정국 속에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49석에서 152석으로 수직상승,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경이적인
승리를 거뒀다.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당의장은 총선에서 압승함으로써 한순간에 정국의 중심에 섰고
다음 대통령 선거의 확고부동한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정동영 당의장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사학법, 신문법, 과거사법 등 4대 개혁입법과 100대 과제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 열린우리당 150명 의원 중 과반수가 넘는 79명 의원들이 2004년 12월 20일부터 열흘간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요구하며 국회에서 '240시간 연속 의원총회'를 벌였다. ⓒ연합

 

#장면 1 : 탄핵정국을 17대 총선으로 돌파한 노무현 대통령은 152석으로 비대해진 여당 열린우리당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참견하고 견제할 것을 우려한 듯하다. 청와대는 '당정분리'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삼겠다고 자주 천명했

다. 대통령은 차기 대선 주자로, 그리고 경쟁자로 간주되었던 정동영, 김근태를 각각 통일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대선주자로서의 경력을 관리해주려는 배려라고 했다. 여당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던 두 사람이

빠지자 여당은 구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면 2 : 정동영에 이어 차석 상임중앙위원인 신기남이 당의장을 승계했으나 부친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낙마했고, 제3위 상임중앙위원인 필자(이부영)가 당의장을 승계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필자의 당의장 승계에

청와대는 흔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헌상 아무런 하자가 없는 승계를 '당정분리'를 강조하던 청와대가

막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장면 3 : 2004년 8월 하순 취임한 필자에게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반수를 차지한 집권여당이 과연 어떻게

의정을 주도해갈 것인지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현안이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내세웠던

'국가보안법 폐지'였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은 '국가보안법 수호'에 명운을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 한다"고 천명, 폐지 쪽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

여졌다.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강경한 친노 성향 의원들이 노대통령의 언급이 있자 국가보안법 폐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여 9월 초순에는 여당 안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장면 4 : 2004년 11월 초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민중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재야세력이 국회 앞에 대형 텐트

3개를 설치, 하루 평균 80명이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2월에 들어서 혹한 속에서도 최대 300명이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 앞 재야세력의 혹한 속 농성이 계속되자 의정사에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다. 유시민, 임종인 이광철

정청래 등 여당의원 10여 명이 의원총회장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의원총회장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같은 동료 의원들에게 "당을 떠나라"라고 고함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극한적 당내갈등에

대해 경험과 지혜를 쌓았다고 할 수 있는 다선 중진의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험악한 초선 농성의원들의

삿대질과 욕설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우려할만한 사태였다.

 

#장면 5 : 당의장으로서 필자는 농성의원들 가운데 중심인물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으로 여겨지던 유시민

의원을 면담했다.

 

이부영 : 우리당 의원들 가운데 50~60명가량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것을 아는가?

유시민 : 잘 안다.

이부영 : 그렇다면 한나라당 의원 121명과 그들을 합치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농성을 하지 말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의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떤가?

유시민 : 그들이 제 말을 듣겠는가?

이부영 : 그렇다면 폐지도 불가능하고 반대파 의원들과 대화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유시민 : 평행선을 가다가 서로 명분을 세우고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부영 : 그러면 언론 양심 사상 집회결사 등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찬양 고무 동조 회합 통신 등

독소조항을 걷어내서 국가보안법을 개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유시민 : 국회 밖에서 두 달 동안 이 강추위 속에 '폐지'를 외치는 저 재야에 등을 돌리느니

차라리 명분을 지키다가 끝내는 게 낫다.

 

대강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나의 메모에는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낡은 칼 박물관행'의 논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개혁세력의 집권이 계속될 테니까 국가보안법을 쓸 일도 없고 천천히 폐기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왕 당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놨으면, 폐지는 못하더라도

반민주 독소조항이나마 제거하는 소득을 거둔 뒤 "폐지는 못했어도 50%의 진전을 성취했다"고

국민들에게 보고하고 재야세력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한나라당이나 보수세력이

헌법보다도 상위법으로 간주하는 국가보안법을 여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나는 판단했다. 그 당시의 국정 운영하는 자세로 미뤄봐서

3년 뒤인 2007년 말에 다시 집권하리라고 장담할 근거도 없었다.

 

다행히 김원기 국회의장과 임채정, 문희상, 유인태, 정세균 의원 등 중진의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12월 20일경 당의장인 필자와 천정배 원내대표의

소집으로 모처에서 비밀회동을 갖고 여야4자회담(당대표·원내대표)을 갖기로 했다.

기본전략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한다고 계속 압박하면서 찬양·고무·동조·회합

·통신 등의 5대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개정안을 마지막 안으로 가지고 나가며

, 그와 연계하여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을 여당 안으로 가능한 한 관철한다는 것으로 정했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 간사 이강래 의원이 준비하도록 했다.

 

#장면 6 : 국회 본관 2층 귀빈식당에서 열린 이부영-박근혜-천정배-김덕룡 첫 4자회담은 박근혜, 천정배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필자와 김덕룡의 대화 협상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개진한 상태에서 박근혜 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전제하는 협상은 계속할 의미가 없다고 입을 열었다. 천정배 원내대표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전제하지 않는 협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혔다. 필자는 서로 입장을 충분히 알았으니 돌아가서 다시 당내 입장을 조율하자고 한 뒤 헤어졌다.

 

천정배-김덕룡 채널은 일상적으로 원내대표 회담에서 만나고 있었다. 정기국회 예산안과 다른 법률과 관련된 협상을 매일 이어갔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문제는 원내대표들만의 협상으로 풀릴 사안이 아니었다.

 

#장면 7 : 필자는 박근혜 대표에게 양자 비공개 회동을 갖자고 제안했다.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12월 25일 오후 약 두 시간 회동했다. 주로 내가 제안하고 설명했다.

 

결론은 가. 국가보안법을 여당단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나. 국가보안법의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부분은 개정한다. 다. 여야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합의시안은 한나라당의 최연희 법제사법위원장과 열린우리당의 법사위 간사 이강래 의원에게 준비하도록 한다. 라.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은 열린우리당의 제안을 중심으로 검토한다는 4개 조항에 합의했다.

 

박근혜 대표는 국가보안법을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한다는, 다시 말해서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다른 것은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장면 8 : 몇 차례 실랑이가 있을 뒤 12월 31일 그해 마지막 날 마지막 4자회담이 다시 열렸다. 4자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도 박근혜-천정배의 강경 자세가 되풀이되었다. 꽤 넓는 회담장 안에서 나는 박근혜 대표와 따로 한쪽 구석에서 절충하고, 김덕룡 원내대표는 천정배 원내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지난번 양자 비공개 대표회담에서 합의했던 대강의 내용대로 합의에 성공했다. 바로 양당의 의원총회 추인을 얻어 국회 본회의를 개의하여 합의처리하기로 했다.

 

#장면 9 : 열린우리당의 의원총회가 열렸다. 이미 여야합의안이 알려진 상태에서 그 동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농성해온 강경파 의원들은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흥분상태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의원총회 사회자인 천정배 원내대표는 당론에 따라 여야 4자회담이 열린 것이면 강경파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의원총회의 '추인'을 받아야 하는데 여야합의안을 다시 '자유토론'에 부쳤다. 난장판이 벌어지고 임종인 의원 같은 강경파 의원들은 협상을 주도한 당의장인 필자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면서 "배신자"라고 외쳤다.

 

대통령의 지지를 받는다고 간주되었던 강경파들의 기세에 중진의원들을 비롯한 다수의 협상 지지파들은 함구하고 있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그 소란 속에 원내대표직 사퇴를 밝히고 퇴장했다. 회의 사회자가 없어지자 회의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어렵게 만들어졌던 여야 4자 합의안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2004년 국가보안법 정국은 여당 의원총회의 난장판으로 끝났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당초 여야 4자회담이 열릴 동안에도 소극적이었고 협상에 부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다면 여야 4자회담을 거부하고 협상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협상을 성사시킬 의도를 가졌을 경우, 강경파 의원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당의장인 필자는 국가보안법 개정안, 즉 찬양·고무·동조·회합·통신 등 독소조항을 제거하는데도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보수파 의원들을 따로 만나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그들은 폐지하지 않는다면 개정안은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강경파 의원들은 마지막 농성 당시에는 6~7명으로 줄었지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입장이었다. 여야 합의가 이뤄졌을 때, 청와대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국회 일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론은 분명해졌다. 국가보안법은 일점일획도 고쳐지지 않고 '악법' 그대로 유지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국가보안법 개폐의 실패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고 끝났다.

 

1)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으로 분열 상태에 빠졌고 정국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2) 한나라당은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끊임없이 '친북좌파' '종북좌파'로 몰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계기를 잡았다.

3) 남북화해·협력정책이 동력을 잃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4)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되었으며 열린우리당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필자 자신도 당의장에서 물러났다. 마치 당의장이 협상을 주도해서 국가보안법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비방, 비난이 난무했다. 이부영-박근혜의 여야대표 주도로 국가보안법의 '민주적 개정'이 이뤄졌을 경우, 그 정치적 결과가 정치지형에 미칠 영향을 미리 차단해야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것을 필자는 몇 달이 지난 뒤 들었다. 필자는 곧 사정대상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만큼 세월이 흘렀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입장에서도 국가보안법의 반민주적인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개정안을 확보하고 주요 개혁입법을 주도하는 것은 정국주도권을 유지하면서도 국내의 언론, 사상, 양심, 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지평을 대폭 확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집권세력 입장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무리한 초강수를 채택하기보다는 개정안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했던 것이 바둑으로 치면 정석이었다. 국보법 개정안 합의처리는 민주개혁진보진영에게 '좌파 딱지 붙이기 소동'을 끝낼 호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극우파 등쌀에 분당되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악법' 그대로 온존된 폐해를 우리는 지금도 당장 목격하고 있다. 왕재산 사건 등이 그런 예였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대북강경정책에 부응하는 사회적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다시 국가보안법이 활용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몇 가지가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개혁입법과 100대 과제를 당론으로 내세웠을 만큼 개혁진보적인 정동영 의장이 왜 그렇게 많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론자들을 국회의원 후보자로 공천했는지, 유시민·임종인 의원 등 국가보안법 폐지주장 농성 의원들이 왜 열린우리당 안의 폐지반대론자들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천정배 원내대표는 국가보안법의 개정보다는 폐지를 지지하면서 왜 여야 4자대표 협상에 참여했는지, 그리고 왜 국보법 여야협상 합의안을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추인'이 아니고 '자유토론'에 부쳤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들은 당초부터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것으로 보지 않았고, 개정하느니보다는 유지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권이 계속될 것이므로 국가보안법을 쓸 일이 없을 것으로 낙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시의 자신들의 입장을 솔직히 밝히고 있는 사람은 아직 없다.

 

2004~5년 초의 국가보안법 개폐파동의 전말은 그 법의 폐기라는 '최고'만을 추구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다가 '최하'마저 놓쳐버린, 실패한 정치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모 아니면 도', 일도양단의 정치, 그런 파동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필자는 가지고 있다. 이른바 2013년 체제를 순항시키려면 국가보안법 의제에 대한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에게 가장 중요한 연합정치의 과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