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이덕하님 글 보고 반박 댓글 달려다가 qualia님이 본질적인 문제를 짚어 주셔서 그건 넘기기로 하구요,

이 글에서는 제가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문점들을 제기해보고자 합니다.

 

1. 가짜 보편성

-진화심리학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실험대상들의 행동양식/사고방식이 인간 보편적인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의 지도]라는 책이 보여주듯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동일한 실험을 할 때에도 다른 사고 패턴을 보입니다. 진화심리학이 실험을 통해서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이 상당히 약하다는 점은 고사하고라도, 특정 집단의 사고방식을 인간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 치환하기에 그 가설부터 결론까지 문제가 많습니다. 문화가 갖는 영향력을 무시한다는 건 너무나도 큰 맹점입니다.

 

2. 몰역사성

-위의 문제와 연결되는 논점입니다. 모든 제도와 문화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고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에' 특정한 행동패턴이 나타난다는 점만을 갖고 '그것이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건 솔직히 무리수입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현재랑 정반대의 행동패턴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몇백년 사이에 사고구조가 반대방향으로 진화를 했다고 볼 수도 없고, 인간의 문화나 생활방식이 바뀌는 데에는 유전자뿐만 아니라 정치세력의 특성, 사회의 경제구조 등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진화적인 요인을 얼마나 쳐 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3. 소설 쓰기

-제가 알기로 과학계에서는 프로이트나 라깡의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실험을 통한 결과의 재생산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데요, 제가 보기에 진화심리학은 더 못하면 못했지 정신분석학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라깡이야 자기가 잘 이해 못하는 수학이나 과학 개념을 함부로 써서 많이 까이고 있지만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하다는 점만을 보면 비슷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진화심리학도 '아주 그럴듯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똑같이 소설이라면 전 라깡이 진화심리학보다 낫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음 논점으로 넘어갑니다.

 

4. 현실 긍정

-가짜 보편성과 몰역사성이라는 특성의 결합은 현실 긍정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래에서 이덕하님은 'A가 B를 유발한다'와 'A가 B에 책임이 있다'는 건 두 가지 다른 명제라고 하셨는데 논리적으로만 보면 맞습니다. 그런데 혹시 푸코를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 속에서는 인과관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과학'의 미명 아래 포장해서 내놓는 것만으로도 책임관계를 함축하는 결과를 갖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사회의 움직임을 다루는 모든 학문에 '가치중립적'인 것 따위는 없어요. 모든 게 가치내재적입니다. '여자의 야한 옷이 강간을 유발한다'고 말하는 건 기본적으로 강간에 대한 생각이 '여자들, 너네 조금만 조심하면 강간 안 당할 수 있어'라는 남성중심적인 가치관이 은연중에 개입된 명제입니다. 야한 옷이 없었던 옛날에도 강간은 있어왔고 그건 기본적으로 여성이 사회 속에서 남성에 대해서 일정 정도는 폭력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지 여성의 행동이 조신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문화의 차이를 배제하고 역사적인 흐름을 무시하면 '현재의 주류'의 입장을 무의식중에 대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주류'가 '인류보편적'인 범주로 바로 치환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연과학이나 공학처럼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담지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을 통해서 그것은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자연의 진리 정도까지 승격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연구자 개개인이 갖는 문화적 편견들은 이미 가설 설정 단계부터 침투해 있거든요. 즉 연구의 프레임 자체를 문화적 편견에 맞게 짜니까 결과도 그런 쪽이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라깡을 진화심리학보다 긍정하는 이유는? 라깡은 그나마 약자와 타자에 대한 이론이 많습니다. 강자의 심리상태 이면에 놓인 불안감, 약자의 방어기제 등등 원용할 수 있는 측면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프레임을 뒤집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이나 여성학 등에서 라깡이 특히 많이 인용되는 것인데, 기존의 남성중심적 가치관이 개입된 연구를 다르게 재해석하고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5. 그렇다면 진화심리학의 효용은?

-분명히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사회적으로 갖는 효용도 있기는 할겁니다. 예컨대 많은 문화적 현상에 대해서 하나의 그럴듯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해주기는 하죠. 그렇지만 그건 과학계에서 그렇게 무시받는 라깡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깡의 이론도 많은 문화적 역사적 현상에 대해서 하나의 그럴듯한 인문학적 설명을 제공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사회적인 효용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위에서 썼듯이 오히려 보다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라깡이 사회적으로는 더 유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야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저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고 지극히 편향적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어떤 주장을 하던간에 순수자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주장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자기가 편향적이고 어디엔가 편견에 물들어 있으리라는 점은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오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