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옷이 성범죄(강간, 성추행, 성희롱 등)를 유발한다고 믿는 평범한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경찰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이명신 경상대 교수 등이 지난해 경남 3개 중소도시 경찰서와 파출소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경찰관 182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3.8%여성의 심한 노출이 성폭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의 심한 노출이 성폭행의 원인이다?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30617004106&subctg1=&subctg2=&OutUrl=daum

 

반면 대다수 여성주의자(feminist)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나는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가 꽤 그럴 듯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듯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만들어낼 수 있다.

 

1. 여자가 야한 옷을 입으면 남자가 성적으로 흥분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성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2. 남자는 야한 옷을 입은 여자를 상대적으로 헤픈 여자로 생각한다. 남자는 헤픈 여자는 상대적으로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3. 남자는 여자가 야한 옷을 입으면 즐기고 싶어요라는 신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가 이렇게 생각하면 성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화 심리학계에는 성녀(Madonna, 청순)/창녀(whore, 걸레) 이분법이라는 것이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결혼해서 잘 돌봐 주고 싶은(장기 짝짓기long-term mating) 성녀로 보거나 하룻밤을 즐기고 싶은(단기 짝짓기short-term mating) 창녀로 보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랑과 연결되고 후자는 욕정과 연결될 것이다. 성녀/창녀 이분법 가설과 야한 옷을 결합하면 위의 가설 2(헤픈 여자 가설)가 된다.

 

진화 심리학계에는 오류 관리 이론(error management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오류 관리 이론을 추파에 적용해 보자. “남자가 여자의 추파를 추파로 보지 못했을 때” 치르는 대가(성교 기회를 날릴 지도 모른다)가 “추파가 아닌 것을 추파로 잘못 해석했을 때” 치르는 대가(뻘쭘해진다)에 비해 훨씬 크다. 따라서 여자가 애매한 행동을 했을 때(미소, 약간의 스킨십, 야한 옷, 다정한 말투) 추파로 해석하는 쪽으로 오류를 범하기 쉽도록 남자가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가설과 야한 옷을 결합하면 위의 가설 3(“즐기고 싶어요”)이 된다.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와 “야한 옷을 입는 것과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서로 다른 가설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전자는 인과관계에 대한 가설인 반면 후자는 상관관계에 대한 가설이다. 그리고 상관관계에서 인과관계로 무턱대고 점프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일부 멍청한 학자들 빼고는 다 안다.

 

“야한 옷을 입는 것과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와 관련하여 그럴 듯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만들어낼 수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1.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하기 때문에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2. 야한 옷을 입는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에 비해 성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남자와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범죄 피해자가 되기 쉽다.

 

3. 야한 옷을 입는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에 비해 성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장소에 더 많은 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범죄 피해자가 되기 쉽다.

 

4. 야한 옷을 입는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에 비해 추파(또는 남자가 추파로 오해할 수 있는 행동)를 더 많이 던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범죄 피해자가 되기 쉽다.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와 “여자가 야한 옷을 입을 상황에서 성범죄를 당하면 여자 책임이다”나 “야한 옷을 입은 여자에게 성범죄를 범한 남자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는 과학의 교권의 명제이며 후자들은 도덕의 교권의 명제들이다.

 

“음주는 교통 사고를 유발한다”와 “음주 사고를 냈다면 술이 원인이니까 운전자가 아니라 술을 처벌해야 한다”는 서로 다른 명제다.

 

“문단속을 잘 안 하면 도둑맞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가 성립한다고 해서 “문단속을 잘 안 한 집에서 도둑질을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라는 명제를 설득력 있게 입증하거나 반증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가설이 꽤 그럴 듯하지만 입증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반증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주의자들이 이 가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MYTH: WOMEN LEAD MEN ON OR ASK FOR IT BY THEIR STYLE OF DRESS AND OR THEIR BEHAVIOUR.

FACT: This myth is perhaps the most misleading and devastating myth of all and tends to be a determining factor as to why so few perpetrators are found guilty. It expresses a belief that a woman does not have the right to SELF DETERMINATION: that she loses her fundamental human right to say NO to sexual contact by dressing or conducting herself in a manner which offends some people’s moral code.

What has formerly been deemed as a “socially acceptable”, “attractive” manner of dress, may suddenly be designated “provocative” clothing when worn by a sexual assault victim”. “Friendly” behaviour is construed as “leading men on” when it pertains to a “victim of sexual assault”. Going for a drink with a man is judged “perfectly acceptable” for most people nowadays but becomes an act of immorality” and the behaviour of ‘a woman who is asking for it’ if she is sexually assaulted. All sexual assaults are premeditated and research shows that perpetrators are looking for available, vulnerable targets, not women who dress or behave a particular way.

MYTHS AND FACTS

Kitchener-Waterloo Sexual Assault Support Centre

http://www.sascwr.org/files/www/resources_pdfs/sexual_assault/Myths_and_Facts.pdf

 

“All sexual assaults are premeditated(모든 성범죄는 미리 계획된 것이다)”는 황당해 보인다. “모든”과 “거의 모든” 또는 “대부분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즉석에서 남자가 강간하기로 결정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까?

 

어쨌든 미리 계획된 것이라고 해서 야한 옷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남자가 평소에 수녀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보다는 야한 옷을 입은 여자를 강간하기로 미리 계획할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erpetrators are looking for available, vulnerable targets, not women who dress or behave a particular way(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거나 행동하는 여자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available) 취약한 여자를 노린다)”를 보여준 연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남자가 대통령의 딸처럼 주변에서 마주칠 일도 없고 취약하지도 않는 대상보다는 거리를 떠도는 가출 여학생처럼 주변에서 볼 수 있고 취약한 여자를 노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자의 옷이나 행동이 강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일지도 모르나 두 가지 요인이 어떤 사건에 영향을 끼치는 일도 일어난다. 예컨대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기도 하고, 유전적 요인이 폐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Myth: Rape victims provoke the attack by wearing provocative clothing

Victims range in age from days old to those in their nineties, hardly provocative dressers.

MYTHS AND FACTS

UtahState University

Sexual Assault and Anti-violence information

http://www.usu.edu/saavi/docs/MYTHS%20AND%20FACTS.pdf

 

ID 'maru***'이라는 네티즌은 "할머니도 성폭행 당하는 세상에서 고작 미니스커트 탓하는 것은 범죄자의 자기합리화 밖에 안된다"고 했다. 네티즌 '사노**' "중요한 것은 성폭행 당하는 피해자가 미니스커트 입은 섹시녀만은 아니다" "이란은 여성들이 온몸을 꽁꽁 싸매고 다녀도 성폭행 사건이 많은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며 반문했다.

미니스커트가 성폭행 유발맞다” “아니다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43775&cloc=

 

물론 아주 어린 여자 아이나 할머니가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수녀처럼 옷을 입는 여자도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야한 옷을 입으면 그 날(또는 한 날 이내에, 또는 일 년 이내에, 또는 10 년 이내에) 반드시 성범죄를 당한다”도 아니고 “오직 야한 옷을 입는 여자만 성범죄를 당한다”도 아니다.

 

이것은 “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가 “담배를 피우면 그 날 반드시 폐암에 걸린다”도 아니고 “오직 담배를 피운 사람만 폐암에 걸린다”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Myth: Wearing sexy or provocative clothing makes rapists take action.

Fact: Rapists are fully responsible for their actions. Most convicted rapists admit they don’t remember what the victim was wearing. Furthermore, in interviews with convicted rapists, many say they mostly look at the shoes of the victim to determine the ability to run away or fight back.

Rape Victim Advocates

Sexual Violence Myths and Facts

http://lookingglasstheatre.org/trust/Rape_Myths.pdf

 

거의 모든 강간범이 피해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을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옷은 강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우선 위에 인용에 따르면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강간범은 옷에 대해 기억을 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또한 옷에 대한 기억을 물어볼 때 무엇을 물어보았는지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옷의 색이나 디자인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얼마나 노출하고 있었는지는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얼마나 집요하게 옷에 대해 물어봤는지도 따져야 한다. 엄청난 노력을 들이면 기억이 살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몽땅 다 기억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이 내가 보기에는 더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깊이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심리학자라면 웃어 넘길 황당한 가정이다.

 

최면 실험은 그런 가정이 성립하지 않을 때가 있음을 보여준다. 대충 이런 식의 실험이다.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최면에서 깨어나면 저기 있는 우산을 집어서 펴세요”라고 암시를 걸어 놓으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한다. 이 때 왜 난데 없이 우산을 집어서 폈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이런 저런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산이 고장 난 것처럼 보여서 확인하려고 했다”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 과정 중 상당 부분은 의식되지 않는다. 또한 상당 부분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계의 상식이다.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라는 가설은 잘 설계된 과학 실험이나 잘 정리된 통계를 통해서 검증할 문제다. 만약 아직까지 그런 연구가 없었다면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이유는 위의 인용문들을 볼 때 뻔해 보인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남들(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여성주의자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면 덮어 놓고 믿는 것 같다.

 

나는 대다수 여성주의자들을 보면 “뜨거운 가슴과 텅 빈 머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성 해방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엉터리 이론들을 보면 비웃음만 나온다는 이야기다. 미신적 사고가 아니라 냉철한 과학적 사고가 여성 해방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당신들도 그렇게 믿는다면 제발 과학 공부 좀 해라.

 

 

 

이것은 뽀나쓰.

 

인터넷을 뒤지다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발견했다.

 

몰카관련 성범죄자라면.. 상황이 다르겠지요.

http://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1787112

 

“야한 옷을 입으면 몰카에 찍힐 확률이 높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굳이 엄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허수아비만 때렸다고 생각하는 여성주의자가 있다면 허수아비가 아닌 여성주의자들의 논거를 제시하시라.

 

 

 

이덕하

2013-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