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역사적 고비 고비마다 형성된, 수많은 사회적 약속들에 의해 작동됩니다. 어떤 약속은 수천년전에 형성된 것도 있고, 아주 최근에 형성된 것도 있을겁니다. 2013년 오늘 의심할 바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생소하고 낯선 것이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0년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의 주인은 임금이라는 이상한 사회적 약속과 마주치겠죠.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 매우 굵직한 사회적 약속 몇 가지가 형성이 되었더랬습니다. 

1. 민주주의와 자유의 신성불가침성 확보
2. 권위에 의한 자의적 통치가 아니라 법률에 의한 통치
3. 검찰 경찰 군대 국정원등 공권력의 정치 개입 절대 금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 세가지가  지난 25년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중요한 사회적 약속들이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현행 6공화국 헌법이라는 것은 당시 국민들이 피로 얻어낸 사회적 약속들을 문서로써 정리한 것에 불과하죠.

그래서 저는 이번 국정원의 정치개입사건은 3은 당연하고 1과 2까지도 침해하는, 87년의 약속에 대한 중대한 도전 행위였다고 판단합니다. 만약 그 약속들이 무력화되버리면, 우리 사회는 명백히 87년 이전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각 정당이나 정파적 유불리에 의해 판단을 달리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번 국정원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찬성 여론이 78%에 이른다죠? 국민들은 살아있습니다) 

어떤 사회든 그 사회의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질 수는 있습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 자체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정치선진국들에서도 그런 권력형 스캔들은 수시로 벌어집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일탈이 처리되고 다시 정상화되는 과정이죠. 그런 자정 과정이 존재하면 선진국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후진국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국정원 사건이 처리되고 있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만약 국정원의 일탈이 응징을 당하지않고 정상으로 복구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87년의 약속은 무력화된 것이고, 헌법마저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이번 국정원 사건이 굉장히 심각하고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합니다. 국정원의 범죄적 일탈이 폭로되는 과정이 시스템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만약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국정원의 범죄는 조용히 묻혔을 것이고,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못했을 겁니다. 성공한 범죄는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범죄를 일으키게 되어 있거든요.

어떤 분들은 이번 국정원의 노골적인 정치개입 사건이 국민들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 싶겠지만, 그런 분들은 왠만하면 더 이상 정치에서 관심을 끊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국민들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정보기관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의 정권교체는 없습니다. 정권교체가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 자체도 없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사는 국민들의 삶이 결코 멀쩡할 리가 없습니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매의 눈으로 이번 국정원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봐야하는 것이 그래서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