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제가 소셜미디어를 연구하다보니 인터넷여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2000년부터 인터넷여론을 다루는 전문지에서 편집장으로 일해오기도 했었고요. "'홍어*'이라는 단어가 전라도와 전라도사람을 비하하는 용도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지역비하 지역차별의 의사를 가지고 한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라는 말을 아크로에서 제가 처음 했던 것으로 압니다. 많은 아크로 제현들께서 '만만한게 홍어*'이라는 용례를 떠올리시면서 '지역비하의 의도까지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셨지만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그런 용법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제가 검색해서 보여드리기도 했죠.
또 홍어와 홍어* 이야기가 나오니 아래의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지금 제가 출판을 앞두고 쓰고 있는 '소셜미디어 리터러시'라는 책의 일부입니다. 불통이신 분들, 특히 삿갓님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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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치원생들은 잘 풀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른이라도 잘 풀지 못하는 퀴즈가 있다. 실제, 일본의 게이오 초등학교 입학시험 문제 중 하나로 나왔다고 하는 아래의 문제를 일단 한 번 풀어보자.
네명의 어린이가 그림과 같이 격리되어 있고 네명의 어린이에게는 아래의 조건이 주어졌다.
1. 이 방안에는 총 네명의 아이가 있고 검은 모자를 쓴 아이 2명 흰 모자를 쓴 아이 2명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줬다.
2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어떤 색의 모자를 쓰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3. 아이들은 자기가 자신의 모자를 벗어서 색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A와 B,C,D사이에는 벽이 있어서 서로를 절대 볼수없다.
5. 그 어떤 아이도 뒤를 돌아볼수없다.
방 밖의 통솔자가 이 조건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자기가 쓰고있는 모자의 색을 알고있는 사람은 손을들고 소리를내서 대답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한 아이가 손을들 고 자신의 모자색을 맞췄다.
여기서 문제! A,B,C,D 중 자기의 모자색을 맞춘 아이는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를 곰곰히 풀어보십시오. 일본 유치원생들은 빠르면 10초만에도 문제를 푼다고 합니다 1분 안에 문제를 풀지 못하셨으면 그냥 넘어가고 아래의 글을 읽어나가 주십시오. )
외국 사람들은 유치원생, 초등학생들도 쉽게 맞추는 문제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 문제를 쉽게 맞추지 못한다. 정답은 이 글의 끝에서 설명한다.
이 문제는 '남들이 보는 나 자신' 즉 '메타 에고 (meta ego)'의 인식에 관한 문제다.
소셜미디어·SNS가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고 소셜미디어·SNS의 핵심 요소인 소통이 큰 화두가 되었다. 지난 19대총선,18대 대선기간 동안 국민과의 소통은 대통령은 물론이고 모든 정치인들의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소통이란 무엇이며 그 소통은 어디서 부터 시작될까?
소셜미디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 바로 미디어교육학이다. 미디어교육학은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가르친다. '리터러시'라는 단어는 글을 이해하고 쓸 줄 아는 능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소셜미디어를 대상으로 하면 '소셜미디어 리터러시'가 된다.
소셜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일반적인 내용을 당연히 포함하며, 추가적으로 소셜미디어에만 있는 특유의 리터러시 세가지를 더 포함한다. 그것들은 첫째, 네트워크 리터러시. 둘째, 어텐션 리터러시. 셋째, 노옴 리터러시 등이다.
네트워크 리터러시는 신뢰와 소통으로 관계를 맺는 능력에 대한 이해, 어텐션 리터러시는 사람들의 주목과 집중을 끌어내는 스토리텔링 방법에 대한 이해. 노옴 리터러시는 소셜미디어의 규범 질서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
그 중에서 네트워크 리터러시는 튜닝과 피딩, 신뢰와 상호호혜, 소셜 캐피털 등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튜닝은 동조(同調), 쉽게 말하자면 분위기를 파악해서 대화의 톤을 분위기에 맞추고 상대방과 나의 관심사를 일치 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분위기에 맞추고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추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메타 에고'를 인식하는 것이다.
튜닝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이 생각하기에 나의 언행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꾸준한 훈련, 생활 습관 등을 통해서 체득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메타 에고를 인식하고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것,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며 소셜미디어 활동의 시작이다.
메타 에고를 인식하고 못하는 것이 소통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유튜브에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라는 동영상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어떤 걸인 할아버지가 "나는 장님입니다. 도와주세요"라는 메세지를 보드지에 적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장님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적선도 없었다.
이 때 한 아가씨가 그 장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더니 적선을 하지 않고, 대신에 보드지의 메세지를 고쳐서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라는 메세지를 적어주고 갔다. 잠시 후, 장님 할아버지의 적선 함에는 사람들의 적선이 쏟아져서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장님 할아버지의 메세지와 아가씨의 메세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할아버지의 메세지는 바로 자기중심적인 메세지의 한계다. "내가 장님이다" 라고 자기중심적(egocentric)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리고 "도와달라"는 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메세지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설득당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설득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기실은 '유보'한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득행위는 소셜미디어 상에서는 특히나 경제성이 없는 행위다.
아가씨의 메세지는 "아름다운 날입니다"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들과는 다른 장님 할아버지의 사정을 말하여 공감하게 한다. "적선을 해달라"는 설득을 하지 않는다. 공감하면 적선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니 설득을 할 필요가 없다. 자기중심적인 메세지와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메세지의 차이는 이처럼 극적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퀴즈를 풀면, 정답은 C 어린이다. A,B,C,D 모두가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힌트다.
C의 입장에서는 자기 앞의 B가 흰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D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것은 D로서는 B와 C의 모자를 모두 보고 있는데도 말을 못하고 있으니 C는 B와 색깔이 다른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C가 알 수 있다. 결국 C 어린이가 정답을 말할 수 있게 된다.
C 어린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 알고서 대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메타 에고의 인식이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메타에고를 매순간 확인해서 상대방과 튜닝을 시도하는 것이 소셜미디어(리터러시)의 시작이고 소통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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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를 가지고 아크로 여러 분들이 님을 비판하는 것을 이해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만 소셜미디어 리터러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님은 분명히 불통이고 차별받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본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아이큐가 160인 제 동생도 이 문제를 5분 동안 못풀더군요. 6면체 색깔 맞추는 큐브퍼즐도 처음봤으면서도 설명서 없이 그냥 뚝딱 다 완성하는 애인데 못풀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 이 문제를 보여주고 교육생들에게 풀어보라고 하면 5분안에 푸는 사람이 100명에 한 두명 꼴로 풀더군요.
실제로 게이오초등학교에서 유치원생들을 상대로 이런 류의 아이큐 테스트같은 입학시험 문제를 내는 것 같습니다. 2006년도에 게이오초등학교 입학시험 문제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때 중앙일보에서 확인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기사에 소개된 문제에 비해서 이 문제가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던데 게이오초등학교에 이런 메타에고 인식에 관한 문제를 낸 적이 있냐고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를 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참고 기사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536013
저는 아이큐가 160은 안되지만, 1분도 안되서 풀었습니다. 왜냐하면. 게임이론에 (일반인들 보다는) 익숙하거든요. -_-;; 참고로 저는 미시전공은 아닙니다. 즉,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문화/교육적인 트레이닝이 중요한 것이지 아이큐가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 않거든요.
이와 아주 유사한 예가 Robert Aumann (2005년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의 옛날 논문중에 들어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예였는지 지금은 오래되서 까먹었습니다만 직관적인 논리 전개방식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일본 경제학계는(또는 일본 경제학자들)이 다른 경제학 분야는 크게 잘하는 분야가 없는데, 게임 이론이 유독이나 강합니다. 일본사람들중에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학 경제학자들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미시(게중에도 게임이론) 경제학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마도 학계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누군가가 오만의 논문에 있는 문제나 비슷한 문제를 소개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즉, 차칸노르님의 설명처럼 일본 아이들이 메타에고 인식 수준이 높다(?)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임이론에 유독이나 강할 수 밖에 없는 일본 전통/학문/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일본 사람들이 남들이 보는 자기 자신들에 대한 인식이 강합니다. 혼네와 타테마에 라는 문화도 그것 때문에 생겼겠죠.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그런 문화이기 때문에 이런 메타에고 인식 문제를 잘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 '체면'이라는 문화도 있기는 한데,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보니 저 사람은 저렇게 하고 있구나 나는 저들보다 나아야지, 못하지는 않아야지"라는 사고방식이라서 일본의 "남이 바라보는 나"와는 좀 거리가 있는, 자기중심적인 자존심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위의 문제는 "잠시 정적이 흐른 후"가 힌트인데, 저도 10초만에 맞췄습니다. B와 C가 같은 색깔의 모자를 썼다면 D는 금방 답을 할 수 있었겠죠.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아이는 D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원리를 이용한 거시정보경제학이라는 것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보니까 정보경제학이라는 것은 있는데 거시적으로 정보의 흐름과 단절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없는 것 같아서...
차칸노르님./
재미있는 구상을 하고 계시네요. 거시정보경제학이라.... 그동안 정보경제학(information economics)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발전해왔긴 했는데, 제 느낌상 거시경제학과 제대로 결합이 되지 못했죠. 게임이론에 나오는 몇몇 기본적인 내용은 거시경제학 영역에 종종 들어오면서 이게 크게 발전할 것처럼 생각이 되었으니 그 이상은 안착이 잘 안되더군요.
이유는 (여전히 제 생각이지만) 이 개별적인 information이 전체로 aggregation 되면서 없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부분균형에는 영향을 미치나 일반균형에는 영향을 못미치는 경우가 태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적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이것을 경제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즉, 시장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냐에 대한 마이크로 모델링)을 아직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차칸노르님께서 뭔가 새로운 길을 찾으시고 있는 것 같은데, 성과가 있으시면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
그런데 이 문제가 제대로 된 문제인가요?
C는 잠시 정적이 흐르자 “D가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전제하고 추론을 내립니다.
C의 추론 방식이 정당하다면 B가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다른 아이들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전제하고 추론하는 것이 정당하겠지요. 그런데 문제의 해답에 따르면 B의 그런 전제는 틀렸습니다.
마찬가지로 D도 그렇게 전제하고 추론하는 것이 정당하겠지요.
무한 회귀 비슷한 것이 될 것 같기도 한데요.
엄밀한 분석은 다른 분에게 맡깁니다. 저는 야한 옷에 대한 글을 세 시간 동안 써서 피곤합니다. 과연 제가 이것을 엄밀하게 분석할 실력이 되는지도 의문이고요.
차칸노르 /
아직 제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오마담 님의 해결책(또는 비슷한 해결책)이 아니면 문제가 있습니다.
“D가 B와 C의 모자색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모자 색깔을 알아맞추지 못한다는 정보가 C에게는 있습니다”가 성립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C가 자기 모자 색깔을 알아맞추지 못한다는 정보가 D에게는 있습니다”도 성립합니다.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내고 싶으면 일정 시간 후에 답을 아는 사람은 바로 손을 들라고 했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다음에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라는 식으로 한 텀을 주면 좀 나을것 같은데요.”
비행소년, 차칸노르 외 / 전 저것과 똑같은 (혹은 같은 패턴의 문제)를 예전에 몇 번 풀어본 적이 있는데 (시간을 재보진 않았지만 제 기억엔 적게 잡아도 1분 이상은 충분히 걸리고도 남았음), 저 문제는 그리 특이한 유형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논리퍼즐입니다.
메타에고보단 차라리 수학적 귀납법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직관적으로 잘 응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푸는 속도가 다를 겁니다.
흔하다면 흔한 유형의 논리퍼즐인 이상, 저 문제의 해답률이 문화권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주장은 일단 믿기 어렵습니다.
이건 신뢰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증거가 없다면, 출판하실 땐 그 주장은 빼놓길 강력히 권합니다.
저는 해답률이 문화권에 따라서 달라진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은 잘 모르겠고, 유치원생에게 저런 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배경은 일본 경제학계가 게임이론에(만) 강하다는 것과 상관관계가 높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고 봐 주시길.
오만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5년이고, 저 문제가 일본에서 나왔다는 것이 2006년도 입시(?)이다. 게임이론하는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고, 이 사람 과거 논문에 나왔던 내용들이 새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 (저도 이 오만의 논문은 오만이 노벨상 받으면서 알게 된 것이거든요.) 일본 학계가 유독 게임이론에만 강한 점. 이런 가벼운 추론이죠 뭐.
지금 처갓집에 놀러왔는데, (유치원생들인) 제 아들부터 시작해서 비슷한 연령의 댓명의 조카들을 앉혀 놓고서 실험을 해봤는데, 아무도 못 맞췄네요. 저걸 맞추는 일본 아해들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덜덜덜.
차칸노르, 비행소년, 오마담, minue622 /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원래 문제에 오류가 없는 것 같습니다.
minue622 님이 지적하셨듯이, D에게 C의 마음 속에 대한 어떤 정보를 가져다 준다고 해도 D는 자신의 모자 색을 알 수 없습니다. 반면 C는 D의 마음 속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서 자신의 모자 색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 마음 알아내기와 관련한 제가 댓글에서 제시했던 무한 회귀 비슷한 사례가 있을 것 같은데 이 문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덕하님/
아마도 이덕하님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그런 무한 회귀의 사례라는 것이 게임 이론 전반에서 나타나는 균형점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질문과 비슷할 것 같네요.
I know that (you know that {I know that[you know ......]}) 이런 식으로 계속 생각을 무한히 반복하게 되는 데, 어떻게 정답을 알 수 있겠느냐, 또는 (좀 더 학문적으로) 균형점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을 말씀하신 거지요?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무한 반복적인 생각의 fixed point가 존재해야지, 게임이론식의 argument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게임이라는 것이 내부 모순이 생깁니다.
내쉬의 그 두쪽짜리 논문이 이 fixed point의 존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 이 분야에 consistency를 줌으로써 게임이론이 만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것이구요.
지금의 이 경우는 이 생각의 흐름이 유한한 지점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의 게임은 덕하님이 의심하시는 것처럼 이런 식의 무한 회귀를 하게 됩니다.
비행 소년 님의 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문화/교육적인 트레이닝이 중요한 것이지 아이큐가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 않거든요'에 나도 무게를 둡니다.
저걸 풀지 못한다고 머리가 나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좀 돌려말하면 저런 류의 문제를 많이 접해보고 생각해본 사람은 쉽게 풀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모의고사에서 비슷한 패턴의 문제 많이 풀어보면 되는 것과도 유사하지요. 그런 사고를 해야 할 사회문화적 상황에 있지 않은 이들이 처음에 잘 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멍청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코미디. meta-ego나 intersubjectivity에 대해 길게 썰을 풀어볼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는 거 없음:) 그게 딱히 새로운 개념이거나 동양에 없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게임이론이나 이런 게 서구와 일본(이걸 근대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을까) 문화권에서 발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겠죠. 그냥 인디언들의 문제풀이 방식이 생각나네요.
돈을 많이 벌거나 대장 노릇하고 싶은 사람들은 게임이론 공부를 하거나 그 분야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아래는 그저 장황한 잡설.
주머니 네 개에 흰 공 아니면 검은 공을 하나씩 넣어놓았고 합하면 흰 공, 검은 공이 각각 두 개이다.
주머니 하나를 풀어 놓고서 다음에 나올 공 색깔을 맞출 수 있는가?
주머니 두개째를 풀어 놓고서 세 번재 주머니에 든 공 색깔을 맞출 수 있는가?
주머니 두개째에 나온 공들의 색깔이 같다면 세 번째 공 색깔을 누구나 맞출 수 있다.
두개째에 나온 공들의 색깔이 다르다면 주머니를 하나도 풀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누군가 답을 맞추었다면(물론 문제에서 맞추었다고 나왔으니까) 그건 당연히 첫 번째, 두 번째 주머니 공 색깔이 같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문제에서 B와 C의 모자 색이 같다면 D는 당연히 답을 알게 된다. 따라서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혹은 그런 문제를 낼 필요가 없다.
고로 이 문제에서 전제는 B와 C가 다른 색깔의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 사람의 모자 색 하나만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답을 내게 된다. C는 앞 사람과 같지 않은 색을 답하면 된다.
A와 B는 주머니가 하나도 열리지 않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
C는 주머니 두 개가 열린 상태에서 색이 같다는 걸 본 사람
D는 주머니 두 개가 열린 상태에서 색이 다르다는 걸 본 사람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시작하는 것이죠'라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D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이니 결국 문제 자체가 어차피 C 자리에 있는 사람, 바로 앞 사람의 모자색 정보만을 지닌 사람만이 답할 수 있을 폐쇄된 틀입니다. 비유하자면 C는 비파괴 검사 결과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클클.. 길게 썰 푸는 사이 미누에 님이랑 오마담 님이 축약해 놓으셨네.
혹시 이덕하님이 생각하는 것이 이런 상황 아닐까요?
문제의 상황과 똑같은데 모자는 흰 모자 셋, 검은 모자는 둘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B,C,D는 모두 흰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A는 당연히 검은 모자가 되겠죠?) 자기 모자의 색을 알 수 있는 것은 누굴까요? (저는 시간 끄는 걸 싫어해서 ^^) 이 경우에는 B입니다. 만일 B,C가 모두 검은 모자라면 D는 바로 자기 모자가 희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D가 대답을 안 하니 B,C는 둘다 검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B의 모자가 검다면 C는 바로 자기 모자가 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C가 끝내 대답을 안 하면 B는 'D도 C도 모두 대답을 안 하는 상황에서 내 모자는 흰 색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겁니다.
이 경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D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또 얼마나 시간이 더 흘러야 C가 알 수 없는 상황임이 드러날지가 좀 애매해지긴 합니다.
이것도 비슷한 계열의 퍼즐이긴 한데... 상황은 위 두가지보다 훨씬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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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섬마을에 100개의 가구가 살고 각 집에는 개 한마리씩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마을의 목장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사람들은 이것이 미친개의 짓이라는걸 알아냈다. 이제 이 미친개를 찾아서 죽여야 한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서로 간섭하는걸 싫어해서 "너희 집 개를 죽여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집 개가 미친개인지 아닌지는 구별하지만 자기집 개는 어떤지 모른다.
그래서 매일 낮 12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모여서 마을을 한바퀴 돌며 모든집의 개를 살핀다 (물론 이때 서로 말은 일체 안한다).
그리고 그날 밤9시 자기집 개가 미친개라고 판단되면 자기집 개를 쏴 죽인다. 하지만 이날 미친개가 다 죽지 않았다면 다음날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첫째날이 됐다........... 12시에 다같이 돌고.......9시에......아무일도 없었다.
둘째날이 됐다........... 12시에 다같이 돌고.......9시에......아무일도 없었다.
셋째날이 됐다........... 12시에 다같이 돌고.......9시에...... "탕"하는 총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셋째날에 총성은 몇번 울렸을까? 마을 전체에 미친개의 숫자는?
차칸노르님은 문제삼은 제 댓글에 제일먼저 위 내용과 같은 의미의 댓글을 다셨는데요
그 댓글에 대해 저는 반박을하지 않았습니다
제 댓글에 대한 비판의 핀트는 맞지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표현을 언급할때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좀더 신중해야한다는 말씀에는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말입니다
위 예시는 여러사람이 언급하였듯 4명이 모두 합리적인 사고를 할때 가능합니다
무슬림에대한 편견을 확대/재상산 하는것이 코란을 불태운 목사, 그 목사를 따르는 신도들이겠습니까 ?
아니면 빈 라덴, 라덴을 따르는 알카에다 이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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