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거리에서 천막 치고 농성하는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지나친 터에,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하지만 종종 나는 동장군이 온 하늘과 땅을 얼어 붙여 머리가 띵할 만큼 추운 날씨를 은근히 기대할 때가 있다.  그런 날마다 발동하는 기이한 식욕(食慾) 때문이다.  식욕이 향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 그건 냉면이다.  된바람 속에 움츠려들면 움츠려들수록, 한기에 손발이 오그라들면 오그라들수록 나는 날씨보다 더 차가운 냉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단 여기서 냉면이라 함은 갈빗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새콤달콤 국물에 고무줄 면발을 말아 내는 공장제 냉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텁텁한 듯 하면서도 혀에 착착 감기고, 좀 심심하다 싶지만 머금을수록 입 안에 묵직한 향이 감도는 진짜 평양 냉면을 말한다. 그리고 그 냉면 가락들은 10년쯤 전, 서울 각지의 식당들을 찾아 헤매던 시절 만났던 노인들의 성성한 백발과 드렁칡처럼 얽혀 있다.


내 기억의 실록에서 가장 혹독했던 겨울 시즌으로 기록된 2000년과 2001년 사이의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천 개의 침이 되어 온 살갗을 찔러대는 겨울 바람을 뚫고 서울 오류동의 한 냉면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월남에서 스키를 팔라고 하지, 근래 들어 유례가 없는 이 혹한에 냉면집을 촬영하자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뻗대었지만 방송은 내일인데 그나마 섭외된 곳이 이곳 뿐 이라는 데야 재간이 없었다.  작가는 미안한 듯 덧붙였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랍니다.”  원래고 뭐고 이 날씨에 냉면 먹으러 오는 손님이 몇이나 있을까.    


온몸이 동태처럼 빳빳하게 얼어붙어 찾아든 냉면집 마루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이 냉면집을 창업했던,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평안남도 출신의 고집쟁이 노인의 아내였다.  황소 바람이 윙윙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던 내게 할머니는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그쪽과는 걸쳐진 인연이 반 자락도 없건만 이상하게도 나는 조선 팔도 사투리 가운데 평안도 사투리가 가장 듣기에 편안하고 정겹다) 겨울 냉면의 맛을 전해 주셨다.  


“이 냉면은 말입니다.  삿자리를 뜨끈뜨근하게 해 놓고 그 위에 앉아서리 달달 떨면서 먹는 음식이야요.  그때가 제일 맛이 있디요.  이열치열이라 그래개지구서리 여름엔 더운 거 먹디 않아요? 겨울에 이가 시리게 메밀 면발 툭툭 끊어 먹구서리 뜨뜻한 육수 한 모금 마시면 대동강물이 꽁꽁 언대두 입 안은 살살 녹는다니까니.”  


화제는 ‘피양 박치기’로 유명한 서북 사람 아니랄까봐 우렁우렁한 목청과 벼락같은 호통으로 평생 자신의 기를 죽였던 남편으로 옮아갔다.  “쬐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문 아주 장비같이 호통을 쳐 댔디요.  육수 맛이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문 내다 버리기두 했어요.  지금 아들 녀석이 한다고는 하는데 길쎄요...... 아직은 그 맛이 안 나요”  느릿느릿 하지만 음절 하나 하나에 악센트가 똑똑 주어지는 평안도 사투리의 ‘니야기’(이야기)에 넋 놓고 빠져드는 참인데 주방 쪽에서 분위기를 뚝 끊는, 방송 용어로 “국어책 읽는 듯한”  서울 말씨가 들렸다.  “엄마 내가 꼭 낼게 그 맛 내가 꼭 내고 만다니까.” 아버지 대신 주방을 맡은 아들이었다.  


이런 어색한 대사는 편집 때 어김없이 잘려 나가게 마련이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살려 둘만큼 관대한 PD는 없다.  하지만 아들의 다짐은 방송을 탔다. 아들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던 할머니의 대답 덕분이었다

. “그래 00야. 꼭 내라. ......그 맛 네레 꼭 책임지고 내라.”

어느새 할머니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곱씹었다. 되뇌었다. “꼭 내라.  꼭 내야 된다.”  할머니에게 냉면은 요리가 아니었다. 갈 수 없는 고향이었고, 돌아간 남편이었다.  돌아오는 봄, 할머니는 금강산으로 갈 배편을 예약하고 계셨다.  “동서로 천리는 떨어딘 곳이지마는 니북땅은 니북땅이니께니”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고인이 된 남편의 사진 아래에서 육수 젓는 아들에게 네가 꼭 아버지의 맛을 내야 한다고 울먹이던 할머니는 고인이 되셨다.  그분뿐만이 아니다.  내가 단골로 삼았던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 할아버지도 끝내 꿈에도 잊지 못할 평양성 을밀대를 올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셨고, 수십 년 타향살이 동안 퍼머 한 번 하지 않고 독하게 살면서도 “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사람이 지금이라고 없는 줄 아느냐?”고 진하게 배어나는 평안도 억양으로 되묻던, 그래서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밥을 더 먹이려고 애쓰던 해장국집 할머니도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성성한 백발이 육수에 젖지 않을까 저어될 만큼 냉면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키던 냉면집의 오랜 단골들도 아마 반수 이상이 당신들이 그렇게도 즐기시던 냉면집을 찾지 못하실 것이다.  



새해는 2010년.  한국 전쟁이 환갑을 맞는 해다.  그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아무렇게나 타향 땅에 내팽겨져서 신산의 60년 세월을 보낸 노인들은 그렇게 하나 둘 혼백이 되어서야 그들의 태 묻힌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냉면 한 그릇에 고향을 띄우고, 그 맛을 내면서 옛 추억을 빚어내던 그들이 살아 생전 고향에 발을 디디지 못한 것은 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10년 전의 무시무시한 겨울에 만나 뵈었던 할머니의 얼굴에는 금강산 구경과 ‘니북 땅’ 밟기의 설렘이 한 그릇 그득한 냉면 육수처럼 찰랑거렸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뱃길은 다시 얼어붙었고 풀릴 날은 아득하며 그 이유를 두고서는 지난 60년 세월같은 핑퐁 게임이 지루하게 전개 중이다.   세상 없는 전쟁을 치르고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원수를 졌다고 한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편지 한 장, 자유로운 왕래 한 번 할 수 없었던 것은 과연 ‘이념의 벽’이 높아서일까, ‘미 제국주의’ 때문일까 ‘공산집단의 책동’ 때문일까.  다 떠나서 정말 멍청하고 속좁았던 우리 모두 때문일까.


언감생심 섣부른 통일은 바라지도 않고 “주석궁에 탱크”와 “기어이 우리 대에 통일” 따위의 주장에는 질릴 대로 질렸거니와, 그저 문이 좀 더 크게 열리고 벽이 눈에 띄게 낮아지기만을 애써 바랄 뿐이다.


꼭 통일되지 않더라도 비자 받아서 자유롭게 평양 가면 되는 거 아닌가.  그 비자에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찍히면 어떤가.  또 오익제를 위시해서 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조선 비자를 가지고 대한민국에 와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날이 하시라도 빨리 오기를 기도하는 바이지만, 또 언젠가 그럴 날은 느지막히라도 찾아들겠지만, 그때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고서 얼마나 반가우시냐며 판에 박힌 질문이나마 던질 수 있을까.  그 손들은 얼마나 남아 계실까.  한국전쟁 이후 60년. 하루가 다르게 그분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P.S.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어영부영 3년 남았습니다.  또 그 뒤에 누가 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버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