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이 영토선은 아니지 않나요? 정전협정 당시에 휴전선 위에다 군사분계선을 긋고 그 분계선의 남과 북에 각각 2km씩 비무장지대를 그린 후 그 나머지를 남과 북의 고유한 영토로 확정했죠. 근데 해상 분계선은 합의를 이루지 못해 걍 서해 5도는 유엔이 관할하고 그 나머지 섬들은 북한이 관할하는 것으로 그렇게 "영토 규정만" 한 후, 해상 분계선 자체는 긋지 않고 냅뒀다고 알거든요, 근데 정전협정 "이후에" 클라크 미육군대장이 서해 5도 각각의 영토를 기점으로 3해리 까지를 잇는 북방한계선을 "독자적으로" 그은 후 남한이 그 위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던 그 취지가 고착이 되면서 우리는 그걸 영토(+영해) 개념으로 받아들인 건데..

그 이후로 사실상 북한과는 수교가 단절이 되어서 그 문제가 크게 쟁점이 되지도 않았고(=73년에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열어 서해5도는 남한땅이나 그 섬 바깥의 물한방울도 남한 게 아니다고 한 적이 있었음) 그러다 87년의 민주화(=80년대 내내 야당, 재야세력 및 운동권이 주도했던 통일운동이 6.10항쟁을 거치면서 전국민의 간절한 염원으로 승화됐죠.)와 88년의 소련의 개혁개방(=이에 발맞춰 노태우 정권도 같은 해에 7.7선언을 통해 북방정책의 기조에 변화를 줬죠. 기존의 반공일변도 정책을 벗어나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적극적인 수교를 천명하고 대북관계에서도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해 대화와 화해의 무드를 표방하며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변화를 줬는데..) 그러다 89년 부터는 소련과 동구권이 줄줄이 동반몰락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은 군사 및 경제를 포괄하는 체제 전반에 대한 자신감에 고무된 채 90년 부터 수차례에 걸쳐 남북고위급 회담을 진행시켰고, 그 결과물로 나온게 91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와 협력에 관한)남북합의서였죠.

바로 이 91년 남북합의서에서 남북이 각각 주체가 되어 NLL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는데..이때도 북한의 입장은 정전협정에 근거해서 서해 5도는 남한의 영토인 게 맞는데 북방한계선은 인정한 적이 없고(=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북방한계선을 기점으로 남한의 영해를 인정하게 되면 북한 입장에서는 뭍에서 서해바다쪽으로 조금만 나와도 남한의 영해를 침범한 게 되죠. 그러니 서해를 지나가려면 무조건 북방한계선을 빙둘러서 다녀야만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라인이 북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당하게 느껴지는..) 그러니 이 문제는 입장 차이가 너무 심해 합의를 보류한 채 남북합의서에 조인을 했고, 그 경계선이 확정될 때 까지 합의를 계속해 나가되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하자는 취지만 재확인하는 것으로 넘겼는데..

그러다 90년 부터 회자되기 시작한 북핵문제가 원만하게 흘러갔던 남북 관계를 모두 틀어버리는 악재가 됐죠. 사실 북핵문제가 처음 회자된 이후에도 91년 남북합의서를 통해 남북이 비핵화선언과 함께 상호 핵사찰에 합의를 했고, 동시에 IAEA의 핵사찰을 받겠다고 북한이 확답을 하면서 핵문제가 남북관계에 크게 걸림이 안되는 상황이었는데 92년에 천조국의 대통령이던 아버지 부시가 핵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에는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게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압박해 오면서 모든 일이 다 꼬여버리게 됐죠. 급기야 남북이 시범적으로 핵사찰을 해보라는 훈수까지 두다가 열받은 북한이 남한을 특별사찰하겠다고 나오고, 우리는 팀스피릿 훈련의 재개를 결정하면서 간만에 좋았던 남북의 분위기가 완전히 망가졌는데..

그렇게 92년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93년 부터 YS정부의 공식일정이 시작되면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던 YS의 취임사에 발맞춰 다시 남북관계에 순풍이 불어오는 듯도 했죠. 북핵문제가 해결안되고 있었지만 문민정부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추진했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오히려 NPT탈퇴의 폭탄선언을 하면서 이게 계기가 되어 미국내의 강경파들이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도 재개되고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는데 94년 카터 대통령이 화해를 위한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기 전 까지는 정전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가장 고조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죠. 다행히 카터의 방북이 성공하면서 남북이 91년 합의서의 정신을 관철하자는 상호공감대를 형성했는데 카터 방북 직후 김일성이 죽으면서 남북합의서의 재발효는 무기한 연기됐고 헌데 바로 이시기에 남한에서는 오히려 대대적인 남침을 걱정하며 온나라에 비상이 걸렸죠. 당연히 북한은 너네 남북합의서 운운하더니 전쟁날까 걱정하네? 이러면서 단단히 삐졌고..

이후 북한과는 계속해서 소닭보듯 하는 안습한 관계로 지내다가 DJ정부에 들어서야 제 1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전향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죠.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제 2차남북정상회담으로 어쨌든 그 기조를 이어가려 했고..

근데 아시다 시피 DJ재임시절이었던 99년에 1차 연평해전이 있었고, DJ임기 말이자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02년 여름에 제2차 연평해전이 있었죠. 그리고 이 서해교전 모두 "남북의 화해 기조에도 불구하고" NLL에 대한 서로간의 상이한 이해 때문에 벌어졌던 사건들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도 대선 당시 부터 (특히 그때가 제 2차 연평해전 직후였기 때문에 더 강한 어조로) NLL의 경계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대국민 공약을 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서해 5도 주변 수역의 "공동어로화"였죠. 곧 NLL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공동어로구역을 획정하고 그 안에서 평화적으로 수역 이용을 하면 된다는 게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노무현의 대선공약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동안에 오늘 문제되고 있는 그 발언들이 튀어나오게 된 거죠. 뭐 외교적인 수사를 너무 품위없이 뱉어낸 탓에 마치 북한이 기존에 주장하던 NLL의 (남쪽으로의)전면적인 후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 처럼 들리긴 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죠. 북한의 기존입장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원래 대선공약으로 구상했던 서해 5도 위의 북방한계선을 기점으로 한 남북공동어로구역의 획정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에서도 (이미 다 알고 있었던)노무현의 그 구상에 대해서 별다른 이의제기도 없었던 것인데..

이게 갑툭튀 그 본내용은 다 실종이 되고 마치 모든 것을 다 내줄 것 처럼 들리는 그 노무현의 품위없는 외교적인 수사만이 부각된 채, 그래서 정말로 노무현이 북한이 기존에 주장하던 NLL의 전면적인 남쪽으로의 후퇴를 그대로 다 받아들인 것 처럼 호도가 되고 있네요. 전 알만한 사람들이 왜들 이렇게 낚이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한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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