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얼마 전 우연찮게 길벗님과 5.18 희생자 규모 추정문제로 얘길 나눈 뒤에 (링크) 미투라고라님 등의 댓글을 받고 며칠 뒤 (혹은 몇 주 뒤)까지 이 문제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알아보겠다고 약속드린 적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해자면 5.18 광주항쟁에서 사망한 시민의 수가 200명 내외라는 것이 <정설>이며 이는 비교적 믿을만하다란 제 당초 입장이 지금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흔히 군경측의 사망자를 제외하면 160~170명의 시민들이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것으로 말하는데 (군경측 사망자를 합계하면 200명가량), 이는 확정된 수치가 아니라 <거의 확실하게 확인된 시민측 사망자의 수>만을 산정한 것으로 실제 시민측 사망자의 추산에선 <최저하한선>으로 잡아야 할 수치입니다.
160~170명 가량을 5.18 광주항쟁으로 인해 사망한 시민들의 최저하한선으로 잡아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당시 사망자, 행방불명자, 상이후 사망자.
당시 사망자란 80년 5월 18일부터 27일이란 약 열흘 가량의 기간에 걸쳐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확인된 시민들을 말합니다. 행방불명자에 관해선 설명이 불요하겠고, 상이후 사망자란 그 열흘 가량의 기간에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뒤 28일 이후 사망에 이르게 된 피해자들입니다.
그럼 26일이나 27일 공수부대로부터 총격으로 부상을 당한 뒤 28일 이후 (이를테면 6월 초)에 사망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 당시 사망자에 산정이 안되죠. 그 사람들은 사망 시점이 18일부터 27일을 벗어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앞서 말한 160~170명의 시민측 사망자란 <당시 사망자>, 즉 그 사망시점이 18일부터 27일까지의 기간에 걸쳐있는 사람들입니다. 5.18 항쟁당시 군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망까지 이르렀더라도 이 기간을 벗어나 사망한 사람들은 160~170명의 사망자에 반영이 안되어 있는 거죠.
이 상이후 사망자의 존재가 160~170명이란 사망자 추산을 <최저하한선>으로 잡아야 할 첫번째 이유.
2. 행불자와 상이 후 사망자의 추산문제.
덕하님이 제 이전 글에 단 댓글에서 유가족 단체가 발표한 사망자와 행정부에서 발표한 사망자의 수가 크게 차이난다고 하셨는데, 이건 거의 전적으로 행불자와 상이후 사망자의 추산의 결과가 서로 다른데서 비롯합니다. '당시 사망자'의 추산에 관해선 그 수치가 서로 거의 일치해요. 하나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자면, 2005년 제 5차 보상 당시 광주시가 인정한 사망자는 166명에 달하며 행불자는 64명입니다. (출처 : <5.18, 그리고 역사, (최영태, 2008)>. 반면 5.18 기념재단을 포함한 5.18 관련 단체가 2005년 5월 공식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165명, 행불자가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가 376명이죠 (관련기사).
이처럼 광주 5.18 당시 사망 피해자의 산정치들이 조사기관에 따라 170명에서 500명에 이르기까지 서로 차이가 현저하게 생기는 이유는 바로 행불자 및 상이후 사망자의 추산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행정부야 그 조직의 속성상 그 수치를 (정권의 정치성향과는 별개로) 가능한한 보수적으로 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약 :
(ㄱ) 160~170명 사망자는 사망시점이 18일부터 27일에 걸친 '당시' 사망자이다.
(ㄴ) 행불자와 상이 후 사망자의 정확한 추산은 현 시점에서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 규모가 상당하다고 추측할만한 이유들이 있다.
(ㄷ) 고로 200명 내외라는 설은 사망피해자의 <최저하한선>을 말한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다음 글에서는 행불자와 상이 후 사망자의 실제 규모가 상당하며 따라서 유가족 단체의 주장인 500명설이 사태의 진실에 보다 더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할만한 이유, 즉 여러 자료 및 증언들에 관해 소개하겠습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80년대 떠돌았다는 사망자 2,000명설에 관해서도 좀 다뤄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 현재 사망자 2,000명 설이 과대평가된 수치일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이 설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좀 어려운 이유가 얼마간 있습니다. 전 원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의 각주에서 나온대로, 80년대 정보가 통제되었던 당시 사망자와 사상자의 개념이 사람들 간에 혼동을 빚어 생겨난 '과장' 및 '오해'였다고 알았는데, 좀 더 뒤져보니 그게 그렇게까지 아주 간단명쾌한 문제는 아니더군요.
[공수부대원 양심선언] "5.18때 민간인 사살 암매장"
규명위 관계자는 "당시 사체는 1차 암매장후, 마을주민에 의해 한번 더옮겨졌고 2~3일 뒤 가족들이 찾아와 최종 이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증언을 토대로 5ㆍ18묘역 등에 확인 결과, 현재까지 사망자는 5ㆍ18특별법에 의한 보상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신원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ref.) : 정치/사회 게시판 - 5.18 광주항쟁 시민측 사망자 추산문제 (1) - http://theacro.com/zbxe/free/848315
by minue622
그는 또한 “광주 학생 운동이 북파공작원에 의해 일어나거나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이고, 본인이 그 당시 현장에서 구호를 들어보니 김대중 지지 구호는 거의 없었다며 그 당시 가장 많이 불리우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것이었다면서 “광주 운동은 반공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군인사법 시행규칙
법 및 영에 따른 "전사자" 및 "순직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른 사람으로 한다.
1. 전사자
가. 적과의 교전(交戰) 또는 적의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
나.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
2. 순직자
제47조제1항제1호 또는 제2호에 따른 전상 또는 공상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서 제1호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
[전문개정 2012.5.1]군인사법상 "순직자'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됨.
출처(ref.) : 정치/사회 게시판 - 5.18 광주항쟁 시민측 사망자 추산문제 (1) - http://theacro.com/zbxe/free/848315
by minue622
다음은 5.18민중항쟁 희생자의 인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아직도 희생자에 대한 보상신청을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안오는데, 33년동안 집에 안오는데, 경찰조사관들은 단순 가출, 탈북으로 외면 하는등 웃음도 안나오는 일들이 많고, 경찰조사관들의 5.18민중항쟁 경험 및 인식부족의 결여와 5.18민중항쟁 보상신청 심사위원들의 5.18민중항쟁 인식부족이 문제가 됩니다.
5.18민중항쟁에 대한 참여도 않고 뒤에서 구경만하고 진실을 방관하고 이제와서 5.18민중항쟁 보상신청 심사위원이라는 문제는 한 번 재고 해야 합니다.
5.18민중항쟁 보상 신청 심사위원자격은 5.18민중항쟁 참여자 중 학식있고 덕망이 있는자로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18 민중항쟁은 국가보상이 아니라,국가배상이 맡습니다. 결국 5.18민주화유공자는 국가를 당사자로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5.18민중항쟁의 공소시효에 대한 문제와 국가배상에 대한 대상과 범외에 대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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