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엔 지난 며칠 허드렛일을 도와주던 가정집 화분의 흙을 현관문 위 길다란 옥상비스무리한 곳에 날라다 공중 화단을 만들고 무거운 이중 유리창을 날라다주는 작업을 하고 5만원을 벌었다. 일한 시간은 8시 20분 ~ 오후 1시. 점심 제공. 덤으로 햇반 열개들이 한 상자.

그 아줌마 여동생 집에 가서 새끈한 화장실 관통기를 빌렸다. 뚫어보리라 이틀을 땀 흘린 터였다. 광주광역시지만 그래도 조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변두리. 그 여동생 집 일을 한 일주일 해줬는데 요령 안 피우는 사람이라며 나를 언니 집에 소개시켜줬더랬다. 언니가 자기는 햇반 안 주고 나만 줬다며 투덜댄다 :)

후덥지근한 날, 발길을 돌려 빌려쓰는 좁다란 텃밭으로 갔다. 옥수수, 상추, 아욱, 쌈배추, 쑥갓, 부추, 토종 호박(꽃 피면 밤에 반딧불이 잡아다 집어넣고 구경하던 그 호박), 가지, 조롱박 그리고 하나가 빠졌군 토란! 가지며 조롱박, 부추는 오늘 심었다. 호박은 참 잘 자라네. 텃밭은 몇 년을 쓰지 않던 것이라 휴식을 잘 취했는지 토질도 좋고 영양분이 풍부해서 비료 한번 준 적이 없는데 잘들 자란다. 상추며 쌈배추, 쑥갓은 여러 번 뜯을 수 있는지라 잘 먹고 있다.  텃밭은 가로 90cm x 세로 4m 정도.  자투리 땅이지만 행복을 안겨준다. 갑자기 러시아 소설가 모모씨의 우화소설 생각이 난다. 아침에 말 타고 출발해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거쳐간 땅을 주겠다 했더니 결국 무리하다 죽고 마는 인간상. 그에게 돌아간 것은 한 평 남짓 무덤.

한 1-2만원이면 조그만 텃밭을 그득 채울 모종을 살 수 있다. 무언가를 키우며 커가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사람에게 행복을 안긴다. 왜냐면 거기엔 과정이 있는 탓이다. 경쟁과 결과가 아닌. 재미난 게 마음에 드는 채소에 물을 조금 더 주고 그러는데 학자들 말마따나 그 녀석들도 인간의 애정을 알아보는지 관심을 주는 녀석들이 빨리 큰다. 그 텃밭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이것저것 조금 심는데 내가 원체 양심에 털 난 녀석인지라 골고루 준다고 하지만 내가 심은 채소에 물을 한번이라도 더 주게 된다. 클클.

그리고 나물 채취 고수들, 주로 할매씨들이 이야기하듯이 나물이든 채소든 조금씩 티나지 않게 뜯어야지 그렇잖으면 씨가 마른다. 욕심이 과하면 욕심이 결국엔 자신까지 먹어치우는 법. 아귀가 따로 없지.

언제나처럼 호미를 들고 풀을 매고 조리로 물을 주고 나서 옆에 있는 닭장에 키우는 토종닭 세 마리 모이와 물을 주고서 혹시나 해서 텃밭에서 지렁이 몇 마리를 잡아 집어넣었더니 이놈들 먹성이 대단하다. 덩치가 작아 같이 동고동락하는 남의 집 육계들한테 시달리며 사는데 육계들이 입에 문 지렁이를 잡아채 먹어버린다. 채소와 닭을 키우며 니꺼내꺼 따지는 내 우스꽝스런 모습을 들여다보자니 김유정의 동백꽃 첫 머리가 생각 났다. "오늘도 우리 수탉이 쫓기었다...". 만세, 나는 본능에 충실한 인간!

두어시쯤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번역을 했다.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납기는 8시간 정도 남았다. 양이 많은 편인데 납기를 연장해달라고 할까? 화이자 임상시험계획서. 번역료는 얼추 50만원. 어라 일부 용어를 제외하고 중복된 부분이 적잖다. 봉 잡았구나. 얼추 4시간.끝났다. 미국 얼라들은 시스템에 충실해서인지 여튼 계약으로 돌아가는지라 납기 어기지 않고 품질에 큰 이상 없으면 결제는 확실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네 시간만에 평범한 막노동꾼 5일치 일당을 벌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처럼 분배의 정의, 노동의 가치, 합당한 보수에 생각이 이른다.

물론 번역일이라는 게 하루 십만원 꼴 벌이할 때도 있고 조금 무리하여 집중하고 일의 운이 맞으면 하루 50만원 정도 벌 때도 있다. 적극적으로 외국 번역회사에 영업을 나선다면 어쩌면 많이 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그런 소질은 별로고 또 그닥 내키지도 않는다(이건 그냥 실력이 처진다는 소리다). 중간중간 많이 쉬기는 했지만 번역일로 입에 풀칠을 한 지 10여년이 넘었으니 얼마간 쌓인, 내공 아닌 내공, 숙련도랄 것도 있으니 그걸 보수에 반영한다 해도 공사판 어지간한 일용직 노동자(이들 중에도 숙련된 이들은 많다. 그들은 맡은 일에 따라서 하루 12-17만원 정도. 물론 하루 20-30만원 가는 분야도 있다. 고되고 위험하긴 하나)하루 5배 벌이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나도 정당한 댓가는 좋아한다. 번역이란 게 공돈이 들어오거나 가치보다 더 많이 쳐주는 일은 별로 없는 동네니까. 극소수 예외는 빼놓고.

내가 잘 버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루 6시간 꼬박 집중(이건 실은 거짓말이고 한 번에 30분 정도 집중한다면 엄청나게 집중한 것)한다고 했을 때 평균 25만원 정도.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땐 한 달에 꼴랑 몇 번의 의뢰. 어쩔땐 조금 버겁게 들어오기도 하고. 그나마 외국에서 오는 번역료 월등한 의뢰가 한 달에 두 어건은 꼬박꼬박 들어와 그걸 비빌 언덕 삼아 막노동도 하고 가끔 조금 멀리 마실도 가고 채마밭도 가꾸고 전남 이곳저곳 오일장도 돌아다니고 그런다.
 
그래 막노동과 번역을 버무려 조정을 좀 하다보니 이젠 좀 틀이 잡히는가도 십다.

나는 수중에 백만원을 쥐고서 살아본 적이 없는 놈이다. 그래서 이번엔 월말에 항상 통장 잔고가 100만원이 남아있도록 살아볼까 생각 중이다. 매월 잔고 100만원도 자본은 자본이다. 그 자본의 달콤함에 좀 빠져볼까. 가정집 수리 기술 좀 배울 참으로 전동 장비며 절단기며 건축 장비도 좀 갖추고. 가정집 수리 그거 해보면 재밌다. 원래 남정네들이 그런 법이지만.

건축판 일이 좋다.
온갖 인간군상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인간의 오욕칠정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머리에 먹물만 들어서 세상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는, 몸보다 이성을 높이 치는 이원론이랄까 그런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세 번째. 요약하자면 그냥 인간사회,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니까. 음 그리고 꼭 이루어내야 하는 것은 막노동판에서 8시간 노동을 정착시키는 거. 인력대기소에서 나는 좀 별종으로 통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거나 좀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냐는 둥, 바보 아니냐는 둥. 그런데 나랑 몇 번 일해보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뒤통수 긁으며 좀 미안한 낯빛을 하더라. 그 이유는? 먹물이 몇 방울 튀긴 놈이라서 그럴까? 좋은 애비어미며 동네 사람들과 자란 탓일까?
나는 일을 맡긴 이들의 아랫사람이나 머슴으로 대우받지 않는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갑을 관계로 지독하게들 착취를 해댄다. 나는 그저 눈빛으로 때로는 지나가는 말로 그런 풍경을 허물어버리는 것 뿐이고.

도 닦는 게 별 게 아니다. 동안거/하안거가 아니라 和光同塵.
화광동진이라는 말에 니가 무슨 덕 높은 도인이냐 그런 소리들 마시라. 나는 그저 흩날리는 세상 먼지를 온갖 이웃과 같이 마시면서도 자기 몸이라도 추슬르는 깜냥이 되고 싶다는 말로 쓴 것이니까. 그게 내가 아는 평범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