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흐강님이 이런 발제를 하신 적이 있었죠. 이 글은 그 발제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 우리나라 서민들 임금은 120만원에 묶여 있는 걸까요?"
http://theacro.com/zbxe/802405

의사가 환자의 질병 하나를 진단하려 해도 수십가지의 온갖 검사는 물론 심지어 환자 가족들의 병력까지 모두 조사를 해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겁니다. 하물며 한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려면 장난이 아닌거죠. 아주 단편적이고 국지적인 현상 하나만을 논거로 그것을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한국 사회의 역사, 자본의 운동 법칙, 시장의 결정 과정등을 모두 종합해야 희미한 윤곽이나마 그려 볼 수가 있는거죠.

논지를 구성하는 조건들 혹은 논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한국만의 특수성
1. 1987년 노동자 대투쟁, IMF 등과 같은 특수한 경제적 사건
2. 국가자원을 독식하며 성장한 독점재벌들을 경제성장의 첨병으로 삼는 전략
3.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사회적 조건
4. 1997년까지의 장기적인 자본주의적 발전과 고도경제성장
5. 내수보다 대량생산 공산품 수출 위주의 경제발전 전략
6. 한국 특유의 봉건적이고 온정적인 노사문화
7. 정규직 고용만을 인정하는 박정희의 노동법
8. 기술을 천시하고 암기에 의한 문제풀이 능력과 학연 지연등의 인맥관리를 더 우대하는 문화


B. 이론적 논거
1.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경기변동성 (공황, 불황)
2. 경기하강기에 대량의 실업자를 발생시켜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3. 모든 노동을 단순화 세분화하고 기계에 의존시켜 "아무나 할 수 있는 노동" 으로 변화시키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특성
4. 장기적 이윤율 저하 경향에 의해 투자감소와 일자리정체 성장둔화 현상



한국은 1987년 이전까지 국가적 지원을 받는 기업들이 기술이나 설비투자에 의한 이윤보다는 정치권이나 공무원과의 결탁에 의한 이권배분,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에 대한 정부의 과잉현금보상, 부동산투기 차액등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기면서 안주하던 나라였습니다. 점증하는 노동자들의 분배요구는 경찰 지원을 받아 진압하면 되었고, 따라서 땅집고 헤엄치는 식의 매우 편한 기업활동이었죠. 일부 삼성에서 반도체산업에, 현대에서 자동차제조업에 진출하였지만 아직은 구색을 갖추는 수준 이상을 넘지는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우리 사회가 극적으로 민주화가 되고, 이어서 벌어진 전국적인 규모의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기업들은 급격한 임금인상 요구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죠. 또한 민주화된 여파로 정경유착에 의한 이권배분까지 여의치 못하자 기업들은 이전의 방식으로는 존폐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고, 그러자 사활을 걸고 공격적인 경영과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대기업들에 유행처럼 번져나간 삼성의 신경영, 대우의 세계경영 등등이 바로 그것이죠. 노동생산성은 급격히 늘어나고 민주노조등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노동자들의 임금도 빠른 속도로 올랐습니다.

그 결과 87년 ~ 97년에 이르는 단군 이후 최대의 성장기와 호황을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일산 분당등 신도시들의 막대한 토지보상금, 김영삼 정부의 막대한 농촌지원금 등이 더해져 활활 타 올랐죠. 당시 강아지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고, 백화점은 발 디딜 틈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영업이든 뭐든 아무나 창업을 하면 미친듯이 돈을 벌던 시절이었고, 치솟는 집값에 주택소유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으며, 노동자들도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임금인상률에 큰 불만은 없었던게 사실이구요. 호남에 남아 있던 사람들 빼고는 모두가 행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이 되는 맹아가 착실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온정적인 노사문화로 인해 단순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고급기술을 갖춘 노동자들과 큰 구별없이 고임금을 받는게 가능했고, 단순서비스직 판매직 사무직 일자리도 호황기를 맞아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착실하게 스킬을 연마하고 지식을 쌓던 사람들보다 학연과 지연을 통해 적당히 빈둥거리는 일자리를 꽤찬 사람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그리고 삼성의 자동차진출, 현대의 반도체 진출등과 함께 기업들의 경쟁적인 업종 진출로 낭비적인 투자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그 모든게 1997년 IMF 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립니다. 바로 공황이죠.

아무런 준비없이 맞은 갑작스러운 공황에 한국은 일대 혼란에 빠져듭니다. 기업들은 더 이상 해고의 불인정과 정규직 고용만을 허락하는 박정희 노동법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노동법 개정을 통한 유연화를 요구하고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꺼내듭니다. 그들 역시 안 그러면 더 이상 이윤을 유지할 수 없고 따라서 망할테니까요.

또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그 결과 실업자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자신들이 고용하고 있는 단순직 고임금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을 경쟁시키기 시작합니다. 생존의 기로에 선 실업자들은 비정규직이든 최저임금이든 모든 조건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구요. 저항하는 단순직 고임금 일자리가 깨끗하게 청소를 당하는건 불문가지였고, 이때부터 "단순직 = 저임금 비정규직" 이라는 임금시장의 새로운 규칙이 생성되기 시작하죠.

다행히 IT산업 육성과 적극적인 소비 진작등 김대중정부의 노력으로 공황 국면은 서서히 진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수십년간 성장가도를 달려왔던 한국경제는 이제 저성장의 당연한 현실에 적응을 해야만 했습니다. 기업들은 결코 "단순직 = 저임금 비정규직" 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절대 사수하고 싶어했죠. 

나아가 기업 생산에 필수적인 인력만을 정규직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일자리는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설사 호황국면이 다시 조성되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져도 가능한 단순한 업무로 구성하여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으로 해결을 하였죠. IMF 라는 전대미문의 대공황을 겪고 기억하고 있는 기업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여전히 존재하는 광범위한 미숙련 실업자들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자 절대 조건이었구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시기입니다.

그리고 2008년에 경제위기를 다시 겪게 되죠. 미국과 유럽등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 한국의 기업들은 큰 타격없이 지나갑니다. 바로 복지 부재와 비정규직 고용의 힘이었죠. 이쯤 되면 기업들이 비정규직 고용을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겁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서서히 '아무리 둘러봐도 120만원 일자리 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 촉발된 정치권의 대규모 복지 논쟁은 그런 배경 아래 분출된 것이죠.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던 이유도 바로 그러하구요.

이상이 흐강님이 궁금해하시던 2013년 한국에서 서민들의 임금이 120만원으로 고정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기업들의 지불여력은 매우 부차적인 이유라는 것이죠. 불경기에 지불여력이 모자라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설사 아무리 그들이 지불여력을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단순직 일자리에 120만원 이상을 지출할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1. 스마트폰처럼 기존 핸드폰시장을 대체할 뿐인 무늬만 신종산업 말고, 기존에 없던 전혀 새로운 시장이 열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대규모 투자가 다시 가능하고, 그 결과 90년대의 엄청난 호황이 재현되어 일자리 공급이 수요보다 훨씬 더 많아지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일단은 반전의 계기를 잡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2. 복지와 사회안정망의 확충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실업자들의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되어야 120만원 일자리에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고 자기 능력과 정석에 맞는 일자리를 고르게 되고 그래야만 비정규직들의 고용조건과 임금도 개선될수 있습니다.

3. 내수시장이 확대되고 소비자들의 선호가 소품종 다양화되어서, 고급스킬이 필요한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4. 경제민주화등으로 재벌대기업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게 가능해져야 합니다. 현금만 쌓아놓고 투자하지 않는 돈은 어떻게든 국민 일반에게 배분되어야만 합니다.

일단 제 수준에서 떠오르는건 이게 전부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