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우리가 어디 있는지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빚어낸다
애덤 올터
2013년 6월 14일 인터내서녈 헤럴드 트리뷴
1970년대 초, 한 연구 팀이 미국 동부 해안 일대의 대학 기숙사 근처에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를 수백 통 뿌려 놓고 얼마나 많은 편지들이 우체통으로 가는지 기록했다. 연구자들은 배달된 편지를 작은 자선 행위로 간주하였는데, 어떤 기숙사들이 다른 기숙사들보다 좀 더 관대함을 발견하였다.
덜 붐비는 - 층마다 비교적 적은 학생들이 사는 - 기숙사 근처에 떨어진 편지들은 거의 전부 수취인에게 도달하였다. 반면 붐비는 기숙사 근처에 떨어진 편지들은 10 통중 6 통만 여정을 마쳤다.
명백히,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뭉쳐진 고밀도 주거의 학생들은 대학 동료들에게 덜 연계되어 있다고 느꼈고, 이것이 그들의 관대함을 약화시켰다.
나중에 연구자들이 일단의 다른 학생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런 편지를 접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 거라고 상상하는지 질문하자, 어디 사는지와 무관하게 95%의 학생들이 자신이라면 우체통에 넣었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자기평가 연구들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친절하고, 우호적이고, 거기에 더하여 정직하기도 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들이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영속적 속성의 집합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환경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를 본능적이고 비의도적으로 바꾸는 카멜레온에 더 가깝다.
2000년에 행해진 다른 실험을 검토해 보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 시의 계약자들이 시 일대의 현저한 장소들에 일련의 청색 등을 설치하였다. 이 등불은 시의 보기 흉한 지역들이 좀 더 낫게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는데, 몇 달후 시의 범죄 통계를 내는 사람들은 파란 빛으로 물들어진 지역들에게 범죄율이 하강한 놀라운 경향을 목도하였다.
순찰차 위의 경광등을 흉내낸 등불들은 경찰이 순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 했다. 2005년 일본 나라 현의 경찰이 우범 지역에 파란 등을 설치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전반적 범죄율이 떨어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이 방법을 시도하였을 때, 그들은 파란 등불 아래서 쓰레기와 자살 기도 역시 감소함을 발견하였다.
왜 파란 등불이 범죄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론들이 생겼다. 아마도 그것들의 밝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백열광이 그늘진 바닥을 보다 더 열리고 노출된 것으로 느끼게 만들든가, 혹은 정반대로 그것들이 신비롭게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지든가. 여하튼 아주 작은 조치조차도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은 그들이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소에서 더 정직하게 행동한다. 북동 잉글랜드 뉴캐슬 대학의 심리학자들은 대학 노동자들이 작은 식당에서 꽃대신 한 쌍의 눈이 그려져 있는 가격표 바로 아래의 자율 지불함에 차와 커피 값을 훨씬 더 잘 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연구가 영국의 서 미들랜드 지방의 경찰로 하여금 시내 일원에 한 쌍의 눈이 그려진 대형 포스트를 설치하도록 촉발하였는데, 단편적인 보고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 범죄가 줄어 들었다.
거울도 동일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보다 더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응시하도록 강요하기때문이다.
다른 환경적 단서들이 우리가 나쁘게 행동하도록 미묘하게 허가함으로써 우리 행동을 빚어낸다. 심도있게 토론된 "깨진 유리창 이론"에 의하면, 다른 상황에서라면 착하게 행동할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이 있는 주변에서는 보다 더 범죄를 짓기 쉬운데, 그 깨진 유리창은 그 지역 주민들이 그들 재산을 유지 보수하기 위하여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시사하기때문이다.
그 이론의 저자인 제임스 Q. 윌슨과 조지 L. 켈링은 <월간 대서양>에 실린 1982년 논문에서, 만일 한 건물의 깨진 유리창이 수리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건물의 다른 유리창까지 더 깨뜨릴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큰 반달리즘을 고무할 것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 이론이 도로변의 쓰레기통에도 적용된다. 쓰레기통이 많을수록 쓰레기가 더 많이 쌓인다. 종국에는 사람들이 포장판매 식당에서 들고 나온 쓰레기의 봉투를 버리기 시작하고, 이것은 곧 방치된 지역에서 더 많은 범죄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윌슨과 켈링이 그들의 이론을 제안한 1982년 이래, 이 쓰레기통 예는 많은 실험적 지지를 받았다. 한 연구에서 사회 심리학자들이 한 대형 병원 주차장에서 139대의 자동차에 전단지를 놓아 두고서 차 소유주가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 관찰하였다.
이번에도 환경이 반응을 빚어내는 듯이 보였다. 운전자가 병원에서 나와 주차장이 전단지, 사탕 껍질과 커피 컵들(물론 연구자들에 의하여 설치된 것)로 어질러져 있음을 발견하였을 때, 거의 절반 정도가 자기 차에서 전단지를 떼어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반면, 연구자들이 운전자가 돌아오기 전에 주차장을 청소하였을 때는 오직 10명중 1명만이 전단지를 버렸다.
알지 못하는 채, 운전자들은 그 지역의 주도적 규범이라고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으로 적응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하는가에 관한 심원하고 아마도 혼란시키는 무언가를 말해준다. "너"나 "나"의 유일한 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에 닻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부대상황적 단서들이 때때로 우리를 이러한 닻으로부터 너무 멀리 끌어내므로,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가, 혹은 적어도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쉽겠는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착한 사람은 좋게 행동하고 모진 사람은 나쁘게 행동한다는, 우리 각자의 본질적인 판본이 존재한다고 믿음은 마음을 안도하게 만드는 일이고, 그런 경향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점증하는 증거들이 우리가 누구인가 - 예를 들자면 쓰레기충인지 착한 시민인지 - 는 우리가 하필 어디 있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짐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환경적 단서들이 우리가 시내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만큼이나 빠르게 우리를 규정짓고 재규정짓는다.
뉴욕 대학 스턴 경영 대학원 마케팅학 조교수 애덤 올터
http://www.nytimes.com/2013/06/16/opinion/sunday/a-self-defined-by-place.html?_r=0
(私譯임.)
노자는 "人法地"라는 세 글자로 위 이론을 2500년전에 이미 갈파하였음.
그래서 긴 글을 씀이란 사실 饒說일 뿐임.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함이 아니라, 그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가 될 터.
그러나 위와 같은 주석이니 해설이니 하는 논평은 인간 사고의 심화, 그에 대한 심층적 분석, 그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통찰로의 도약, 등등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근거없는 막연한 선문답류의 가짜 깨달음에 빠지게 합니다. 흔히 한국 불교계에서 양자역학의 과학적 사실이 불교철학의 통찰과 통한다고 주장하듯이, 속 빈 강정일 뿐입니다.
노자는 "人法地"라는 세 글자로 위 이론을 2500년전에 이미 갈파하였음.
그래서 긴 글을 씀이란 사실 饒說일 뿐임.
위에 인용한 질문 님의 촌평처럼 노장사상 따위 동양철학의 허점은 좋게 말해서 총론만 있지 각론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루뭉실한, 뜬구름 잡는, 코걸이/귀걸이처럼 어느쪽으로 갖다붙여도 말이 되는, 아주 심오한 말씀들의 향연일 뿐이란 것입니다. 치밀한 분석, 사고의 극한까지 몰고가는 정밀한 논증과 논증의 연쇄, 검증에 준하는 현실 적용과 응용, 등등 이런 실질적 측면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기발한 착상과 상상력,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탐구력, 그 모든 연구 과정을 견딜 수 있는 끈질김과 지구력을 발휘해 저렇게 인간 심리/심성의 한 비밀을 어렵사리 밝혀놓으면, 주구장창 음풍농월에 염불이나 선문답만 외던 도인/스님들 혹은 그 아류들이 이미 수천년 전에 저렇게 갈파했노라, 설파했노라 하면서 “人法地” 어쩌구 뒷북치는 것이란 얘깁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뒷북은 뒷북에 불과할 뿐입니다. 일종의 사후 숟가락 얹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양철학자, 서양과학자들이 동양철학/불교철학/노장사상에 주목하는 것은 완전히 그들의 방법론과 그들 독자의 감식안을 통해서란 것입니다. 당사자인 우리처럼 막연하게 뜬구름 잡는 식으로 불교철학의 무엇무엇과 양자역학의 무엇무엇이 통하므로 이미 수천년 전에 동양의 철인들은 현대과학의 핵심 이론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게 전혀 아니란 것입니다. 서양학자들이 동양철학/불교철학/노장사상의 웅숭깊음과 원형적 통찰의 다성적/중층적 울림에 주목해 그것을 재해석하고 현대과학/철학의 구체적 사례들과 접목하는 것은, 수천년 동안 우리 동양인들이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방식을 통해서란 것이고, 그렇게 재해석되고 재발견된 내용들 또한 우리 동양인들이 수천년 동안 답습해온 고리타분한 내용들과는 질적으로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동양철학/불교철학/노장사상 따위에서 얻어낸 새로운 인식으로 그들 자신의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에까지도 응용 · 적용하고 더욱더 서양적 전통의 강점을 강화해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동양이 서양의 분석 · 논증 · 검증 · 응용의 전통을 수용하지 않고/못하고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노장 사상, 불교적 세계관, 유교적 도덕률 따위 등등의 전통으로만 역사를 이어왔다면, 동양은 지금도 21세기의 첨단 과학기술을 전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서양과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첩된 중동은 예외일 수도 있지만). 10~20나노급의 초미세 물질 구조까지 가공할 수 있는 현시점의 인간의 과학적 능력은 음풍농월/염불/선문답/공안 따위 실체 없는 헛공론의 전통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서양과 교류가 완전 차단된 가상의 역사 혹은 대체 역사를 가정한다면, 동양은 21세기에도 중세를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질문 님, 위 번역글은 어느 분이 번역한 것인가요?
제가 판단하기에 그런대로 잘된 번역 같습니다.
물론 몇 군데는 더 정확하고 매끄럽게 고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번역글 출처는 따로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질문 님이 번역하지 않았나 추정합니다만...
삭제된 질문 님의 답변:
qualia/ 私譯 맞습니다. 아직 潤文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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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님, 그렇군요.
덕분에 유익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 물론 위 번역글 내용은 일찌감치 잘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이긴 하죠. 그러나 질문 님 덕에 다시 한번 관련 주제를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소개해주신 위 사회심리학적 실험 내용은
① 인지는 뇌+몸의 작용에 기본적으로 기반/의존하고 있지만
② 뇌와 몸은 환경 속에 내재되어 있고(embedded, situated, 둘러싸여 있고)
③ 따라서 뇌와 몸의 입력과 출력은 뇌와 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④ 따라서 인지는 뇌-몸-환경이 긴밀히 상호결합하고 상호작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는, 이른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체화된 인지 이론은 1990년대 중후반쯤부터 심리철학(마음철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분야에서 아주 중심적인 연구 논제로 본격 등장했습니다. 캐나다 앨버타 대학교 철학 교수인 로버트 윌슨(Robert A. Wilson)에 따르면, 이 체화인지 이론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초기 3대 저작으로서, 조지 레이코프 · 마크 존슨(George Lakoff & Mark Johnson)의 『삶으로서의 은유 Metaphors We Live By』(1980), 프란시스코 바렐라 · 에번 톰슨 · 엘리노어 로쉬(Francisco J. Varela, Evan Thompson, & Eleanor Rosch)의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 The Embodied Mind』(1991), 앤디 클라크(Andy Clark)의『Being There: Putting Mind, World, and Body Back Together』(1997) 를 꼽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가운데 바렐라 · 톰슨 · 로쉬의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 The Embodied Mind』를 보면 동양의 불교철학적 통찰과 개념들을 많이 도입/수용/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당사자인 우리 동양인들이 심오한 음풍농월/염불/선문답/공안 놀음에만 자족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저들 서양인들은 불교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분석적 심리철학(마음철학)과 인지과학, 심지어 신경과학에까지 도입 · 수용하고 적용해 철학적/과학적 진전을 이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동양인/한국인들이 동양철학에 보탠 것은 노장사상/불교철학이 양자역학의 과학적 핵심을 이미 수천년 전에 갈파하고 있었다는 식의 다소 허황된 아전인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질문 님의 촌평 또한 근거박약한 아전인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자는 "人法地"라는 세 글자로 위 이론을 2500년전에 이미 갈파하였음.
그래서 긴 글을 씀이란 사실 饒說일 뿐임.
도대체 요설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주의 철리를 깨쳤다는 그 숱한 도인/고수들의 갈파와 설파처럼 요설스러운 게 어디 또 있나 싶습니다.
◈ 참고 자료
■ Varela, Francisco J., Evan Thompson, & Eleanor Rosch (1991).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Cambridge, MA: MIT Press. [xx + 308 pages]
■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
프란시스코 바렐라 · 에번 톰슨 · 엘리노어 로쉬 지음 | 석봉래 옮김 | 옥토 | 1997-08-30
원제: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1991)
[반양장 | 454쪽]
■ Wilson, Robert A. & Lucia Foglia (2011). Embodied Cognition. in Edward N. Zalta (ed.),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3 Edition), URL = <http://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3/entries/embodied-cognition/>.
그것이 만일 징계 요구자의 의도였다면 그는 이미 성공하였습니다.
출처(ref.) : 운영회의 - 질문님에 대한 징계 심사 요청합니다 - http://theacro.com/zbxe/?mid=notice&page=2&document_srl=793478
by 아타루
"아크로에 대한 흥미"를 그닥 많이 잃어버리지는 않았던 모양... ^m^
뇌를 넘어서
데이비드 브룩스
2013. 6. 17.
시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양상이다. 어떤 이가 중요한 과학적 성취를 이루는데, 그것이 세계의 일부를 설명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성취가 불러온 흥분에 사로잡혀 이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신경과학에 관련하여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 분야는 명백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흥분시킨다.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나는 너에게 네가 이것에 사로잡혀 있고, 때때로는 두뇌를 이해함이 모든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는 해결책이기라도 하듯이 지나친 몰입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두 차원에서 일어난다. 낮은 차원에서는 협의 회로 신경지도 연구자들이 있다. 이들은 어여쁜 뇌 주사(走査) 영상들을 찍어내고는, 사람들이 무슨 물건을 살지, 어느 당을 찍을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어떤 범죄자가 그의 범죄때문에 가두어져야 하는지를 예측하는데 이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차원에서는 어떤 이들이 "불과(不過)주의자"라고 부르는 학자 및 이론가들이 있다. 인간 존재란 신경세포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두뇌를 충분히 잘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행동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행동을 결정하는 물리적 원인의 연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중독같은 여러 행동들이 두뇌의 질병에 지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사실은 자유 의지를 지니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그들의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물질적 과정에 의하여 일어난다. 신경과학은 행위를 이해하는 길로서의 심리학과 기타 분야들을 대체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극단주의가 동일한 사실에 의하여 논박된다. 뇌는 마음이 아니다. 뇌활동 지도를 들여다 보아서 마음의 감정, 반응, 희망, 욕구를 예측하거나 적어도 이해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첫번째 기본적인 문제점은 뇌의 영역들이 여러가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샐리 새털과 스캇 O. 릴리언펠드가 그들의 설득력있고 아주 읽을만한 책인 <세뇌된: 마음없는 신경과학의 유혹적 호소> 에서 설명하였듯이, 네가 어떤 사람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기(fMRI)에 넣고, 특정 활동을 하는 동안 편도나 뇌도가 활성화됨을 관찰한다고 치자. 그러나 편도는 공포, 행복, 신기함, 분노 또는 (적어도 여자에서는) 성적 각성동안 활성화된다. 뇌도는 신뢰, 통찰, 감정이입, 반감 그리고 불신을 진행시키는데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니 너는 사실상 무엇을 보고 있음인가?
더하여 한 활동이 통상 뇌의 많은 다양한 부위에 분포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뇌 영상"이라는 책에서 예일의 생체물리학자 로버트 슐먼은 우리가 "작업 기억"이라는 유용한 개념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개념은 뇌의 적어도 30 장소 이상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게다가 "저 사람은 증오심을 느끼고 있다."고 우리가 보고 말할 만한 분산된 활성화 양상이란 없는 듯이 보인다.
더하여 한 행위가 많은 다양한 뇌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고, 동일한 사건이 많은 다양한 뇌 반응을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저명한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주장하듯이, 너는 똑같은 샐러드를 주문할 수 있지만, 네가 취했는지 깨었는지, 민활한지 피로한지에 따라 네 뇌 활동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더하여, 케이건이 또 강조하듯이, 의미의 문제가 있다. 한 잔의 물은 네가 목말라 죽어갈 때는 다른 때보다 더 의미깊을 것이다. 너의 연인은 너의 친구보다 더 의미있다. 신경세포를 연구하여 의미의 미묘함를 이해함이란 셰익스피어의 철자를 연구하여 맥베스에 의하여 일어나는 열정을 이해함처럼 어려운 일이다.
최종적으로, 물리학을 흉내내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려는 모든 방법을 망치는 작인(作因)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하루는 담배를 피우다가 다음날은 끊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의 집중 양상을 옮김으로써 그들의 뇌를 유일 독특하고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시킨다.
새털과 릴리언펠드가 "신경중심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생의 비결정성을 포착하여 그것을 측정가능한 과학적 범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다.
지금 우리는 다면적으로 어떤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 위하여 다양한 학문들에 의존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는 전해 내려오는 긴장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 학문이 이것을 모두 설명하도록 함으로써 모호성을 줄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물질적 결정주의로 환원함으로써 인간 자유의 혼란스런 모호성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과오로 귀결되는 지적 유토피아주의의 한 형태이다. 오늘날 중요한 일은 과학과 자료에 의하여 얻어진 흥미로운 결과물을 수확하면서, 동시에 과학과 자료의 한계점을 이해함이다. 다음 번에 누군가가 너에게 하나의 뇌 주사(走査)가 뭔가를 말해 준다고 말하거든, 약간은 회의적이기를 바란다. 뇌는 마음이 아니다.
http://www.nytimes.com/2013/06/18/opinion/brooks-beyond-the-brain.html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私譯임.)
이런 말이 있음.
신경과학을 깊이 파면 의학이 나오고,
의학을 깊이 파면 생물학이 나오고,
생물학을 깊이 파면 화학이 나오고,
화학을 깊이 파면 물리학이 나오고,
물리학을 깊이 파면 수학이 나오고,
수학을 깊이 파면 논리학이 나오고,
논리학을 깊이 파면 언어학이 나오고,
언어학을 깊이 파면 심리학이 나오고,
심리학을 깊이 파면 행동과학이 나오고,
행동과학을 깊이 파면 신경과학이 나오고,
.........
(무한으로의 후퇴)
그래서 노자는 "知者不言 言者不知, 善者不辯 辯者不善."이라고 말했음.
은나라 법에 길에 재를 버리는 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자공이 이를 너무하다 여겨 중니(=공자)께 여쭈었다.
중니 가라사대:
"[은나라 통치자들이] 정치의 도를 앎이로다.
무릇 길에 재를 버리면 반드시 사람에게 튀고,
재를 뒤집어 쓴 사람은 반드시 화를 낸다.
노하면 곧 큰 싸움이 벌어지니,
큰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삼족이 서로 죽이게 된다.
이처럼 삼족을 죽일 수 있는 일은 모름지기 사형에 처하여도 된다.
또한 무릇 무거운 벌이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되,
반면 재를 버리지 않음이란 사람들이 쉬이 여기는 바이다.
사람들이 행하기 쉬운 일을 하도록 하여
싫어하는 바를 떠나 하지 않도록 함이니,
이는 다스림의 길이다."
이런 말도 있다.
은나라 법에 공로에 재를 버리는 자는 그 손을 잘랐다.
자공 가라사대:
"재를 버리는 죄는 가볍고,
손을 자름은 무거우니,
옛사람들이 어찌 그리 사나왔는가?"
[공자] 가라사대:
"재를 버리지 않음은 쉬운 바로되,
손을 잘림은 싫은 바로다.
쉬운 바를 행하여 싫은 바를 면함을
옛사람들이 쉬이 여겼고
그래서 [그리] 행하였다."
殷之法, 刑棄灰於街者. 子貢以爲重, 問之仲尼. 仲尼曰:「知治之道也. 夫棄灰於街必掩人, 掩人, 人必怒, 怒則□鬪, □鬪必三族相殘也, 此殘三族之道也, 雖刑之可也. 且夫重罰者, 人之所惡也 而無棄灰, 人之所易也. 使人行之所易, 而無離所惡, 此治之道.」
一曰: 殷之法, 棄灰于公道者斷其手. 子貢曰:「棄灰之罪輕, 斷手之罰重, 古人何太毅也?」 曰:「無棄灰, 所易也 斷手, 所惡也. 行所易, 不關所惡, 古人以爲易, 故行之.」
(私譯임.)
루돌프 쥴리아니의 소위 "Zero tolerance" 정책이란 새로운 것이 아님.
"완전한 진실이란 없다. 모든 진실은 半진실이다. 악마의 유희란 그것을 全진실로 대접함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의 위 언명이 만일 진실이라면, 위 언명 또한 半진실일 뿐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과 동일 구조.
이 문제를 럿셀과 화이트헤드는 "언어의 층위"로 해결했음.
("서양철학의 모든 역사과정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화이트헤드.)
너무 많은 백만장자와의 문제
크라이셔 프릴랜드 | 로이터
2013년 6월 20일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있다. 그것이 이번 주 RBC 재산 관리 및 캡제미니 금융 용역에 의하여 발간된 세계 부유 보고서, 세계의 백만장자들에 대한 획기적 연간 연구, 의 결론이다.
그 보고서는 100만 달러 초과 투자가능 재산을 가진 사람 숫자가 2011년에 비하여 9.2 퍼센트 증가한 1200만 명으로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군의 총합된 부 역시 전년에 비하여 10 퍼센트 증가한 46.2조 달러를 기록하였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 부자 군내에서조차 매우 매우 부유한 사람이 가장 좋은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보고서에서 투자 가능 재산 3000만 달러 이상으로 정의된 초부자(超富者)의 숫자는 11 퍼센트 증가하였는데, 이건 단순 백만장자 숫자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11만 1천 명이라는 지구 인구중 이 작은 조각이 세계 백만장자 부 전체를 합한 것의 35.2 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최고층에서 이런 극단적인 집중을 불러 일으키는 승자독식의 힘은 과연 무엇인가? 프린스톤 경제학 교수이자 배럭 오바마의 경제 자문 회의의 이임하는 의장인 앨런 크루이거에 의해 이달초 제안된 한 설명이 있다. 자신이 전에 출판한 학술 서적을 인용하면서, 크루이거씨는 세계 경제에서 널리 작용하는 힘을 그려내기 위하여 그가 "로큰 롤 산업"이라고 부르는 경제 이론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점점 승자독식 경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음악 산업에서 오랫동안 경험되어진 현상이다." 크루이거씨가 클리블랜드에서의 한 연설에서 주장하였다. "최근 수십년에 걸쳐 기술적 변화, 세계화 및 미국내에서 공영(共榮)을 지지하는 기관들이나 조치들의 침식이 중산층을 증가하는 응력아래 놓이게 하였다. 운좋거나 재능있는, 둘의 차이를 말하기란 종종 어렵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잘해온 반면, 광대한 다수는 그저 유지나 하려고 분투해왔다.
고전적인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바드 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N. 그레고리 맨큐가 <경제 전망지>의 여름 호에 실릴 "1 퍼센트를 방어하며"라는 논문에서 사려깊게 그 사례를 다루었는데, 그것이 지구적 1 퍼센트의 흥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을 대표할 것이다.
맨큐 교수는 가상의 "평등주의적 이상사회"가 "한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지닌 어떤 기업가에 의하여" 붕괴되는 사고 실험으로써 그의 주장을 시작한다.
"아이포드를 개발한 스티브 좁스나, 해리 포터 책들을 쓴 J.K. 롤링이나, 또는 대작 영화들을 감독한 스티븐 스필버그같은 기업가를 생각해 봐라. 그 기업가의 제품이 소개되었을 때, 사회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싶어한다. 그들 각자는 말하자면 [지갑속의] 100 달러와 헤어진다. 계약은 자발적인 교환이고, 그래서 그것은 사는이도 파는이도 더 낫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많은 사는이와 단 한 명의 파는이가 있기때문에, 경제적 복리의 분포는 이제 아주 심히 불평등해진다. 신제품이 기업가를 다른 모든 이들보다 훨씬 부유하게 만든다."
맨큐 교수는 이 가상의 시나리오가 극단적이고 양식화된 방식으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합중국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포착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자가 표현에 의하자면 "승자독식에 대한 방어"의 기초를 이룬다.
물론, 맨큐 교수도 깨닫듯이 이 양식화된 1 퍼센트의 흥기 이야기는 그들중 가장 매력적인 꾸밈새를 지닌 군을 예시한 것이다. 그것은 천연 자원의 통제를 확보함으로써 부유해진 상품 남작, 또는 금융 용역산업의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뒷면이 나오면 네가 지는" 비규제화로부터 혜택받는 은행가들, 또는 아무 것도 발명하지 않았으나 임원 봉급 급등이라는 문화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최고경영자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크루이거씨가 넌지시 말했듯이 가장 큰 문제는 초부자의 흥기가 외따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구적 중류 계급 공동화라는 보다 어두운 현상과 견고하게 발맞추어 일어나고 있다. 국련의 기관인 국제 노동 기구에 의한 2012년/2013년 지구 임금 보고서는 국민 소득중 노동자 지분이 감소하는 전역적 경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나에서조차 그러한데, 거기서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였으나 국내 총생산은 그보다 더 세게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더 걱정되는 것은 모든 이들을 더 낫게 만들어주는 비밀의 양념이어온 노동 생산성의 임금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I.L.O.에 따르면 합중국에서 1980년 이래 비농업 사업 부문의 노동 생산성이 대략 85 퍼센트 증가한 반면, 실질 임금은 겨우 35 퍼센트 증가하는데 그쳤다. 종종 중류 계급 성공담으로 알려진 독일에서조차 지난 20년간 노동 생산성이 거의 4분지 1 정도 올랐으나, 실질 임금은 그대로이다.
두번째로 크고 나쁜 속발 사건은 쇠락하는 사회적 이동성이다. 맨큐 교수의 논문과 함께 출판될 예정인 논문의 저자인 캐나다의 경제학자 마일즈 코럭은 흥기하는 소득 불평등이 쇠락하는 기회 균등성과 동시 발생함을 보여준다. 그 1 퍼센트는 그들의 특혜를 [자손에게] 전달하는데 매우 익숙하지만, 바닥에서 태어난 자들은 기어 올라가기가 더욱 어려움을 발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승자독식 경제의 거대한 역설이다. 최선의 경우, 그것은 무엇가 놀라운 것을 가지고 번성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를 부요하게 만들어 버린, 스티브 좁스라는 입양된 중퇴자나 J.K. 롤링이라는 분투하는 외어미에 의하여 주도된다. 그러나 승자독식 경제는 미래에 1 퍼센트에게 태어나는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돌파가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들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긴급히 그 영향력을 완화시킬 길을 찾을 까닭이다.
크라이셔 프릴랜드는 톰슨 로이터의 소비자 소식 담당 이사겸 편집인임.
http://www.nytimes.com/2013/06/21/us/21iht-letter21.html?_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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