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디 있는지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빚어낸다
애덤 올터
2013년 6월 14일 인터내서녈 헤럴드 트리뷴

1970년대 초, 한 연구 팀이 미국 동부 해안 일대의 대학 기숙사 근처에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를 수백 통 뿌려 놓고 얼마나 많은 편지들이 우체통으로 가는지 기록했다. 연구자들은 배달된 편지를 작은 자선 행위로 간주하였는데, 어떤 기숙사들이 다른 기숙사들보다 좀 더 관대함을 발견하였다.

덜 붐비는 - 층마다 비교적 적은 학생들이 사는 - 기숙사 근처에 떨어진 편지들은 거의 전부 수취인에게 도달하였다. 반면 붐비는 기숙사 근처에 떨어진 편지들은 10 통중 6 통만 여정을 마쳤다.

명백히,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뭉쳐진 고밀도 주거의 학생들은 대학 동료들에게 덜 연계되어 있다고 느꼈고, 이것이 그들의 관대함을 약화시켰다.

나중에 연구자들이 일단의 다른 학생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런 편지를 접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 거라고 상상하는지 질문하자, 어디 사는지와 무관하게 95%의 학생들이 자신이라면 우체통에 넣었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자기평가 연구들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친절하고, 우호적이고, 거기에 더하여 정직하기도 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들이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영속적 속성의 집합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환경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를 본능적이고 비의도적으로 바꾸는 카멜레온에 더 가깝다.

2000년에 행해진 다른 실험을 검토해 보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 시의 계약자들이 시 일대의 현저한 장소들에 일련의 청색 등을 설치하였다. 이 등불은 시의 보기 흉한 지역들이 좀 더 낫게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는데, 몇 달후 시의 범죄 통계를 내는 사람들은 파란 빛으로 물들어진 지역들에게 범죄율이 하강한 놀라운 경향을 목도하였다.

순찰차 위의 경광등을 흉내낸 등불들은 경찰이 순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 했다. 2005년 일본 나라 현의 경찰이 우범 지역에 파란 등을 설치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전반적 범죄율이 떨어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이 방법을 시도하였을 때, 그들은 파란 등불 아래서 쓰레기와 자살 기도 역시 감소함을 발견하였다.

왜 파란 등불이 범죄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론들이 생겼다. 아마도 그것들의 밝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백열광이 그늘진 바닥을 보다 더 열리고 노출된 것으로 느끼게 만들든가, 혹은 정반대로 그것들이 신비롭게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지든가. 여하튼 아주 작은 조치조차도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은 그들이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소에서 더 정직하게 행동한다. 북동 잉글랜드 뉴캐슬 대학의 심리학자들은 대학 노동자들이 작은 식당에서 꽃대신 한 쌍의 눈이 그려져 있는 가격표 바로 아래의 자율 지불함에 차와 커피 값을 훨씬 더 잘 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연구가 영국의 서 미들랜드 지방의 경찰로 하여금 시내 일원에 한 쌍의 눈이 그려진 대형 포스트를 설치하도록 촉발하였는데, 단편적인 보고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 범죄가 줄어 들었다.

거울도 동일한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보다 더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응시하도록 강요하기때문이다.

다른 환경적 단서들이 우리가 나쁘게 행동하도록 미묘하게 허가함으로써 우리 행동을 빚어낸다. 심도있게 토론된 "깨진 유리창 이론"에 의하면, 다른 상황에서라면 착하게 행동할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이 있는 주변에서는 보다 더 범죄를 짓기 쉬운데, 그 깨진 유리창은 그 지역 주민들이 그들 재산을 유지 보수하기 위하여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시사하기때문이다.

그 이론의 저자인 제임스 Q. 윌슨과 조지 L. 켈링은 <월간 대서양>에 실린 1982년 논문에서, 만일 한 건물의 깨진 유리창이 수리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건물의 다른 유리창까지 더 깨뜨릴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큰 반달리즘을 고무할 것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 이론이 도로변의 쓰레기통에도 적용된다. 쓰레기통이 많을수록 쓰레기가 더 많이 쌓인다. 종국에는 사람들이 포장판매 식당에서 들고 나온 쓰레기의 봉투를 버리기 시작하고, 이것은 곧 방치된 지역에서 더 많은 범죄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윌슨과 켈링이 그들의 이론을 제안한 1982년 이래, 이 쓰레기통 예는 많은 실험적 지지를 받았다. 한 연구에서 사회 심리학자들이 한 대형 병원 주차장에서 139대의 자동차에 전단지를 놓아 두고서 차 소유주가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 관찰하였다.

이번에도 환경이 반응을 빚어내는 듯이 보였다. 운전자가 병원에서 나와 주차장이 전단지, 사탕 껍질과 커피  컵들(물론 연구자들에 의하여 설치된 것)로 어질러져 있음을 발견하였을 때, 거의 절반 정도가 자기 차에서 전단지를 떼어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반면, 연구자들이 운전자가 돌아오기 전에 주차장을 청소하였을 때는 오직 10명중 1명만이 전단지를 버렸다.

알지 못하는 채, 운전자들은 그 지역의 주도적 규범이라고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으로 적응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하는가에 관한 심원하고 아마도 혼란시키는 무언가를 말해준다. "너"나 "나"의 유일한 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인격에 닻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부대상황적 단서들이 때때로 우리를 이러한 닻으로부터 너무 멀리 끌어내므로,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가, 혹은 적어도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쉽겠는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착한 사람은 좋게 행동하고 모진 사람은 나쁘게 행동한다는, 우리 각자의 본질적인 판본이 존재한다고 믿음은 마음을 안도하게 만드는 일이고, 그런 경향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점증하는 증거들이 우리가 누구인가 - 예를 들자면 쓰레기충인지 착한 시민인지 - 는 우리가 하필 어디 있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짐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환경적 단서들이 우리가 시내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만큼이나 빠르게 우리를 규정짓고 재규정짓는다.

뉴욕 대학 스턴 경영 대학원 마케팅학 조교수 애덤 올터


http://www.nytimes.com/2013/06/16/opinion/sunday/a-self-defined-by-place.html?_r=0


(私譯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