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제가 어느 부분에서 착시를 일으켰는지를 정확히 기술하죠.

 
 
 22 년 전 오늘, 1980년 5월 18일 나는 서울을 빠져나와 광주에 도착했다. 
 마치 누군가에 이끌린 것처럼,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죄로 현상금 100 만원과 일계급 특진의 수배받는 도망자가 항쟁이 일어난 피의 광주로 피신을 한 것이다. 항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그로부터 내가 직접 본 광주와 항쟁과 군인들 그리고 내 어머니를 비롯한 비탄과 슬픔과 절망에 젖은 이 땅의 어머니들을 잊을 수 없다.


 http://old.sgr21.or.kr/home/bbs/board.php?bo_table=sgr_04&wr_id=144&page=22



 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이었으며 5월 15일에 일어났던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 현장에도 (당연히) 함께 했던 사람의 증언입니다. 
 
 그 안철수 발언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는가, 또 그 발언을 어떻게 해석하는 게 옳은가 등은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 18일, 바로 그 당일에, 서울대에 갓 입학한 어느 새내기가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은 극히 낮다)라는 겁니다. 그게 안철수건 또 안철수가 아닌 다른 누구건 말입니다. 이건 윤창중이 불순한 종북세력의 계략에 걸려들어 완벽하게 무고를 당했을 개연성보다 낮아요.

a. 님의 상기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신계륜보다 서울대에 갓 입학한 새내기 안철수가 당시 학생시위 관련 정보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

이 논지에 의거, 저는 학생운동 약사를 기술하며 '그렇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b. 그런데 님이 간과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신계륜이 당시 수배자의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님의 주장의 '형식'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죠.


경우 1) 고대 총학생 회장 신분이었던 신계륜보다 서울대에 갓 입학한 새내기 안철수가 당시 학생 시위 관련 정보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

경우 2) 고대 총학생 회장 신분이었지만 수배자 입장이었던 신계륜보다 서울대에 갓 입학한 새내기 안철수가 당시 학생 시위 관련 정보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




c. 따라서 학생운동 약사를 알던 모르던 님이 증명하셔야할 것은 다음입니다.

"비록 수배자 입장이지만 고대 총학생 회장 신분인 신계륜이 새내기 안철수보다 정보 취득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즉, 정보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고대총학생회장 신계륜 > 대학 새내기 안철수--------------------------가 아니라

수배 중인 고대총학생회장 신계륜 > 대학 새내기 안철수 ---------------------를 증명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님은 정보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수배 중인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이라고 등치 시키신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정보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수배 중인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대학생 새내기 안철수......... 라도 먼저 증명을 하셔야 했습니다.


결국, 님은 주장을 하시기 전에 정보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수배 중'은 아무런 제약 사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했습니다. 


님의 주장 '형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2. 과연 '수배 중'이라는 조건은 정보 취득 가능성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까?


a. 이 부분은 님이 증명하셔야 하겠지만 편의 상 제가 당시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5월 18일 '서울을 빠져나간' 신계륜은 무슨 일 때문에 수배가 되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신계륜이 수배된 이유가 아니라 신계륜이 수배되었던 당시 상황입니다. 예. 5월 15일 3일 전에 바로 서울역 학생 시위가 있었습니다. 5.17 계엄령이 있게 만든, 그리고 심재철의 '서울역앞 회군'으로 알려진 바로 그 시위 말입니다. 신계남의 정확한 수배 일자는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울역앞 회군 직후 최소한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에의 수배령은 떨어졌을 것이고 5월 15일 서울역앞 시위는 517 계엄령 선포의 단초가 될 정도로 통치권에 큰 충격를 주었을 것이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배령은 수배자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을겁니다. 따라서,  수배자 신분의 신계륜은 '조직적이지 못하던 당시 학생운동의 특성 상' 오히려 대학교 새내기 안철수보다 정보 취득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이미 기술한 것처럼, 대한민국 학생운동은 박정희 독재 정권 때의 낭만적인 학생운동에서 1212쿠테타를 방치시켰다는 반성에서 의식화 조직화 됩니다. 관련 자료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면 아시겠고 광주진싱조사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나온 '심재철의 답변에서도' 그 방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계남은 KBS 열린토론의 패널로 참석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 신계륜 전 의원

예 광주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나니까 저는 그 때만해도 상당히 낭만적인 수준의 학생운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그런일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고향이 광주니까 광주쪽으로 가면 수배된 상태 속에서도 편안히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광주로 갔는데 정면으로 그 사태를 맞은겁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 일이 제 인생의 전반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일도 있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직접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인생전반을 다 바꾸어버린 충격적인 일이 되었고 그렇게 기억되죠



'고려대학교 총학생 회장'의 신분이었던 신계륜이 '낭만적인 수준의 학생운동을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한총련 같은 경우 간부가 수배가 되어도 점조직으로 '지령'을 내리는 것에 비하면 상상이 안가실겁니다. 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1212 쿠테타를 방기한 반성으로 학생운동이 의식화 조직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학생운동은 그렇게 변해갑니다만 1980년 당시에는 여전히 '낭만적인 수준'의 학생운동이었고 정보의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학생간부가 반드시 더 높지는 않았습니다.


즉, 조직화되지 않은 학생운동 환경 하에서 '대학총학생 회장'이나 `대학생 새내기'의 정보 취득은 '조직의 힘'이 아니라 '개인 역량' 또는 '개인의 환경'이 더 크게 좌우합니다. 따라서 정보 취득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바뀝니다.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수배 중인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대학생 새내기 안철수 ------------ (님이 암시적으로 주장한 내용) X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대학생 새내기 안철수 > 수배 중인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 (당시 상황 상 추측되는 가능성 중 하나)


3. 당시 안철수가 처해 있던 상황

여기서 제가 지도 하나를 올립니다.

서울대 의대 위치 지도.gif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지금이나 1980년 당시에서 혜회동에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글에서 언급했었지요? 그리고 성균관대학교가 주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는 당시 '하숙'을 했다고 했습니다. 기록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만 1980년 당시 성균관대학교는 '삼성의 캠퍼스 이전 계획'과 맞물려(그래서 삼성에서 도투락의 봉명재벌로 후원 재벌이 바뀌었다가 다시 삼성으로 바뀌었습니다) 학내 시위가 가장 극심했던 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극심했는가 하면, 1981년부터인가 새로 실시된 '전방시찰 훈련'에서 성균관대학교가 제1착으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니까요. 즉, 당시에 교련과 마찬가지로 전방시찰 훈련을 거부하면 즉시 '학적변동'이 생겨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전방시찰 훈련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학교끼리 연대하여 전방시찰 거부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의 진위와 관계없이, 안철수가 위치했던 곳은 당시 정국의 상황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학가였습니다. 그 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조직화되지 않은 학생운동의 환경에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위치였지만 수배자 신분인 신계륜보다는 대학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안철수가 정보 취득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그런가요?


아래 그림은 서울대가 1980년 당시 의대는 물론 약대 그리고 수의대가 혜화동(연건캠퍼스)에 여전히 위치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입니다.

서울대 역사-1975년.gif


그럼,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올려집니다. 지엽적인 문제이고 결과에 크게 미치지 않는 것이지만 '팩트주의'를 보여주기 위해(^^) 거론합니다.


서울대 의대가 혜화동에 있었지만 본과가 시작되기 전인 대학교 1,2학년 때 안철수는 관악캠퍼스에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이 떠올려지는 것은 교양과목을 이수하는 1,2학년의 특성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연건캠퍼스에 있는 의대 계열 학생들이 관악캠퍼스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담당 교수가 연건캠퍼스로 가서 강의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기록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안철수가 관련 정보를 접할 가능성의 차이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4. 그럼 안철수는 518 관련 소식을 어떻게 접했을까? 또한 5월 18일날 하숙집을 떠났을까?

일단, 당시 상황을 추정해 봅니다.


전국적인 계엄령이 내려지던 5월 17일 새벽 24시, 그러니까 5월 18일 0시는 일요일이었습니다. 즉,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고 당시 대개의 대학교는 토요일날 강의가 없었으며 따라서 하숙생이었던 안철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부산으로 내려갈 일이 없었고 하숙집에 머물러 있었을겁니다. 그런 상황은 하숙을 하건 기숙사에 있건 집을 떠난 유학생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5월 17일은 토요일이니까 대학생 특성 상, 집에 갔다올 일이 있는 학생은 5월 16일 저녁에 움직였거나 또는 5월 17일 움직였을겁니다. 물론, 당시는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니 5월 18일인 일요일 당일에 집에 다녀올 계획이 있었던 학생들도 있었을겁니다.


당시 서울로 유학을 온 학생들은 지금의 학생들과는 달리 은행 전산망이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필요한 돈 등을 '간편하게' 온라인으로 송금받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직접 수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에 집으로 가는 학생들의 수가 지금의 상황보다는 많았을겁니다. 더우기, 지금보다는 효의 개념에 더 충실한 시대였기 때문에 돈은 물론 '부모님 안부 확인 등 예의 상' 집에 가는 빈도수가 높았을겁니다.



그런데 제가 전글에서 고속버스터미널 언급을 했었지요?


예. 집에 가는 사람들은 5월 16일, 5월 17일 그리고 5월 18일.... 이렇게 개인의 편의에 따라 이동을 했을겁니다. 그런데 5월 18일 0시에 계엄령이 떨어졌고 휴교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실제 휴교령은 5월 18일 0시이지만 이틀 전에 이미 학교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졌다는 기록을 접한 기억이 나는데 지금 검색이 안되므로 넘어갑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 5월 16일 광주의 횃불 시위........ 등 시국을 감안하면 5월 18일 0시에 발표된 휴교령은 학생들에게 이 휴교령이 '이삼일이 아닌' 최소한 일주일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을겁니다.



그렇다면 5월 18일날 더욱 많은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했을 것이고 안철수 역시 고향에 내려갈 생각을 했을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추석 등 귀성/귀경 행렬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교통체증 때문에 일찍 떠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추석 당일날 가는 사람도 있고 거꾸로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 차례를 지내는 경우 등 다양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예. 5월 18일 0시에 휴교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휴교령이 풀릴 때까지 고향으로 내려갈 학생들은 5월 18일날 급증할겁니다. 그렇게 예상한 사람들은 기숙사는 물론, 하숙비는 월단위로 지급을 하니까 며칠 있다 내려가도 된다...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안철수 역시 반드시 5월 18일날 내려가지는 않았을겁니다.



물론, 안철수 518관련 발언에는 5월 18일날로 명시되어 있지만 30년이 가까이된 시점에서 요일을 기억했을까요? 만일, 월요일에 등교를 했더라면 '시점'이 구분되니까 기억이 보다 선명했을겁니다. 그런데 휴교령 때문에 5월 18일 이후에도 등교를 하지 못하는 사태였기 때문에 '날짜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지고 혼동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님이 증명하셔야 하지만 그냥 넘어갑니다.


5. 안철수 주위에 고향이 광주였고 그래서 5월 16일이나 17일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나 기차가 없어...라는 소식을 전한 친구가 없었을까요?

제가 바로 헷갈린 5월 17일과 5월 18일입니다.


이미 정보의 취득 가능성에 있어서 님의 주장 형식이 틀렸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님은 그 내용에 있어서 님의 주장의 타당성을 확보하시려면 안철수가 정보를 취득할 확률이 낮은 상황, 즉 내용을 입증하여야 합니다.


1) 광주는 언제 폐쇄되었는가? (외부인 출입 통제)

2) 5월 16일부터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주1980년 5월 17일 광주-전남대학교 518 연구소.gif


위의 자료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기록처마다 상세가 다릅니다만 이 기록을 근거로 해도 비록 충돌은 없었지만 이미 5월 18일 새벽 공수부대가 활약(?)을 했는데 경찰도 아니고 공수부대가 활약...... 이 것은 당시 광주가 폐쇄되었다는 정황 증거입니다만 5월 18일 안철수가 이런 상황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에는 운동권조차 '낭만주의 경향'이었기 때문에 대학생이라면 '폼을 잡기 위해서라도' 공수부대까지 투입된 광주에 한번 내려가보고 싶은 생각이 안들었을까요?



최소한 님의 주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님의 아래 주장은 틀렸다...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 18일, 바로 그 당일에, 서울대에 갓 입학한 어느 새내기가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은 극히 낮다)라는 겁니다. 그게 안철수건 또 안철수가 아닌 다른 누구건 말입니다. 이건 윤창중이 불순한 종북세력의 계략에 걸려들어 완벽하게 무고를 당했을 개연성보다 낮아요.


즉 개연성에 있어서 님은 '윤창중이 불순한 종북세력의 계략에 걸려들어 완벽하게 무고를 당했을 개연성보다 낮다'라고 주장하셨는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전히 그렇게 주장하신다면 다른 기록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에 기록된 자료만이라도 철저히 파해시켜야 하실겁니다.



덧글)원래는 왜 '전두환은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렸나'와 'DJ는 왜 전두환을 용서했을까?'라는 제하의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그건 '박정희가 419 혁명 전에 쿠테타를 일으켰으면 성공했을까?'라는 제하의 글을 올린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