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유게시판에 있는 시닉스님의 진보진영의 문화적 감수성이 떨어질까요 대한 답글이기도 합니다.)

 

오늘 친구와 얘기하다가 요즘 한국에는 동마다 지역마다 체육관, 복지회관, 도서관등이 있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에 돌아가신 전대통령들의 업적이라는 말도 함께요. 이전에도 복지관이나 기타 시설들은 있었지만 지역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였고 일종의 커뮤니티센터의 역할을 기대하기엔 너무 관료적인 성격이 짙었다고 기억합니다제가 경험하지 못한 10년동안에 일어나 변화는, 굉장한 의미가 있게 들렸습니다. 선진국들의 도시정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이기도 하고 어떤 문화를 누리고 요구하는 일이 사치스럽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있어야 하는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보개혁 세력의 문화운동이 실제적인 지역주민들의 일상에 녹아나지 못하는 한계가 안타까웠던 초기 부문운동 활동가들이 고민하던 문제가 이미 상당부분 풀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극의 역할을 해서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이끌어가던풀뿌리문화운동이 구체적인 일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너무 당연해서 새삼스럽게 요구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권리로 정착한 제반 시설이라는 것은 지역주민들이 문화를 향유하고 누리는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기획하는 자율성까지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됩니다. 개인의 주머니를 털어 어느 빌딩의 지하실을 빌려 풍물을 가르치고 놀거리문화 보급에 애쓰던 지역의 문화패들은 이제 제대로 시설에서 정부와 지역주민의 후원을 받으며 주기적으로 문화교실을 열고,  찜질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이 아니더라도 동네사람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는 장소가 동네마다 있다는 것은 실제로 놀라운 발전입니다. 대안학교, 대안화폐를 시도하는 지역도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지방의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값으로 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취미교실을 연다던가 하는 것은 이미 일상적인 풍경이라더군요.

피상적인 감상이긴 합니다만 시닉스님이 궁금해하시는, 참여정부 당시 진보 개혁 진영 내의 집단적 감수성에서 일어났음직한 뭔가 내용이 어쩌면 이러한 '스며듬'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가시적인 감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효용을 다한 것이고 그것을 대체할 것은 여태까지의 어떤 유행처럼 퍼지고 관심이 높아지고 하던 메커니즘으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일수도 있습니다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제시해줘야 하는 모델보다 지역에서부터 스스로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삶에 기반한 문화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고 의미를 충분히 살려주어야 하는 것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후원을 아끼지 않는 시정, 정부의 정책이 되어야함을 각성시켜야 하는 것일테구요. 저는 이것이 업데이트된, 새로운 문화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픈소스 문화와 대중 미학에 기반을 대중문화의 정치화는 현시대에 등장한 대중문화의 새로운 특징이라고 생각할 있을 합니다. 일종의 온라인시위라고도 있는, 영화 포스터나 예고편, 광고음악 등을 이용한 패러디같은 미디어 제작에서 보이는 네트워크 시위문화를 예로 본다면 친숙한 대중 상업 문화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방법으로 정권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쾌하게 이미지화하는 식입니다 생각엔 저들도 이런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대처하기 시작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인터넷실명제나 모욕죄신설, 저작권법의 삼진아웃제 도입에서부터 미디어법의 통과에 이르기까지 풀뿌리미디어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강화해서 풀뿌리네트워크의 위력을 축소하려고 노력해왔고 최근 피디수첩 수사에서 보듯이 점점 노골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70년대부터 계속 이어져오는 문화운동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생겨나는 다양한 욕망들과 그것을 흐름으로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정치적 목적, 특정한 문화운동집단과 세력들의 이념적 방향대로 표상하려는 지배논리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들로서의 변방의 욕망들, 무의식이나 신체적 표현 등에 잠재되어있는 욕구들은 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실제로는 억압하는 결과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당시로서는 의미가 있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으나, 이제 그런 문화운동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대적 요구를 우리가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현실의 모순들은 그냥 존재하더라도 상상속에서나마 해소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문화운동이 국가의 부정이나 자본주의 문화장치들의 전면적인 전복을 시도하려는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국가의 문화권력과 시장자본주의의 문화독점에 반대하는 제도적 개입을 위해 각성과 분발이 필요할 것입니다(이번에 바람계곡님이 반복 강조하신 주장을 맥락 안에서 이해했습니다만 만일 오해라면 지적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노력해야 구체적인 실천내용에는 국가와 시장자본주의에 의한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1.
문화정책의 방향과 집행하는 예산을 감시하고
2.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는 각종 제도나 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3.
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문화정책이 문화의 공공성을 높이는 것인가의 여부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작업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대안으로
4.
각종 문화재원들을 어떻게 쓰고 배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안들을 마련해야함은 물론이구요.
그러나 여기서
5.
경계해야 것은 역시 분과주의 전문주의에 매몰되어 민중연대와 계급운동을 배타적으로 대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인상을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민은 없는 시민문화로 되어 비판하는 대상과의 차별점이 없어지고 실천보다는 구호로 그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개입이 없는 문화운동도 문제지만 민중이 배재된 문화운동도 문제인 것이지요.

문화 안에 담을 있는 것들은 실제로 다양합니다. 즐거움과 지성, 소비와 창조, 공동된 노력으로 집단의 의지를 표현해내고 개혁을 끌어내는 실천 혹은 실험의 과정들과 목적들까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문화운동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문화적 공간을 허용하고 스스로 그런 영토들을 확장, 재생산할 있는 흐름을 만들어줄 있어야 합니다. 소수문화공간이 출현했고 하위문화의 반항적 스타일이 유행하는 세대입니다. 청소년들이 실제적인 문화의 소비자이자 창조자이고 세력권으로 부상했으며 그들에게 소수문화의 자율적인 문화시장을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운동은 신자유주의 문화자본에 대항하고 자율적인 문화공간 확보와 문화시장을 만드는 실천이어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