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글루는 연대에 관해 논쟁이 한창이다. 하지만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지루하다. 논쟁의 열기는 뜨거운데, 내용은 공허하다.

이유는 논쟁의 핵심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개혁 진영이 연대를 요구한다면, 진보 진영이 연대를 반대한다면,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어야 할터, 현실 정치 세력간의 논쟁이므로, 그 '이유'는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상의 연대 논쟁에는 레퍼런스가 없다. 막연한 선명성 타령과 대동주의적 호소만이 논거로서 들어지고 있을 뿐이다. 감정에 기반을 두고 논쟁이 지속되므로, 합의점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모호하다.

이 체크메이트 상태를 돌파하려면? 도데체 무엇을 가지고 싸워야 하냐는 데에 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정치의 본질은 원래 경제. 결국 경제 운용 방식에 대한 차이를 놓고 연대냐 제갈길이냐의 싸움이 벌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방식의 차이점이 논쟁의 핵심이다.

소위 개혁 진영의 경제적 지향은 흔히 말하는 케인즈주의. 미시경제학 차원에서의 시장 기능은 인정하되 총수요와 총공급에 대해서는 적절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총수요와 총공급간에 자동적으로 균형이 맺어져 시장이 청산되므로 정부의 개입은 필요치 않으며, 정부 개입은 오히려 불필요한 낭비를 불러온다는 신자유주의 입장과는 다르다. 그러나 시장 기능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주류 경제학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진보 진영의 경제적 지향은 모호하다. 유럽의 사민주의는 실질적으로 케인즈주의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 일각에서 "케인즈 좌파"라는 말이 나오는것도 이때문이다. 총수요와 총공급을 관리하는 외에 사회적 대타협을 견인하고 복지 재정을 늘린다는 점에서 미국식의 케인즈주의에 비해 좀더 "왼쪽"이지만, 재화의 생산을 시장에 위임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과 마찬가지. 신발 생산을 국가가 담당하는 유럽 사민주의 국가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시장 실패가 일어날수 있는 공공재를 공기업이 담당하는 것은 사민주의나 케인즈주의나 비슷. 결국 현실의 유럽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가지고 의회민주주의 속에서 케인즈 경제를 구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 진보 진영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생긴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체험한 그들은 사민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사민주의가 케인즈주의와 유사하게 운용된다는 현실은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유럽 사민주의의 "이상향"만을 따오고 싶어한다. 동구권 붕괴 이후 진보 진영이 겪어오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입장"이 서 있지 않다.

이런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딱지 붙이기를 시도한다. 이 세상 모든 진보 아닌 것들을 신자유주의로 몰아세움으로서 자신들이 "신자유주의 아닌 어떤것"임을 확인한다. 부정문 형식의 정체성이다. "나는 사회주의다"라는 확실한 입장이 있었다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