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인생은 '폐렴'에서 시작하여 '폐렴'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데카르트를 낳자마자 '폐렴'으로 사망했고 그 여파로 데카르트도 죽음 일보직전에서 생환했지만 피난 생활 중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들어 폐렴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의 이름도 신생아 때의 죽음 일보직전에서 생환한 것을 기념(?) 중생(重生)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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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né(♂)/Renée(♀)

2 동명이인

2.1 클레이모어의 등장인물

1 René(♂)/Renée(♀) ¶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레나투스(Renatus)의 프랑스식 베리에이션으로, 프랑스 외에 독일이나 스페인 등지에서도 널리 쓰이는 이름.


(인용자 주 : 르네 데카르트는 불어로 René Descartes, 라틴어로 Renatus Cartesius로 표기하고 불린다.)

    (출처는 여기를 클릭)



태어났을 때부터 아팠던 탓일까? 데카르트는 성장 과정에서 심약함을 보였고 그 이후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면서 얍삽함과 치사함을 보인다.



데카르트는 원래 자신의 저서인 <우주론>을 출간하려고 했었다. <우주론>은 지동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데 출간을 임박한 1633년, 갈릴레오는 로마 종교심문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다.



'겁에 질려' <우주론>의 출간을 포기한 데카르트는 대신 3시론(三試論)을 출간, 세상에 내놓았다. 3시론은 《굴절광학(屈折光學)》 《기상학(氣象學)》 《기하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하학>에서는 현대에 한국의 중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XY 2차원 좌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XY 2차원 좌표가 바로 파리와 관련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XY 2차원 좌표가 파리와 관련이 있는지는 '정사'에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라는 것과 같이 논란의 대상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뉴튼 생존 당시 뉴튼이 거주하던 집은 물론 뉴튼이 산책코스로 택한 공원에서는 사과나무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뉴튼을 사과와 연결 짓고 데카르트를 파리와 연결 짓는 것은 다분히 기독교 문화 습성에 접어든 탓이리라. 물론, 이런 나의 판단 역시 다소 억측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브는 사과를 먹지 않고 복숭아를 먹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브는 사과를 먹었다고 바뀌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에덴동산이 존재한다면, 당시의 기상조건으로는 역시 '복숭아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이스라엘이 아닌 아랍 문화권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학설이 대두되었고 그 것 역시 거센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으니 말이다.



어쨌든, 논란의 대상임을 감안하고 언급하자면 심약했던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침대에 누워 공상하는 것을 즐겨했는데 그 때 마침 천장에 파리가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XY좌표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의 수학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발휘했는데 그 부분을 위키에서 발췌 아래에 적는다.(가독성을 위하여 문단은 제가 맞추었습니다.)


8세 때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 La Fleche의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1613년에 파리로 가서 법률을 배웠고 1616년 푸아티에poitier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데카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 만에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학문적 재능과 배짱은 별개의 것인가?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주창하다가 운명을 달리하기까지도 했지만 최소한 데카르트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3시론을 내놓으면서 혁신성 때문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또한 대단한 논쟁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그런 논쟁의 십자포화의 중앙에 서있기가 버거웠는지 그가 그동안 자유의 나라라고 주장하며 머물던 '네덜란드'를 버리고 스웨덴으로 망명을 갔다.



그리고 따스한 나라였던 네덜란드와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에서처럼 밤에 자면서 창문을 열어놓고 자다가 추운 스웨덴의 날씨에 감기에 걸렸고 그 것이 폐렴으로 도져 57세의 나이에 사망을 하게 된다.



만일, 데카르트가 3시론으로 인한 논쟁의 십자포화의 중심에서 도망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어린 나이에 파리로부터 XY 2차원 좌표를 착안한 그의 천재성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이번에는 붕붕 날라다니는 파리를 보며 새로운 좌표계를 발견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우리는 오늘 날, 좀더 다른 수학 체계를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는 인류 역사 상 가장 오랜기간 동안 '과학적 오류'를 신봉하게한 주범이다. 왜냐하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 자연발생학설'은 19세기의 파스퇴르에 의하여 '오류'로 판명되기까지 수많은 과학자의 눈물을 빼게 만들게 된 주범이니 말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또다른 과학적 오류에 의하여 눈물을 뽑은 아랍인들의 연금술에 비하면 '새발의 눈물'이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 자연발생학설'을 주장한 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리스-로마의 신화에서 신들의 신인 제우스는 유독 파리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제물 위에 파리가 잠시 앉았다가 날라간 며칠 후면 구데기가 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화에 신화가 덮여져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 자연발생학설'을 주장하였다. 물론, 보다 이론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 자연발생학설'은 상당히 복잡한 과학적 과제로 설명이 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


그리스의 생명사상은 인도의 힌두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Bergman; ibid, p 77] 이러한 진화사상을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그리스의 이오니아의 밀레토스에서 출생한 탈레스(Thales of Miletus 640-547 BC)였다. 그는 생명이 물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J.B. Birdsell; Human Evolution, p 22, Rand McNally, Chicago, 1972] 그의 제자인 밀레토스 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1-546 BC)는 '태양이 진흙을 포립시켜 동물을 발생하며....동물로부터 사람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물고기가 인간으로 발전했다고 하였다. [B. Thompson; The History of Evolutionary Thought, p 29, Star Bible & Tract Corp, Worth, 1981]


(중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영혼으로서의 생명을 형상(形相 form)'이라 하였고, '생명은 물질의 특수한 배치'라고 하여 중세기의 라마르크를 비롯한 생명의 자연발생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건조하고 촉촉한 것은 모두 동식물을 발생시키며....풀잎의 이슬에서 꿀벌이, 해저의 개펄에서 장어, 새우, 문어, 오징어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長野 敬譯; 生命 物質, pp 9-122, 平凡社, 東京, 1990, 원저는 Thomas S. Hall; Idea of Life and Matter: Studies in the History of General Physiology, 600BC-AD1900,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69] 그리고, 인간은 오랜 '생명의 수식'의 결과라고 하였다. [Osborn; ibid, p 54] 한편, 화석이 지질학적 변화와 생명의 계승의 증거라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of Colophon)이었다. [B. Glass, T. Owsel, W. Straus; Forerunners of Darwin, 1745-1895, p 6, The Johns Hopkins Press, Baltimore, 1959]


(중략)


그리스의 생명의 자연발생설은 후일 중세 유럽에서 다시 대두되었다. 탄산가스 발명자인 헬몬트(Van Helmomt 1577-1644)는 <쥐를 낳는 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자연발생론자들은 나무열매에서 나방이가, 호박에서 양(羊)이 나오며, 풀잎의 이슬에서 반딧불이가, 소똥으로부터 딱정벌레와 말벌이 생긴다고 하였다. 자연발생설을 신봉한 영국의 해부학자 하베이(William harvey 1578-1657)는 혈액순환의 원리와 모세관현상을 발견하고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으로 해석하여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5-1650)의 생체기계론에 영향을 주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의 몸은 자각이 아닌 기관장치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 하였다. 그는 또한 '축축한 진흙에 햇볕이 쪼이든지 부패시키면 생명이 저절로 발생한다'고 하였으나,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예외로 취급하였다. 그러다가,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명기계론이 마침내 라메뜨리(J.O. de La Matri 1709-1751)의 <인체기계론>에 의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 자연발생학설'을 데카르트가 이어받아  '닭짓'을 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의 파리가 데카르트 시절의 파리로 환생하였다는 '악마적 상상'은 아마 기독교인들도 같은 상상을 했었던 모양이다.



제우스 신의 파리에 대한 귀찮음을 넘어 불길함을 인간들은 공포감을 느꼈을까? 훗날 인간들은 성서에 있지도 않은 파리대왕인 '베알제붑'을 시리아의 전설에서 소환시켜 악마의 서열 2위로 호적변경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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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의 위엄당당한 모습---에프킬라로 칙해도 안죽을 것 같은.... 위키에서 퍼옴)



정확히 말하자면,  베엘제붑은 팔레스타인의 고대 5대 도시 중 하나인 에크론에서 숭배받았던 신 가운데 하나로 원래의 뜻은 '낯선 곳으로 온 자'라는 의미이다. 이 '낯선 곳으로 온 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도 기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후의 기록(구약인지 신약인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에서는 베알제붑이라는 기록으로 발견된다. 미국인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에크론이라는 도시는 여전히 전설의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파란색 부분은 브리테니커 사전 내용을 기본으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덧붙임)




고대로부터 이어진 파리에 대한 전설들은 현대인에게도 영감을 자극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1986년에 상영된 헐리웃 영화 '더 플라이'에서는 인간과 파리의 유전자가 뒤섞이게 되어 발생하는 사건들을 줄거리이니 말이다.




만일..... 파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파리의 등장은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아무리 심약했던 데카르트라도 몸집이 더 큰 파리가 천장을 기어다녔다면 위협을 느껴 상상의 날개 대신 당장 '하녀'를 불러 저 곤충을 없애달라고 했을테니까.



음.... 지나친 상상일까?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