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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의 예언대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마태오의 복음서, 26:31-35, 공동번역개정판)
그 동안 베드로는 바깥 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오며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26:69-75, 공동번역개정판)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왜 베드로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는지 궁금해졌다. 이러 저리 궁리해 보다가 다섯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 안팎에서 논쟁이 있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아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다른 가설도 환영한다.
<욕심설>
베드로는 살고 싶었다. 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예수를 배신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몹시 운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믿음설>
베드로는 예수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당연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말도 절대적으로 믿었다. 베드로의 믿음은 너무나 강해서 그냥 예수의 예언대로 행동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몹시 운 이유는 이번에도 예수의 예언이 실현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베드로의 믿음은 더더욱 굳어졌다.
<사랑설>
베드로는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죽어도 예수를 배신하기 싫었다. 하지만 예수를 배신하지 않으면 예수의 예언이 어긋나게 된다. 그러면 예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죽일 놈이 되기로 결심했다. 진정한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몹시 운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를 위해 자신이 죽일 놈이 된 것이 약간은 억울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예수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감격했을까?
<공포설>
베드로는 신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두려워했다. 만약 자신이 예수의 예언을 빗나가게 하면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예언대로 예수를 부인했다.
이것도 일종의 “욕심설”이다. 위에서 말한 욕심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현생의 목숨을 위해 예수를 배신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욕심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죽은 후에 호강하기 위해 예수의 예언대로 행동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몹시 운 이유는 너무 기뻤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호강할 것이 거의 확실해졌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기억상실설>
당시에 베드로는 기억상실증 때문에 예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른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왜 기억상실이 일어났을까? 하필이면 예수의 예언대로 기억상실증이 일어난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지한 신이 그 때 기억상실증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예수에게 귀띔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능한 신이 그 때 기억상실증이 일어나도록 조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기적이다. 기적은 누군가가 물리 법칙을 잠시 멈추는 것을 말한다. 만약 물리 법칙대로 베드로의 뇌가 작동했다면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몹시 운 이유는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이 예수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슬펐을 것이다.
어쩌면 베드로가 운 것도 기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이야기한 것이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베드로의 뇌는 물리 법칙과는 어긋나게 작동한 것이다.
이덕하
2013-06-08
3이 주는 매력때문이 아닐까요 ?
4번 배반할 것이다, 2번 배반할 것인가 ... 이건 쫌 이상하죠.
삼위일체, 성삼위... 고래로터 사람들은 3 좋아합니다.
이 숫자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죠.
요즘도 좋아합니다.
국가 성삼위 = { 군, 관, 민 }
(서양인에게)숫자 3은, 남성의 수이다. 기독교인에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이집트에서도 삼신을 섬겼다. 한편 숫자 3은 미스테리한 수이기도 한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은 공통적으로 매우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야기 중에 흔히 나오는 세 가지의 소원, 세 가지의 약속, 세 마리의 동물, 세 명의 왕자 등이 그 예이다.
서양의 경우에 인도-아리아족이 건너가면서 생긴 문화권이잖아요?
그런데 3이라는 것이 원래 인도-아리아적인 함의가 있다고 그래요.
조르주 뒤비의 [세 위계: 봉건제의 상상 체계] 22~23쪽에 보면 조르주 뒤메질이라는 비교신화학자가 인용되어 있는데, 인도-유럽어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사회를 세 가지 기능으로 나눴다는 거에요.
"제 1의 기능은 하늘의 이름으로 질서를 세우는 것, 즉 계율과 법을 규정한다. 제 2의 기능은 난폭하고 맹렬하며 복종을 강요한다. 끝으로 제 3의 기능은 다산과 건강, 풍요과 쾌락에 관련되며.."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괜히 사회를 세 개로 쪼갠 게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이덕하님이 원하시는 답은 왜 '3번' 부정했을까 가 아니라 왜 3번 '부정했을까?'에 방점이 있는 것 같은데...
욕심설 + 기억상실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예수를 잊은 것은 아니나 예수의 예언을 잊은 경우. 운 이유는 죄책감 + 예언에 대한 경외감.
이덕하님/이런게 있네요.
뮤지컬 ‘더 록’은 인간 베드로에 주목한다. 12제자 중 예수님을 가장 많이 따랐던 시몬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어부 시몬,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 그의 배신과 회개까지의 이야기가 약 100분의 공연으로 펼쳐진다.
뮤지컬 ‘더 록’의 특징은 인간 베드로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통해 관객에게 다가간다는 점이다. 시몬은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으로 ‘십자가’와 ‘메시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예수님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 이러한 시몬의 모습은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 있어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
특히 인간적인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려워하는 현대인의 모습, 죄지은 자신이 부끄러워 예수님에게 수줍은 모습으로도 다가서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베드로의 모습 속에 투영된다. 뮤지컬 ‘더 록’은 이러한 트라우마 때문에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며, 현대인들이 베드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 것을 조용히 경고한다.
뮤지컬 ‘더 록’은 지난해 뮤지컬 ‘바울’을 선보였던 MJ프로덕션의 새 작품이다. 이미 뮤지컬 ‘바울’을 통해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에 이은 기독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MJ 프로덕션은 베테랑 연출가 성천모를 내세워 이번 작품을 준비했다. 덕분에 소규모 공연 답지 않은 새로운 연출 방식과 음악적 완성도가 보고 듣는 재미를 높인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신성모독죄,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수 있다고 믿은 당시에 사람의 죄를 용서한 이유로 죄인의 사형도구인 십자가에서 죽게 되요
예수가 예루살렘과 광야와 사람들의 집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행한 일들이 문제시 되었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본래 하나님의 뜻을 율법에 가두는 그들의 잘못을 질타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 복음을 전파한 것을 불온하게 여긴 이들에게 고발을 당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죠
우리나라로 예를들면 일제시대에 고위관리들에게 고발 당해 일본 법정에 선 민족지도자라고 할까요 협의에서요
예수는 자신이 죽을 것과 다시 살 것을 예언하지만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행적과 이적을 보았던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된 것과 이제 곧 죽으리라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고 곤혹스러웠겠지요
어쩌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동행하고 말씀을 들었으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을수도 있고 죽음이 두려웠을수도 있고 수제자로서 그 상황에서 죽거나 구속되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죠
자신이 사건의 톱니바퀴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예언이 이루어지자 베드로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울었겠지요
첫번째 이유를 제외하고는 호사가들의 놀이 같아서 저는 별로 재미는 없네요
삿갓님/저 역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기록 상으로는 예수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예를 찾아보았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1:1; 3:11; 5:7; 15:39). 처음 것은 마가 자신이, 둘째 것과 셋째 것은 귀신들이, 마지막 것은 백부장이 언급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서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1:1; 9:7). 또한 예수님의 묵시적 연설에서 한 번(13:32), 대제사장의 질문 가운데 한 번(14:61) 사용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 중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예로 마가복음 14장 61절(이해를 돕기 위해 62절 추가)
(막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1. 마귀가 시험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전제하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부정하지 않으시고 대응하심
2.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은 말리지 않으심으로 긍정
3.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7: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눅 10: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건 너무나도 웃기는 질문처럼 보입니다! ㅋㅋ복잡다기한 썰들을 내 놓았습니다만,
그야, 베드로라는 '제자'의 성격을 잘 아는 예수님이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통빡을 때린 것이지요. 확신한 것이지요!
자기(예수)가 잡혀가고 나면, 그 제자들을 잡아족칠 것을 뻔히 알았던 것이고,
예수님의 심복 중의 하나였던 베드로도, 이놈 저놈이 저 베드로를 고발할 때, 제 살길을 찾아
자기(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답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일정 지역을 벗어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잡아 족칠 것인니 적어도 3번 정도는 물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제살길 찾으려고, 모른다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요?
믿음이라면 믿음, 신뢰라면 신뢰가 그만큼 약한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뭐, 이걸 갖가지 추측을 끌어다 붙이면 뭐하겠습니까?
불쌍한 예수님이셨죠. 저런 자를 왼팔 혹은 오른팔에 두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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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종교적으로 중요한 얘기를 한번 건드려볼까?
베드로는 돌대가리-고기잡는 어부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라 예수님이 가르쳐준 가르침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맨날 엉뚱한 질문이나 해쌌지요. 성경에 보면 답답한 얘기가 많이 나오죠.
예수님이 가르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가 거의 없죠?
믿음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확신 정도는 해야하는데 확신은 커녕, 늘 의심하고 또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앞에서, 날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는데,,, 베드로는 딱 잡아 떼고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죠.
우리도 그런 입장이라면 흔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잡혀가고 나니 제살길 찾기 급급하죠. 그런데 부인을 안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나중에서야 - 예수님이 환생을 하고 나서야 - 더욱 신앙이 깊어져서 큰 인물로 추앙을 받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금에라도 제대로 알아듣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네 몸이 성전이라고 죽어라고 가르쳐줘도, 교회만 크게 지어놓고 수천년 동안 흘러온 카톨릭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찌 알겠습니까?
교회에는 하느(나)님이 절대 없는 것 아시죠?
"아이고, 베드로야, 뻥까지마라~ 너는 나를 천번만번 부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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