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과 개인의 관계, 동성애.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괴리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있네요. 동성애를 보는 시각이란 논점입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역설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봐요.
다만 앞서서 타인에게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살펴보죠. 하나는 시비의 차원이고, 하나는 호오의 차원입니다. 각자는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그것을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강제성이 필요한 옳고 그름의 영역이죠. 규칙 내에서는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이 다르고, 어떤 것을 권장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양하게 빈번하게 깊이있게 행복을 체험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 교환이 다른 하나의 영역이에요.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은 언제나 조언자일 뿐이고, 듣는 사람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말아야죠. 
그와 별개로 이성적 결합을 긍정하는 것은 동의할 만한 이야깁니다. 나의 유전적 특성이 확산되는 것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고, 나의 부모님과 역사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기쁜 일이죠. 이렇게 이성 간 교제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로 상정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와 정의처럼 절대가치로 설정하면, 억압과 무질서와 같은 반대쪽은 없어져야 할 겁니다. 그런데 이성애의 반대는 뭘까요? 누군가 동성애를 떠올릴지 모르지만, 무관심이 정답에 가깝죠.
타인에 대한 무관심. 제가 정말 두려운 건 이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런데도 동성애를 힐난하는 건 비이성적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애는 위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적합한 행동양식인 것이고, 동성애는 그런 만족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을 선택한 것이고, 선천적이든 문화적이든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개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은 조언자에 불과합니다. 누군가가 행복을 느끼는 함수를 외부에서 정해주려는 건 건방진 자세입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계속하는 충고는 소음이고, 괴롭힘입니다. '니가 사랑할 사람을 골라줄게, 그게 진짜 행복의 길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권한을 넘어선 일입니다.
1) 시비의 문제가 아니므로 당신에게 타인의 행복을 재단할 권리는 없습니다.
2)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조언이라면 듣는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세요.
3) 말하더라도 이성애를 절대적 가치로 상정하면 안됩니다.


2. 제도에 대한 정의와 접근법, 혼인.

헌법 해석을 바탕으로 제도의 목적을 정립하자는 접근이 있습니다. 헌법적 가치를 준거로 삼는 것은 대단히 모범적이고, 한편으로 구체적입니다. 동성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쟁점인데요. 
우선 단호하게 말할게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인간 따위는 없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수단으로 보아왔다거나 봐야 한다는 말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그래왔다면, 고칠 일이고, 그래야 한다면 헛소립니다. 대한민국은 자체의 존립이 아니고, 구성원들의 기본권을 위해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양육은 인간의 행복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지원할 일이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존치를 위해 아이 키우라는 사고는 나에 대한 모욕으로 느낍니다. 국가의 보전을 위해 국민에게 권리를 줄지 말지의 선택권이 있다고 보는 자체가 건방진 태도입니다. 언제나 가치 판단의 원천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규칙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위에 다른 누구는 물론이고 국가도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고, 결혼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연인임을 강조합니다. 헌법이 나서서 감히 통념을 뒤엎으려는 건 주제 넘어요. 사람들 각자가 프러포즈에 대한 낭만이 있고,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핵심이 아니라고 구별하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행정에선 이런 이상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주장하신 분이 '행정적 체계가 동일한 성격의 국민집단을 최소 단위로 놓고 작동한다' 는 표현을 하신 바 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문제는 이성혼 동성혼 미혼자의 세 부류가 국민집단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는 거에요. 혼인제에 양육 의사만 확인하면 얼마든지 추가 구분은 가능해요. 그 속에서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기술적 보완을 하려는 법적 제안들이 사회 일부라도 아주 작은 목소리라도 나왔어야 앞뒤가 맞는 논리입니다. 인간 단위의 최소 분류가 겨우 세 갈래라는 것과 보충하려는 제도적 논의도 전혀 없다는 것은 이게 부실한 관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출산과 보육을 목표로 결혼제도가 설계되거나 작동할 의지가 없다는 게 훨씬 합리적인 접근이죠.
분명히 말하건대, 인정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혼인이 동반자와의 삶에 대한 축복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난 자녀를 축하하고 가족으로 살아가는 의지를 격려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직관적인 인식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까지가 수긍이 가는 해석이죠. 그러니 해결방향은 우리의 삶에서 결혼이 성적 결합이 아닌 헌신적 자세에 대한 기념임을 확인하고,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인지하지 못했던 더 다양한 형태의 책임감에 대해서 낯설음을 거부감으로 착각하지 말며, 인정하고 북돋아주도록 나아가야 마땅하다는 걸 알리는 것이죠.
1) 사람은 헌법과 국가의 수단이 될 수도 없고,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2) 혼인제의 역사 속에 이성적 결합과 자녀 양육이 자리했던 점은 분명하므로, 혼란을 해소하려면 의미를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3) 결혼은 두사람의 헌신적인 태도를 기념하는데 뜻을 두는 행위로, 다양한 형태의 책임감을 독려합시다.


3. 인간에 대한 태도, 일간베스트.

저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진보주의자가 되었는데, 왜 보수주의자를 미워하고 있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증오를 이끌어내는 마음의 흐름이 무섭고 겁이 났죠. 그리고, 어느샌가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면을 봤습니다. 
이성애에 대한 예찬을 근거로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려는 행동, 결혼부부의 양육에 긍정을 두고 동반자적 삶의 가치는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 남성에 대한 공감을 기초로 여성에 대한 비하를 이끌어내는 언어,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개인의 독립성은 무시하는 관념, 혹은 개인의 자율성을 토대로 국가의 존재 의미는 부정하는 태도. 각자가 가진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없이 표출하는 게 문제죠.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기에 무지한 개인들이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가치관의 복종이라는 폭력을 행사하고, 자녀들은 폭력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회에 나와서 성인이랍시고 타인에게 그 무기를 휘두르는 이 일련의 상황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애초에 자신의 관념으로 세상을 획일화하면 되는데, 내면의 성찰을 할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의 문제는 내면의 갈등을 정리하고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임을 선언해야 되요. 응축된 분노를 확산하고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상황이 핵심이라고 인정하면, 진보진영의 상태도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걸 보게 될 겁니다. 감흥에 맞는 혹은 먼저 접한 자료를 흡수해서 가치관을 만들고 이후에는 정보를 마음 따라 취사선택하는 태도가 핵심이지, 광주항쟁에 대한 시각, 보수성 따위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내부의 교집합은 못 본 척, 모르는 척, 없는 척하고 저 사람들을 소시오패스, 패배자, 정신이상자로 모는 건 진실이 아니에요. 자신 내면의 안도를 위해 현실을 재단하고 투사하려는 건방진 사고에 불과합니다. 저는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철저하지 못한 심리의 분출에 주목해요. 저 사람들이 하는 건 표현하는 방식을 모른 채 화를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탓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좌절로 이어지지 않고,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니, 어떤 면에서 차라리 다행이에요.
이 표현법에 대한 교정은 무조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어느 국회의원이 일베를 폐쇄해야 한다는 생각의 깊이가 안쓰러워요. 어쩌면 풍자나 모욕에 대한 기준을 엄격하게 두는 사회의 규칙을 상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으면 얼마든지 조롱할 전직 대통령들을 소유한 나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일베 사람들을 초청이라도 해서, 안 오면 찾아가기라도 해서 힘들어도 얼굴 맞닥뜨리고 이건 아니고 저건 저렇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이 제게서 떠나질 않습니다. 어느 멍청한 전직 대통령처럼 광주항쟁을 무시로 일관하는 건 다수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수라면 좀 여유롭게 저들을 설득하고 보다 자신감 있게 대화하면 반드시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기대일 겁니다. 상대가 아니라 내 편의 역량 때문이죠. 군부독재의 반공주의가 싫어서 민주주의와 진보주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많은 사람들처럼, 훨씬 덜하지만 역시 모자란 민주세력과 진보세력이 싫어서 반대편으로 가버린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자세를 이 상황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까요. 


4. 나의 내면, 단상.

불만은 언제나 약자의 언어다. 그래서 권력에 대한 조롱을 동반한다. 그런데 권력이 아니라 또 다른 약자를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멍청한 일이고, 비겁한 일이다. 잘못된 표출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고쳐줘야 한다. 왜인지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놓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다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 보고 싶다. 사회의 큰 변화는 늘 약자들의 분노가 결합해서 만들어왔다. 독립 운동이 그랬고, 4.19혁명이 있었고, 민주항쟁이 그렇다. 더나은 사회의 변화를 위해 그들과 함께 손깍지를 잇고 싶다. 사람들의 울분이 안타깝다.
나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사회의 진보를 믿지만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 내 언어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모두 당위가 아니라 바람이 된다. 이제 나는 사회의 모순부조리를 보면 들끓는 분노로 화가 날지언정, 소외에 안타까울지언정 다른 이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발 덜 디딘 사회를 살아가는 각자가 어설플 수 있는거니까. 그러니 내가 자신 있는 것은 언제나 비판에 대한 방어다, 비관에 대한 도전이다. 나의 가치관을 옳다고 말할 수 없으니, 남의 가치관에만 왈가왈부하는 게 아닐까 경계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표현보다 헌신적인 삶의 자세를 값지게 생각한다. 자기희생적 인생에 대한 존중은 마음 깊이 자리한다. 나의 세계관을 설명하려는 행동, 내뱉은 말에 책임지려는 태도, 신념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마음가짐, 가치관에 투신하는 일생에는 존경을 보낸다. 나는 세상이 더 풍요로우면 좋겠다. 더 자유로우면 좋겠다. 더 정의로우면 좋겠다. 더 평화로우면 좋겠다. 더 아름다우면 좋겠다. 더 지혜로우면 좋겠다. 이런 날,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그 날이 오면 나의 걱정 따위는 필요 없겠지. 
언젠가 다가올 세계에선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대는 너무 건방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