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기간 동안 스카이넷 담벼락으로 잠시 피난을 가 있었죠. 그 때 어찌하다보니 예기치 않게 동학농민혁명 성격 논쟁에 말려들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제가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박노자와 강준만의 관련 글을 보다 자세히 소개하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해당 글타래는 여기)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죠.
 오늘은 우선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2권 5장의 내용일부(
266쪽부터 279쪽)를 요약, 발췌해 올립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동학농민전쟁 이후 전통적 유교적 세계관 및 위정척사론적 관점에 근거해 <농민진압군> 측의 순절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다수 조성되었다. 특기할만한 예외로 "우리나라의 평민혁명"이라고 한 박은식의 평가가 있으나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 주류시각은 아니었다.

 1963년 박정희가 선거용으로 전북 정읍 덕천에 갑오동학혁명기념비를 세운 것을 필두로 평가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후 70년대 접어들면서 전혀 다른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난' -> '혁명' -> '운동' -> '농민혁명'의 과정을 거치는데 국정국사교과서의 기술형식은 1895년부터 1960년대까지를 1기,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2기로, 80년대 이후를 3기로 구분해 나눌 수 있다. 1기에서는 왕조질서 및 기존체제를 어지럽힌 비적의 소요로 인식했다. 2기에서는 (농민이 아닌) 동학교단을 주체로 보며 동학란에서 '동학혁명'으로 표기가 격상되었다. 80년대 이후인 3기에는 반란도 혁명도 아닌 '동학운동'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다 90년대 이르러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민중사관적 평가가 내려지게 된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요약생략)



 유영익의 주장

 유영익은 민주주의, 사회주의 및 민중주의의 원류로까지 평가하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이하 강준만이 전하는 유영익의 말.

 " 갑오농민봉기는 오히려 보수적 복고적인 민중운동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저자는 근래 남북한 학계에서 1894년 정봉준 등이 주도한 농민봉기를 '동학혁명', 혹은 '1894년 농민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진보적 민중운동으로 성격 지우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껴왔다. 솔직히 저자는 이러한 통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결론부터 앞세운다면 저자는 전봉준이 주도한 1984년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벌인 '무장개혁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대원군을 받는 새 정부를 세우려 했던 (좁은 의미의) '정치혁명'이었으며 제2차 봉기는 전봉준 등이 대원군과 협의하여 일으킨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본격적 '의병'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영익은 1894년 당시 농민군이 제작, 사용했던 구호, 격문 등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동학운동의 성격을 재구성하면서 "농민군이 내건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 구호에서 보듯 동학운동은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에 의거하여 일어난 보수적 애국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박노자-하원호의 논쟁

 박노자 역시 동학에 근대적 혁명성을 부여하려는 학계 일부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농민전쟁을 유교적 충군애국적 지향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하원호 : "혹시 농민전쟁을 전봉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유교적 근왕주의운동이라고 보는 어느 보수 학자의 말을 그대로 믿은 탓일까?  전봉준의 사고방식을 문제 삼는 그 학자에게 대다수 농민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 보이지 않았듯이 박노자도 마찬가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박노자 : "동학운동과 1894녀의 농민봉기의 연구에 유영익이 기여한 바를 순수 학술적인 차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각의 민중파 사학이 이미 서구화한 오늘날 우리들의 '혁명' 의식에 맞춰 100년 전 동학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뜯어고치고 자료 근거조차 미약한 동학의 '토지분작 요구'를 무리하게 강조하여 동학을 공산혁명처럼 묘사하는 것은 문제
 "'동학의 혁명화'는 서구 근대의 '혁명'을 준거틀로 한만큼 서구중심주의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하원호 : "박노자는 1940년 발행된 <동학사>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지영의 소설이라고 보고 그 내용을 전면부인하면서 전봉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농민전쟁 자체를 유교적 근왕주의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 <동학사>에 나오는 농민 요구사항 중 '평균분작'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분작'을 소유권의 균등분배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경작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박노자는 <동학사>를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를 택했기 때문에 당연히 '평균분작'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이미 농민전쟁 이전의 토지문제에 대한 수많은 자료가 있고 농민전쟁 연구자들의 주장도 사실은 이에 근거한 해석이다. 물론 한때 지나칠 정도로 근대적 의미에서 '평균분작'을 비롯한 농민전쟁의 지향을 해석하고 근대화 운동의 일부로 규정짓기도 했지만 현재의 연구는 이런 한계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동현의 주장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오지영 등 농민군 지도부는 개혁의 전범을 안에서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팎으로 유교적 전통질서를 다시  세우는 보수적 복고적 구국방안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또 하나의 외세 청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 으며 썩은 민씨 척족 정권 대신 대원권 정권을 다시 세우려 했다."

 " 전봉준이 남긴 기록을 비롯한 당대 문건들에서는 오히려 보수의 최고봉 대원군과의 밀약과 같은 복고와 보수의 목소리만이 넘쳐흐른다. 이런 점에서 봉기가 유교라는 전통 가치에 바탕한 보수적 의거 내지 무장개혁운동이었다는 '갑오농민봉기'론이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배항섭의 주장

 민중운동이 전근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붕괴를 촉진함으로써 그 사회의 근대를 진전시키는 역할 등을 하였으나 민중운동 자체가 근대사회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연구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계급환원론 또는 경제구조환원론적인 시각이며, 민중이 가진 독자성과 운동에 내재한 고유한 리듬을 분석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또한 전봉준의 생각이 농민군 대중 모두의 생각일 수 없다. 어떤 점에서 민족위기를 외면하고 계급적 모순에 입각해 사적인 분풀이를 한 농민군 대중들의 의식세계야말로 더 민중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농민전쟁을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 의거였다는 견해도 '영웅주의적' 이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김용옥의 주장

 '갑오농민전쟁'이란 개념은 '동학란' 못지않게 '잘못된 개념'으로 북한 학자들의 유물사관에 의하여 날조한 개념을 무반성적으로 차용한 결과 생겨난 개념일 뿐이다.

 동학혁명은 농민전쟁이 아니라 신분이나 직업이나 계급으로 규정키 어려운 다중일 뿐이다. 북한학자들이 굳이 '농민'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 혁명의 참여자들을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의 혁명역랑을 아직 갖지 못한 봉건질서 속의 농민으로 규정해야만 직선적 발전사관과 후대의 공산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봉건사회가 아니었음에도 봉이라 하고 농민이라 해서 낙후할 것이 없었는데도 낙후하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역사인식이다.

 (김용옥의 한국사관에 관해서는 2004년 한겨레와 가진 아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할 것. 제가 거의 전적으로 찬성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01/0090000002004010820073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