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성 연애의 경우
 
동성애에 관한 찬성 쪽 논의를 살펴 보면, 아크로에서는 크게 비중 있게 다뤄진 것 같지 않지만, <동성애는 선천적이다> 라는 논거가 자주, 그리고 비중 있게 원용되는 것을 알수 있다. 사실 동성애가 선천적이다라는 논거만큼 동성애 옹호에 강력하게 동원되는 것도 드물다. 왜 그러한가?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이 자신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면, 한 사회에서 자신의 운명을 숨기거나 억압 받은 채 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만큼 고통 스러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개인 각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도덕적인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이념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된다. 더더군다나 어떤 사람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념에 따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생물학적, 유전학적 '병'이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근거없는 딱지 붙이기요, 마녀 사냥이자 인신공격이 된다. 요컨대,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라면,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논거는 동성애자에 관한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것이고, 근거 없는 궤변이며, 배격해야 마땅한 주장이 된다. 

 그럼 동성애가 후천적인 것이라면 어떠한가? 이 경우에도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해서는 안되는가? 주변에 동성애자들 만나거나 경험한 경우는 다양하게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동성애는 선천적이라는 주장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후천적인 동성애를 했던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동호회에서 책읽기 모임을 할 때의 일이었는데, 그 모임에서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이 강한 여성 지인 둘이 있었다. 그 중 한 친구는 전에 사귀던 남친에게 당했던 폭력 때문에 좀 급진화된 페미니스트가 된 상태였고, 다른 한 친구도 남친과의 불화 때문에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을 가진 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둘은 이 모임에서 처음 만나게 됐지만, 금새 의기 투합했고, 모임 이외에도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후 시간이 조금 흘러서 모임은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와해 되었고, 한 일년 쯤 후엔가..나는 이대 앞에서 두 친구가 손을 붙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걸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그 친구들이 서로 사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던 제 3자를 통해 우연치 않게 약간의 내막을 곁들여 알게 된 사실은..그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계기였다...둘이 여느 때처럼 수다를 떨며 서로 술자리에서 밤늦게 까지 어울리다가...장난 스럽게 키스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그 키스의 느낌이 둘이 서로 놀랄 정도로 좋았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 둘에게 동성애의 성향이 내재해 있었을까?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둘은 그 연애의 시작 이전에 이성애를 충분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그 두 사람의 경우는 동성애의 시작은 필연이었다가 보다는 돌발적인 우연에 가까왔다고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어떤 연애 관계든 그것이 사전의 풍부한 감정적인 교류를 이미 전제로 하는 (성)관계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러한 식의 감정의 전개는 별로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뭐 별거인가? 깊은 감정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고, 타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친근하게 대하고, 그러다가 타인의 마음 뿐 아니라 자신의 애정이 전이된 타인의 신체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만지고, 애무하고, 서로의 육체까지 탐닉하게 되는 과정.. 이것이 결국 사랑의 알파이자 오메가 아니겠는가?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강하게 존재했던 동성간이라는 금기의 벽을 우연한 기회에 넘어버린 -- 아마도 남성들에게 받은 서로의 상처까지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좀 더 쉬웠을 - 경우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하게 흘려 듣게 된 것은, 그 중 한 친구의 결혼 소식- 물론 그 당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이었으니, 그 두 사람의 연애는 둘만의 추억으로 남았었으리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의 여자친구, 혹은 배우자가 그 이전에 동성 연애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리고 다시 남성인 나와 사귐으로서 양성애자가 되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적인 취향 때문에 그 친구들의 양성애적인 애정행로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을 가할 수도 없고 가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한가?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행복을 결정하는 자유의 원칙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결정을 스스로 자유롭게 행사한다는 것- 그것이 비록 관습적인 사고에 반한다고 할지라도 - 이것은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성애에 대하여 -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 사회에게 - 더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에 관한 혐오감을 가진 다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관용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자유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설사 장래의 과학에 의해 동성애자들에게 유전적인 '결함' 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들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변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선천적인 성향을 스스로 인지하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어떤 계기에 의해 동성 친구와 친구 관계 이상의 육체적인 결합을 하기로 결심한다고 할 때, 그들의 병적인 유전적인 성향이 그들의 자유로운 결심을 산출하는 의지보다 충분히 우세한지는 과학적으로 판정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 동성 결혼의 경우

 동성 연애의 경우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자유의 원칙 하나 만으로 도덕적인 정당화가 충분히 가능한데 반해, 법적, 사회적 제도로서의 동성 결혼의 경우는 사정이 훨씬 복잡하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부 일처제- 남녀 한 명이 각각 만나 한 쌍을 지어 평생 같이 사는 종신 합의를 하는 방식- 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제도인가? 일부 일처제야말로 한 편으로는 극히 자연스럽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제도 아닌가?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매춘이나 우리 나라의 유흥가, 룸싸롱들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성적인 존재로서 인간 즉, 성적인 존재로서의 남성, 여성에게 일부 일처제만큼 본능을 억누르는 제도가 어디에 있을까? 이성의 순수한 성적인 매력이 평균적으로 최대 2년을 간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젊을 한 때 만난 한 사람에게만 평생의 성적인 교류를 해야 하고 또 그 상대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적인 본능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상대적 소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성인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강한 족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일부일처제로 기꺼이 들어가고, 그것에 내포된 강한 억압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 아이러니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일부 일처제는 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억압이지만,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그리고 아마도 양육 받는 아기의 입장에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즘에는 입양을 하는 가정도 늘고 있고 또 입양 가정에서 잘 자라는 아이들도 물론 많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혈육에 관해 인간이 가지는 애정만큼 자연적으로 강한 것이 있을까? 해마다 버려지는 아이들 중 태반이 결혼 제도를 통해 만들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일부 일처제도의 안정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즉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물질적, 경제적인 기반이 갖춰져 있고, 부모 당사자들의 정서적인 결합이 비교적 안정적- 덧붙여, 결혼 제도 자체에서 커플들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덤으로 하고- 일 경우, 그들 스스로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나온 아이가 버려질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부일처제가 야누스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즉, 일부일처제가 성적인 본능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강력한 억압이지만, 부모된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자녀 생산, 양육과 교육에 관한한 가장 안정적이고, '자연적인'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일부일처제가 이슬람권을 제외한 다수의 현대 국가들의 법 시스템에 의해서 유일하게 지지되고 유지되 온 핵심적인 사유가 아닐까? 
 
 우리가 보통 동성 결혼을 말하면서,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성애자들에 의한 동성애자 차별이다' 라고 주장할 때, 흔히 간과되는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결혼 제도를 통해 얻는 것은 보통 1) 개인의 애정 관계에 관한 국가의 상징적인 승인이라는 측면과, 2) 결혼 제도를 통해 얻게 되는 각종 사회, 경제적, 세제상의 혜택 - 이혼시 여성이 누리는 재산 분할권은 사회 통념상, 그 혜택 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있는데,  첫째, 1)에 관한 차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한 국가가 개인의 애정 관계를 사회적으로 승인해 줄 법적, 도덕적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정작 일부 일처제라는 특수한 형태의 결혼 제도를 국가가 승인하고 장려하는 이유는, 개인의 애정의 자유, 행복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해 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형태의 개인의 자유 -즉 본능 실현과 성적 접촉의 다양성의 자유- 를 어느 정도 강하게 억압함으로써만 사회 구성원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양육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가 대립하는 지점을 엿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일부일처제의 정당화 근거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할 때, 개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지를 위한 사회적인 계획자, 입법자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실제적인 대립점이 좀 더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산아 제한 조치 같은 얼핏 보기에 네거티브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족 정책도 결국은 입법자가 결혼 제도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운영하는 중요한 정책적 도구로 보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둘째, 2) 에 관한 차별에 관해 말하는 경우, 이 경우 차별은 절대적인 차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의 차별이 된다. 왜냐하면 일부 일처제는 자신의 성 본능을 일정 부분 억압하고 부모된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한 굴레이며, 여기에 대한 반대 급부로 일부 일처제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경제적인 혜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일처제 안에서 자녀를 일부러 낳지 않고 살아가는 예외족들도 있긴 하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족들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적인 경우' 처럼 되는 경우, 바로 그 때가 바로 일부 일처제가 심각한 존립의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입법자가 행동을 개시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요컨대, 어떤 집단에 돌아가는 혜택을 타 집단이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타집단에 대한 차별이 무조건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3. 반론

 이쯤에서 나오게 되는 반론이 바로 이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손 생산, 양육 시스템의 굴레에 스스로 들어가겠다는 것이 동성 결혼 지지자들의 논거 아닌가?>, 그럼으로써 <성적인 접촉의 다양성을 포기하고 평생 한 남성의 남자, 혹은 한 여성의 여자로서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하나는 입양이나 시험관 아기를 통해 동성 부부에게도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경우, 과연 아기들의 애정 성향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부모의 성별이 아기들의 성적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애자들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동성애자들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아기의 성적 정체성의 형성을 결정하는 요인 중 유전자적인 요인 이외에 사회적, 문화적인 요인- 특히 아기들의 성장 과정에 롤 모델로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성역할 - 을 배제할 수 있는 필요 충분한 합리적인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이 질문은 언제나 동성 부부의 입양권, 양육권에 회의적인 방향으로 열려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개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아니라 결혼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 공리주의적 입법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성애 관계에 익숙하지 않고 오히려 동성애를 선호하는 신생아들이 계속 만들어 질 수 있다고 하는 상황은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4.  마지막 질문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논의들이 궁극적으로 귀착하는 점은 한 가지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앞으로도 우리가 지금 형태의 일부 일처제를 계속 유지할 필요와 이유가 있는가? 남성과 여성이 일대일로만 만나서, 젊은 시절의 단 한 번의 합의로 종신의 성적인 충실성의 맹세와 무한 자녀 교육의 합의를 맺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과연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의 전체, 혹은 다수의 행복을 잘 보장해 주는 시스템인가? 지금 현재 형태로 우리 나라 사회에 존재하는 일부 일처제라는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며, 일부일처제 자체가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 질문은 더 현실성이 있어진다. 밑에서 어떤 분도 지적했지만, 미국의 경우를 봐도 일부 일처제라는 것- 특히 단 한 번의 혼인 의사의 합의로 당사자의 평생을 옮아매는 시스템은 - 문화적으로도 결코 보편적인 형태의 일부 일처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결혼을 만들어 내는 젊은 남녀의 한 번의 합의가 당사자의 평생을 구속한다는 관념은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관념이며, 기독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문화와 언제나 갈등/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로마법이 인정했던 일부 일처제 하에서는 합의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결정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부부 일방은 언제든지 그 합의를 철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혼 역시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왔다. 

 동성 결혼 제도에 관한 논의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관습적인 합의로 존재하는 일부 일처제의 관념에 지속적인 균열을 내고 있다. 만약에 공리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의 원칙로부터 결혼 제도를 재구성하고자 하면, - 즉 개인의 자유 원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당사자간 합의의 의해 결혼의 형식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동성 결혼 제도를 비토할 이유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된다. 결혼 제도는 현재처럼 꼭 1대 1의 남: 녀 비율로 구성될 필요는 없다. 동성 결혼처럼 1대 1의 남성 대 남성, 여성 대 여성의 조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 논리는 확대 적용된다. 결혼 제도가 반드시 남녀의 결합이 될 이유는 없는 것처럼, 결혼 제도가 꼭 1 대 1의 결합이 될 필요는 없다. 일처 다부, 혹은 다처 일부 같은 일 대 다의 결혼 형식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다 대 다, 즉 3명, 혹은 4명의 성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혼음 관계의 결혼 형식 역시 자유롭게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혼인' 이라는 용어 외에  민법전 가족법 편에 '시민 결합' 이라는 다소 생소한 신조어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글루미 썬데이' 에 나오는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의 동시적인 삼자 연애 관계처럼, 우리의 후대의 자손들은 우리보다 훨씬 해방된 성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즐기고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별로 우울해 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현재의 결혼 제도가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맹목적인 관념에 의해 지탱된 것이라는 사실만 상기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