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iskop 홈지기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퍼옵니다. 최근 일고 있는 다양한 연대논의에 또다른 층위의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원글링크) 더불어 인터넷에 올리는 글을 통해서도 사회에 어떤식으로 진지한 접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 또한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 사회자팀.


어느덧 2009년도 열흘 남짓 남았다. 그래서일까, 2010년 선거철이 다가오는 징후인지 선거판 짜기가 슬슬 세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듯하다. 홈지기는 아직도 밀린 원고 젖히기에 바빠서 블로고스피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주시하지 못했는데, 이웃 동료A 군의 글을 보고서야 최근 이슈1들 을 접하게 되었다. 역시나 민주당 지지자부터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민노당 지지자에 이르기까지 소위 개혁-진보세력에서는 반 한나라당 판짜기를 두고 해묵은 말들 참 많이 오가고 있다. 누굴 참여시키고 누굴 배제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노라니, 민주화 이후 몇 차례의 대선, 총선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남은 교훈이 이리도 없는지 얕은 한탄부터 나온다.

지난 십 수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DJP 연합으로 명실상부한 민주세력의 집권을 달성한지 10년, 그리고 이제 다시 MB 정부가 등장한 2년 동안의 격랑을 헤치고 남은 것이라고는 막연한 선거연대의 꼼수 뿐인가. 민주세력의 연대,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고 멋져 보이는 이야기이다. 허나 탄탄한 뿌리 없이 엮어낸 연대가 얼마나 서로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어왔는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진보세력들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쏟아내는 배신감이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이념과 지향점 및 정책 수준의 진중한 공감은 이뤄내지 못한 채 표 갈라먹기부터 신경 쓴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런 무의미한 반복을 왜 거듭해야 하는가. 어차피 지리멸렬해진 개혁-진보세력이라면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더 낮고 미세한 수준의 연대와 통합부터 고민할 차례이다. 즉 정치적 정파의 연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연대를 뒷받침할 브레인과 정책지식을 키우고 이들부터 교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두 전직 대통령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홈지기가 한창 다른 일에 바빴던 지난 8월, 언론 지상에서 접했던 칼럼들 가운데 특히 공감했던 두 글이 있었다.

첫번째 칼럼을 쓴 분은 한겨레경제연구소(HERI) 이원재 소장이시다. 이분과는 한 해 남짓동안 같은 직장에서 몸담은 인연도 있고 해서 이 글에 담긴 뜻이 더욱 절절히 느껴진다. 이 소장은 경력도 특이해서 한겨레신문 경제부 기자→MIT Sloan MBASERI 수석연구원→HERI 소장의 길을 밟았다. 순전히 진영논리로만 보자면 좌우를 넘나드는 경력을 쌓았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한국사회 각 진영이 갖는 한계가 무엇인지 직접 목도하고 꽤나 고민해왔음을 홈지기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이 소장은 칼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 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위기가 닥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등졌다.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일까?

불편하지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 진실 하나.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손쉽게 그들[두 전직 대통령]에게 아웃소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역시 하청 받은 가치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술과 조직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당과 사회에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낼 진보적 싱크탱크가 없었다. 결국 기업연구소와 국책연구소에서 지식을 빌렸다. 수십 년 동안 그 반대의 가치를 구체화하는 데 골몰했던 그런 싱크탱크에 기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 두 대통령에게 ‘갑’의 행세를 시작했었다. 그 정부가 현실과 타협하는 찰나, 그들을 거칠게 비판했다. 마치 품질이나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하청업체를 다루듯 말이다. 두 대통령 역시, 제대로 된 연구소조차 갖지 못한 개인사업자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홈지기도 계속 이 글에서 언급하는 ‘기업연구소’에 근무하며 이런저런 모습을 봐온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정당과 사회진영은 여기저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지식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존재들은 지극히 미약하다. 개혁진보진영의 싱크탱크들은 지난 번 오마이뉴스의 기획기사에 서도 나왔듯이 대부분 아주 영세하다. 그렇다고 싱크탱크의 기능을 달리 대체할 수 있을까. 교수의 발탁도 문제가 많긴 마찬가지이다. 교수 분들은 이상향을 제시하고 학술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능하나, 더 구체적인 수준의 정책지식과 정책안을 내놓는 데는 익숙치 않은 분들이 상당수이다. 참여정부에서도 여러 교수 분들이 가히 왕따를 당하고 점점 밀려난 것을 보지 못했는가. 경방고수 식으로 민간의 현인을 덜컥 모시면 되리라는 희망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이다. 독고다이로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실의 실행조직을 통솔할 리더십과 감각보다는 냉소와 나르시즘의 그늘이 너무 짙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개인플레이로 탄탄한 조직력을 이겨내기란 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니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앞에서 질러놓은 거대담론을 구체화할 정책지식은 사후에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의 역량을 빌릴 수밖에 없다. 물론 국책연구소와 기업연구소가 지식생산자로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소들은 나름 투철한 ‘고객만족’의 마음가짐 — 컨설턴트라면 무슨 의미인지 잘 아실 것이다 — 으로 접근하는데 능란하다. 보완적인 정책지식 생산자로 잘 활용할 여지도 많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전 정책지식이 빈약한 정권은 이를 보완적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뒤늦게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거꾸로 휘둘려가기 쉽다. 거기에 대통령의 의중, 정치구도의 변화까지 겹치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로 인해 나오는 결과물들은 누더기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결국 이상과 열정이 가득했던 정치세력과 지지자들에게는 실망과 상처만 남을 뿐이다. 한쪽에서는 비열한 타협자란 소리가, 한쪽에서는 현실에 담을 쌓은 몽상가란 소리가 난무한다. 이는 어느 진영이건 사람들의 관심은 그저 막연한 가치와 이를 실현해줄 대리인으로서의 대통령에 지나치게 쏠려있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각자의 목소리를 강고히 만들어줄, 체계적인 팀플레이를 하는 싱크탱크를 경시하고 있음에서 비롯되는 데도.

두번째 강준만 교수의 칼럼은 그래서 정곡을 찌르고 있다. 막연한 反MB, 反신자유주의 등에 목매며 분노하는 것은 그저 무력한 투쟁의 반복일 뿐이다. 상대 정당을 그저 적들의 집합체로, 우리 정당은 적들을 깨부술 투사들의 집합체로 보는 反정치적인 열정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 속에서 세심하게 미래의 가치를 고민하고 지식과 여론을 끌어 모으는 정치인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그저 소모적인 투사로서의 정치인 이미지만 소비해대는 풍토만 활개를 친다. 여기에 변화가 없는 한, 개혁세력이건 진보세력이건 미래는 뻔한 것이다. 설령 삽질의 반작용으로 운 좋게 다시 집권을 한다 해도 또 어떤 개인사업자는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눈물을 머금고 파산하리라. 한국의 지식생산 및 소비구조에서 밑바닥까지 건드릴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없이 정권 잡겠다고 손을 잡았다 서로의 불신만 깊어지는 얕은 수는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

개혁-진보세력은 지식생태계부터 연대하라

따라서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발전이 이뤄지려면 이제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가시적인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올해 오마이뉴스에서 다뤘던 진보싱크탱크 특별기획은 분노하는 시민들의 눈길에서 동떨어진 곳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이런 싱크탱크들이 자꾸 식자들의 조망을 받고 누가 보더라도 품질 좋고 현실성이 있는 정책지식들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그 결과물이 자꾸 알려져야 한다. 기획 취지에서도 나왔듯이 그래야 ‘대안 없는 진보’라는 억울한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무엇보다 이런 개혁-진보세력의 작은 싱크탱크들부터 연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표를 두고서 유권자를 농락하는 마음에도 없는 연대에만 신경 쓰지 말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은 싱크탱크들이 뜻을 모아 공동연구도 해보면서 세부 정책 수준에서 다양한 대안부터 착실히 쌓아가야 한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공동연구를 해볼 재원도 부족하다면 최소한 개혁-진보세력의 공동 정책지식 발신 포탈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싱크탱크들마다 언론 노출 정도는 빈약하고, 각 홈페이지 방문자, 보고서 열람자도 한 줌인 상황에서는 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매번 몇몇 명망가, 대표논객이 쏟아내는 카타르시스성 글만 쫓아다니며 열광하는 게릴라전만 하고 있을 것인가. 개혁진보가 집권하려면 최소한 상상력이라도 상대를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즉흥적으로 의사표현하고 전투적 댓글로 소모하는 게시판은 지양하고, 한층 세련된 의제를 꾸준히 만들고 대안을 체계적으로 축적하는 공간은 그저 꿈일 뿐인가. 수많은 의견 발신매체, 사회연결망 서비스들의 기술적 진보에만 열광하지 말고 이들을 엮어 진정한 개혁-진보세력의 지식생태계 연대로 구체화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인가. 진정성도 없는 反한나라당 연대를 둘러싼 감정싸움은 접어두고 이런 준비과정에 기성 정치인들과 시민사회, 일반 누리꾼들이 더 많은 노력을 모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어느 날 서로가 더욱 차갑게 현실을 직시한 정치적 연대를 구성하길 바란다.

글을 맺기 전에 이원재 소장의 컬럼 마지막 부분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 남겼다는 두 부분을 오버랩시켜 다시금 상기해본다.

역사의 발전을 위해 그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개혁한다는 것은 대통령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판이 잘 짜여져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줄 수 있는 국민적 요구가 있고 그런 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주변 상황이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역사의 큰 진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대통령을 뽑아놓고 그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결과에 실망하게 됩니다. 실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 노무현 (2009). 『성공과 좌절』. 서울: 학고재.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은, 사람과 가치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 있었느냐에 있다. 진보든 시장만능주의든 가치가 먼저 있고, 그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독립적 싱크탱크가 있고, 그리고 레이건과 오바마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개혁적인 한국 대통령이 외롭지 않으려면,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를 넘어설 수 있는 규모 있는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충분히 대중적이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구체적 정책대안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 이원재 (2009. 8. 20.). "두 전직 대통령이 외로웠던 이유". 한겨레신문.

솔직히 홈지기는 어찌 보면 개혁진보진영의 싱크탱크들과는 대척점에서 일하고 있다. 홈지기는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현재 몸 담고 있는 조직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존재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국 사회가 발전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달리 돕지는 못해도 조금이나마 저런 민간 싱크탱크들에게 기부는 하고 있다. 그들이 홈지기의 목소리와 오롯이 가깝지 않더라도 그게 궁극적으로 ‘열정의 제도화’의 한 방편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한 구차한 진영논리를 떠나 한 사회가 쌓는 다양한 무형의 자산은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소중한 존재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 점을 많은 분들이 인식하고 노력을 보탰으면, 그래서 각자의 입지에서 ‘열정의 제도화’에 조금씩 더 다가갔으면 한다.

Notes.
  1. 대표적으로 얼음집에서 벌어진 최근 갑론을박에 대해서는 다음 두 글의 링크를 참고 바란다:
    이글루스 좌빨 VS 노빠 대전 PART 1, PART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