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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면, 민주 진보 진영의 선수들이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 너무나 미시적이고 감성적이다. 시대에 대한 통찰도 없고 미래에 대한 직관도 없다. 툭하면 실언에 반박당할 것들이다. 복잡 다단한 사회를 하나의 체제로 뭉뚱그려버리며 독재에 항거하던 80년대에나 통할 인습적인 관행으로 감성에만 호소한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각자의 이해관계는 그 하나의 체제론 속에 다 포함될 수가 없는데 그들 모두가 어떻게 단일한 체제론에 입각한 민주진보 진영의 선수들을 응원해줄 수 있겠나? 

단적인 예로 전통시장 상인 보호 정책을 보자. 시장상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형마트를 규제하면 시장상인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대형마트 바로 아래단계의 중대형마트 사업자가 이득을 본다. 그래서 중대형마트 사업자까지도 규제하면 또 그 아래아래 단계의 중형마트 사업자가 이득을 보고 중형마트 사업자들까지 규제해야할 상황을 맞게 된다. 

이렇게 스팩트럼처럼 수많은 층위의 이해관계가 발생된 2000년대의 상황에서 섣부른 개입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계속적인 규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결과적으로 시장상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상상인 바로 윗 단계까지 그 많은 단계의 이해관계인을 규제하게 될 때 사회전체적인 기회비용, 손실은 명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문제는 사람이다. 가진 자는 악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선이라고 일단 선동하면 진보인지 반동인지 상관하지 않고 어쨋든 변화의 동력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80년대에나 통할 일이다. 이미 가지지 못한 자들은 하나의 체제, 하나의 균질한 집단 속에 포함될 수 없을 정도로 분화되었고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대형마트를 규제하면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본다. 이들은 시장상인들 보다 더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 다수의 집단이다. 애초의 명분은 아예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다. 시장상인을 왜 보호하는가? 

민주진보진영의 선수들은 FTA를 반대하고 기업의 구조조정제도 자체를 없애느라 오늘도 감성에 호소하고 있지만 민주진보 진영의 선수들을 응원해야할 사람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FTA를 필요로 하는 가진자들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선수들의 형제자매와 사촌과 친구들이 하나 건너 한 명씩 선수들이 적으로 보는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가 해체 될 때 그들의 생존 기반도 무너진다. 

적과 아군의 경계가 없어진 것이다. 이로써 민주진보진영의 선수들이 기대고 있던 '진보와 가지지 못한자는 선이고 보수와 가진자는 악'이라는 인식과 구호만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을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난 총선 대선에서 민주진보진영은 이 아선피악(我善彼惡)의 이분법적 인식으로 경기를 치뤘으니 패배가 당연했다. 패배가 당연한데 왜 멘붕을 느끼나?

그러고 보면 80년대는 참 편했다. 적과 아군이 분명했다. 형제자매와 친구와 사촌이 모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민주화와 독재타도라는 외마디 고함만으로도 사회를 변혁시킬 힘을 만들어냈다. 감성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성을 고양시킬 수록 사회를 변혁시킬 힘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복잡 다단해졌다.

80년대 민주화 이후 민주진보진영은 방향성을 잃었다. 그들은 팩트를 외면한다. 그래서 그들의 예언·예측은 들어맞는 것이 없다. 예언·예측력이 결여된 정치세력은 무능한 것을 넘어서 위험하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정의롭기 때문에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수우파진영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 사회의 절반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민주진보진영의 오직 자신만 정의롭다는 믿음은 벌써부터 허구다. 

그들은 먹고사니즘, 대중들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양산된 물적 기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착오적이고 현실적합성이 결여된 체제론에 누가 옳다고 할 것인가? 1대99의 억압 지배 사회라는 것은 허구다. 1대 99의 사회가 허구라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증명됐다. 억압받는 99는 그 안에서 또 1대 98의 억압관계, 또 그 98의 안에서 1대 97의 억압관계... 최하위 2%안에서 1대 1의 억압관계까지 있다. 모든 억압받는 사람은 한 편으로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 홀로 정의롭거나 오로지 정의롭기만 한 사람들의 사회는 이제는 없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더 가난한 사람은 더 더 가난한 사람을 멸시한다.  

민주진보진영은 이렇게 복잡 다단한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을 외면하면서 대중들이 자기를 지지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대중들이 수준이 낮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정의로움에 혼자 도취되어 있다. 이러한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대중의 심판이 한나라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이다. '일베'라는 극우 사이버괴물집단은 다른 면에서 보면 민주진보진영의 무능과 독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을 비난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민주진보진영이 반성하고 방향성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서는 극우괴물집단은 더욱 기세를 올릴 뿐이다. 


보수우파진영은 또 어떤가? 단적으로 윤창중사건에서 진짜 보수우파라면 나라 망신을 준 윤창중 사건은 보수우파가 절대 용납할 수 없고 보수우파가 가장 먼저 앞서서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미 많은 정황이 윤창중의 유죄를 증명하고 있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수 많은 정황과 전문이 쌓이면 유죄를 단정하지는 못할망정 의심은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윤창중을 꾸짖고 미국으로 가서 무죄를 증명하라고 해야할 것인데 보수우파진영은 끝까지 윤창중을 두둔한다. 

변모라는 자는 오히려 윤창중을 의로운 사람으로 추켜세우며 피해자 코스프레에 정신이 팔렸다. 급기야 보수우파진영은 윤창중을 북한과 결탁한 전라도사람들의 계략에 희생된 억울한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대(나라와 박근혜)를 위해 소(윤창중의 명예)를 희생해 성추행폭행범이라는 누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정신이상이다. 그토록 윤창중의 결백을 확신한다면 미국에 가서 수사를 받아서 박근혜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피해자 코스프레를 왜 하는가? 보수우파진영은 틱장애 환자들로 넘쳐난다. 툭하면 '전라도의 뒤통수'요 이해안되면 무조건 '북한소행'이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내뱉는다. 

보수우파가 사회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집단 속에 있는 개인을 상정하고, 모든 집단구성원의 안전과 발전이 개인의 안전과 발전에 의해 견인될 것이라고 그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발전을 허락하는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이 믿음을 실천하여 특정한 개인과 기업에게 우선 발생한 이익을 소수자 약자를 비롯한 모든 개인에게 다시 나눠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우파가가 드물어 이러한 보수우파의 정당성에 대한 소박한 믿음은 배신당하기 일쑤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의 자본주의 사회는 대량생산, 대량분배 구조를 유지하고 보수우파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이윤을 독점적으로 확대하려한다. 

어떤 자유주의자는 독일 유럽의 사회국가주의에 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가 침묵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이에크가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고통받고 억압받는 대중 개인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리 효율성과 자생적의지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당장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생존의 위기에서 자유주의가 조금 양보를 하며 사회국가주의로 효율성을 잠정적으로 유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자세다.  자유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라는 말의 뜻은 모든 권위주의적인 것(autoritarianism)에 대한 저항이다. 그 권위주의적인 것들은 대부분 집단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집단이 아닌 이념에서도 권위주의적인 것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념에서의 권위주의와 결탁하는 자유주의는 이미 자가당착이다.  자유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주진보 진영을 비판하고 보수우파 진영을 비판하면 되돌아 오는 비난이 '양비론자'다. 비겁한 양비론자라는 것이다. 오프라인의 선후배들은 내가 이렇게 두쪽 모두를 비판하니 양비론자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절교 절연을 한다. 나로서는 양쪽 다 잘못하고 있는 게 보여서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일반화의 오류라고도 할 수 없다. 진보좌파의 잘못을 묵인하는 진보좌파, 보수우파의 잘못을 묵인하는 보수우파는 일반화로 묶여도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사실은 이것은, 나는, 양비론(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양비론은 원래 兩非論이다. 그러나 나는 양쪽 모두를 비판했다. 비판은 批判이다. 非와 批는 다르다. 나는 兩批論者인 것이지 兩非論者가 아니다. 비판 없이 양쪽을 다 싸잡아 비난할 때 양비론(兩非論)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양쪽을 다 비판했다. 보수우파건 진보우파건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하는데 무슨 양비론(兩非論)이 되는가?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는 이런 양비론자(兩批論者)가 없어서 문제가 아닌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상대로부터 신뢰을 받지 못한다. 신뢰가 없으니 소통이 되지 않고 사회는 통합 동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브레이크도 없이 서로 극단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