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 경제학의 맑스 버젼에서 정치 철학과 경제학, 가치 판단과 현상 기술, 있어야 하는 세계와 있는 세계를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다라고 비판을 가할 때, 이들이 두는 혐의란, 결국 마르크스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론을 도구화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맑스가 <가격과 다른, 궁극의 교환 척도로서의 모든 상품의 가치적인 실체는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있다>는 식으로 노동 가치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있어야만 할 세계> 로 부터 <있는 세계>를 증명한다는 오류다. 

(이 비판이 담고 있는 오해에 대해서는 필자가 직전에 링크한 글 참고.) 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가장 커지는 때는 맑스주의자들이 바로 착취라고 하는 현상을 정치 경제학적인 범주로 재구성할 때인데, 예컨대, <자본가의 이윤 창출분은 전적으로 노동자들이 만들어 내는 잉여가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을 창출하는 순간 그는 정의적으로 by definition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할 때이다. 이는 생산 관계라는 범주 안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마치 자동 기계 안에서 서로 상호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주체들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일방이 타방을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관계로서 미리 선험적(a priori)으로 가정될 때 일어난다.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적용시켜보면, 예컨대 갑이 그동안 모아둔 종짓돈울 모아서 조그만 회사를 설립하고, 몇몇 근로자들을 모아서 소규모의 생산라인을 돌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래서 조금의 이윤이라고 뽑아 내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마치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미리 정의된 관계, 즉, 그 노동자들이 가져가야 할 정당한 몫을 수탈하는 착취자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여러 착취 현상들은 경험적인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닌, 선험적으로 미리 모든 가치 판단이 끝난, 한마디로 말해 폐기되어야 할 어떤 복잡 거대한 메카니즘의 필연적 결과이며, 인위적으로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식의 이해 방식은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곧장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라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나쁘니까, 폐기 되어야 만해, 자본주의가 왜 나쁘냐고? 자본주의가 착취를 불러오니까. 자본주의가 왜 착취를 불러오냐고? 생산주체들이 그런 착취를 불러 오게 하는 구조 속에 살 수 밖에 없으니까. 왜 그런 구조 속에 살 수 밖에 없냐고?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니까! > 대강 이런 돌고 도는 순환 논리가 된다. 아마도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으면서 이런 식의 해석을 해오신 분들이 은연중 꽤 있으리라 생각되고, 맑스 경제학에 대한 혐의의 많은 부분도 이것이 차지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2. 잉여가치의 전유와 착취의 개념적 혼동: 오해의 원천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맑스 자본론을 접한지가 이제 꽤 오래되어 놔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자본론에는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해석이 자본론의 유일한 해석이라고 하면, 자본론이 가진 경제 사상으로서의 매력은 훨씬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가 이미 생산 관계라는 범주 속에 구조적으로, 선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면, 여러 의문점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자본가가 이윤을 낼 때 무조건 노동 계급을 착취할 수 밖에 없다면, 자본가가 이윤을 내지 않을 때는 어떠한가? 현실 세계에서는 당장 적자를 내지만 공장을 굴리는 무수히 많은 수의 기업이 존재한다. 이런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는 것인가? 이 경우에 기업들은 마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노동자들이 가져가야 할 정당한 몫을 보전해 주고 있는 이타적인 행위자들인가? 그렇다면 이런 이타적인 행위자들인 기업들이 이익을 내기 시작하자마자 냉혹한 착취자로 돌변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맑스주의 경제학의 착취가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한 상품의 가격= (1) 기계 등 시설 자본(맑스가 '죽어 있는 노동' 이라고 부르는 것) 의 가격(혹은 운영 비용) + (2) 임금 (즉 '살아있는' 노동에게 지불된 비용) + (3) 잉여가치 (즉, '살아 있는 노동에게 지불하지 않은 노동 점유분, 즉 부불 노동 unpaid labour)  이 세 가지가 핵심적인 구성 요소를 이루며, 여기에 추가적으로 (4) 기술 발전이나 발명 등의 메리트 (맑스가 '특별 잉여가치'라고 부르는 것)와 (5) 수요자의 수나 주머니 사정등의 시장 상황에 따른 시장 변수가 추가 된다. 이러한 상품 가격 분석에서 특징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제는 아크로의 많은 분들이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효용 중심 경제학에서 중심적인 변수인 시장 상황이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본가의 경영 노동, 즉 다수의 노동자들을 단일한 목적과 계획 속에 하나의 네트워크 속으로 통합, 조직화시키는 노동에 대한 댓가는 아예 무시되어 있다는 것이다.(편의상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주식회사가 아닌 소유와 경영이 결합된 상장 이전의 기업들을 가정). 
 
 이것을 한 번 더 정식화 시켜보면,  
한 상품의 가격 = A. 시설 자본의 구입, 운영비 + B. 임금 + C. 잉여가치( 근로자들에게 지불되지 않고 생산된 부문)  여기에 덧붙여 경우에 따라 D. 기술 혁신에 따른 독과점 메리트 + E. 일반적인 시장 상황이 보조 변수로 추가. 


 이 된다.

 
 여기서 자본가가 이윤을 얻는 것=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이 전유하는 것=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라고 놓게 되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자본론의 자동 기계적 해석의 단초를 보게 된다.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은행에 묻어두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굴릴 유일한 동기를 어디서 얻는가? 그들이 은행 금리를 통해 얻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한다. 그런데 자본가가 이윤을 얻는 방식은 이 공식에서 보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잉여 가치를 자본가 점유함으로서만, 즉 C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시장 상황에 따라서 (E), 혹은 기술 혁신에 따른 시장 파괴적 지배자가 됨으로서 (D, 최근 몇 년간 애플의 행보처럼), 혹은 더 좋은 생산 효율을 가진 설비를 도입함으로서 (A) 가능하다. 이 경우에 A, D, E 의 모든 요소 역시 생산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환원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맑스는 D 의 경우에 순간적으로 기술 혁신을 통해 초과 이윤을 누리는 재화 생산 부분이 나타날 수 있더라도, 그 반응은 자본 자체의 수요 공급 법칙(즉, 이윤이 많이 나는 곳에 자본이 몰라고, 이윤이 적게 나는 곳에 자본이 부족해 지는 현상) 에 의해 원래의 이윤율로 수렴하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 경제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기술 집약적인 독과점 산업들에서 초과 이윤을 낳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루어지는 가공한 규모의 기술 투자를 생각해 보면, 그 자본의 수요 공급 함수를 통한 이윤율 상쇄를 뛰어 넘는 이윤창출의 다이내믹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브랜드 가치라는 특수한 형태의 지대(economic rent) 를 제외하고서라도 애플이 누리는 막대한 순이익의 본체가 팍스콘의 생산 라인의 노동자들을 쥐어짠 잉여 노동이라고만 보는 것은 암만 생각해 봐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지 않는가? 이렇게 본다면 노동 환원주의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상품의 가격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이윤을 창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 적합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3. 그렇다면 착취는?

 
 자본가들에 의한 잉여 가치의 전유 자체 = 착취라는 생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착취라는 개념을 좀 더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통 맑스 경제학에서 노동자 계급이 구조적으로 underpaid, 즉 자신이 가져가야 할 몫을 정당하게 가져가지 못하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도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상품 가격 속에 포함된 노동자 기여분, 즉 지불 노동(paid labour) 과 부불 노동(unpaid labour)이 기계적으로 합쳐진 것이 underpaid labour 라고 보는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 하루 당 스스로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재화의 양을 기준으로 놓고 보는 방식이다. 맑스는 필요 임금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재생산(= 휴식과 생계 유지) 과 부양 가족을 건사하는데 필요한 하루 당의 재화의 총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사고는 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목할 만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맑스가 자신의 필요 임금 개념 안에 (법으로 강제되어야 하는) 하루 최대 노동시간이라는 규제적인 관념을 이미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한 번, 앞에 링크한 글에서 지적한 노동가치설의 정신적인 토대를 이루는 교환적 정의의 관념에 따라 생각해 보자.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뚱아리 밖에 없는 임노동자들이 자신 노동의 최소한의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다음날에도 무리 없이 일을 할 수 있게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또 자신이 부양하는 가족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필요적 재화를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다. 맑스가 깊게 천착하고 있는 이 부분은, 우리가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우리의 교환적 정의의 관념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착취라는 개념이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착취는 바로, 한 자본에 부속된 노동자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의 삶의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인 침해를 뜻한다. 이런 착취는 노동시간을 자의적으로 연장하거나, 노동 조건을 자의적으로 열악하게 만들거나, 기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에 설득력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맑스가 철저하고 냉철하게 분노했던 바로 그 부분, 열 시간, 심지어 열 네 다섯 시간이 넘는 아동 노동에 우리가 똑같이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근로자, 노동자로서의 행복에 대한, 계약을 가장한 가장 세련된 형식의, 그러나 가장 냉혹하고 야만적인 침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침해하는 구조적인 조건을 제거하는 것, 이것만큼 공리주의적인 사고가 어디에 있는가? 맑스의 자본론은 이렇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철두 철미하게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경제학이다. 이렇게 착취의 기준점을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규범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적어도 현 시점에서 관찰되는 대재벌의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고임금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착취되고 있어, 그들의 임금 인상 투쟁은 여전히 정당해> 라고 말할 때의 모종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자본에 속한 노동자들이 비록 여전히 부불 노동을 통한 잉여 가치 생산을 강요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착취를 당하지는 않는 상황 역시 이해될 수 있다. 



 4. 끝으로: 정신 노동에도 육체 노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표준화 될 수 있고,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교환적 정의의 관념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자본론을 이해해 가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맑스 이후에 생겨난 여러 산업 분야를 맑스가 고안해 낸 정치경제적 범주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정신 노동을 가정 하지 않으면 노동가치설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프로그래머가 만들어 낸 소프트웨어는, 상품인가 아닌가? '무형의 상품' 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아마도..이 상품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머의 정신 노동은 배제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경직적 맑스주의자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소프트웨어가 담긴 DVD 의 가치 구성부분은 그 DVD 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가시적인 육체 노동량을 통해서만 측정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소프트웨어의 가치의 전체를 이룬다!> 
  
 만약 상품 가치를 측정하는데 이렇게 그 상품의 물질적인 실체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가시적인 노동량만을 보려고 한다면, 이러한 경험적인 경제 현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이런 형태의 1) 비가시적이지만, 2) 표준화시킬 수 있고 또 3) 생산자 스스로가 교환의 목적을 가지고 산출해 내는 무수히 많은 새로운 형태의 정신 노동이 출현했고, 또 끊임없이 출현 하고 있다. 아무도 프로그래머가 특정한 교환 목적 없이, 단지 사회에 자선을 베풀기 위해 착한 사마라아인처럼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보지 않는다(물론 리눅스 같은 굵직굵직한 예외들도 있다!). 프로그래머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노동의 정당한 최소한의 댓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한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의 자본주의는 이런 명백하게 영리 목적의 비가시적, 정신적 노동 활동 이외에도 비영리적인 목적의 정신적 노동 활동 역시 임노동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놀이라는 기상천외한 부불노동의 형태로(!) 상품 생산 관계 속으로 포섭시키고 있다. 하루에도 수천만건의 비디오를 올리는 유투브의 유저들이나 글과 사진을 올리는 수억명의 페이스북의 유저들을 생각해 보라. 구글과 페이스북의 천문학적인 (상품으로서의) 기업 가치는 (정신 노동을 정치 경제학적 범주로 담고 있지 않은) 노동 가치설이 해명하지 못하는 또다른 강력한 예가 된다. 정신적 노동이 산출하는 가치가 정치 경제학적인 범주로 이제서라도 (정치) 경제학의 영역 내에 제대로 들어올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무수히 많은 페이스북 유저들과 유투브 업로더들이 주커버그나 래리 페이지에게 자신의 정당한 노동 댓가를 돌려 달라고 쳥구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덧붙여, 표준화되고, 교환될 수 있는 정신 노동의 범주에 앞서 잠깐 언급한 경영 노동 역시 포함될 수 있다.  자본가들은 한 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잉여 가치의 약탈적 전유의 주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대규모의 노동력을 하나의 유기적인 목적하에 배치하고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는 경영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가치 생산 관계에서 자본가의 역할을 뺀 노동자만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장수 없는 전쟁 혹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본가-노동자 생산 구도가 아닌,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된 새로운 생산 관계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수 없이 병사들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도 있고, 지휘자 없이 연주자들만 가지고 연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길고 지리하고 복잡하고 무수한 의사 결정 과정의 반복- 결국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봉착했던 난관 -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피하지 못하는 위험이 될 수도 있다. 


 경영자의 표준화된 정신적 노동을 가치 생산의 원천으로 볼 경우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소유적) 경영자가 터무니 없이 임금을 제외한 모든 이윤 부문, 혹은 거의 전부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터무니 없음을 논파할 수 있다는 것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경영자가 가져가야 할 표준적인 몫 (이것이 현대의 자본주의 처럼 터무니 없이 과도하게 높게 측정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을 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논의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 생활을 통한 한 사회 전체의 행복 증대를 위해서 준수되어야 하는 가장 큰 지침은 여전히 2000년도 더 된, 아마도 인류가 집단적 사회 생활을 영위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오래된 정의의 구호인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의 몫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