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 소리마당에서 무소의님 글에 단 댓글입니다. 무소의님의 재댓글이 궁금하신 분은 거기 가셔서 검색해 보세요.  


파레토 최적 원리의 이데올로기
칼도
  (2006-11-30 20:34)
 공감2   비공감0  조회1428  인쇄  주소복사  소셜네트워크로 공유하기
  



파레토 기준이란 '현재 상태에서 사회의 어떤 사람을 괴롭게 만들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면 이 상태가 최선의 상태라고 볼 수는 없다'라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파레토 기준하에서 최선은 '다른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더 낫게 만들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를 '파레토 최적'이라고 부릅니다.)

--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대개 파레토 최적으로 정의합니다. 파레토 최적은 그 밖의 누군가의 처지를 악화시킴 없이는 누군가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한 분배상태입니다. 아이디어는 누군가의 처지를 개선시키면서 누구의 처지도 악화시키지 않는 변화를 실행하지 않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파레토 개선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나는 9천만원을,당신은 1천만원을 가졌고 당신이 1천만원보다 덜 갖지 않고서는 내가 9천만원보다 더 가질 수 없고 내가 9천만원보다 덜 갖지 않고서는 당신이 1천만원보다 더 가질 수 없다면, 내가 9천만원을 갖고 당신이 1천만원을 갖는 것은 파레토 최적입니다. 정의감이 예민한 분은 여기서 즉시 파레토 최적 기준이라는 것이 분배적 정의를 둘러싼 쟁점에서 더 가진 자들을 덜 가진자들로 부터 지켜주는 역할, 즉 현재의 (결과적으로든 구조적으로든 불평등한) 분배상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심지어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공동선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배적 정의나 공동선을 위한 많은 정책 선택들이 일부 사람들이나 다수 사람들의 처지는 개선시키지만 다른 일부 사람들이나 극소수의 사람들의 처지는 악화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경제학자들이 파레토 최적 기준을 경제적 효율성의 기준으로 채택해 파레토 개선을 낳는 정책들만을 권고한다면, 그것은 분배적 정의나 공동선에 신경쓰지 말라는 권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온실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것은 지구 온난화 경향을 멈추게 하거나 늦추고 극적인 기후변동을 방지하는 것의 미래 이익이 온실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기 위한 현재의 비용을 훨씬 상회하기에 유의미하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세대 중 일부 사람들의 처지가 온실 가스 배출 감소 정책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악화되는 한, 그 정책으로 인해 미래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처지가 개선되리라는 사실은 우리가 온실 가스 배출 감소 정책을 선택하는데 아무런 동기부여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레토 최적을 경제적 효율성의 기준으로 삼아 파레토 개선이 가능한 정책만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

예를 들어 봅니다. 두 사람(A, B)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를 생각해보지요. A는 9천만원을, B는 1천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 1> A라는 사람이 참으로 묘한 사람이라서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B보다 적게 갖지만 않으면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합시다. 반면 B는 A가 얼마를 갖느냐와는 상관없이 돈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현재의 분배는 파레토 기준으로 최선일까요? 아닙니다. A가 5천만원, B가 5천만원을 갖는 것이 파레토 최적이 됩니다. <상황 2> 반면 A와 B 모두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어떨까요? 현재 상태가 파레토 최적이 됩니다. 파레토 기준은 아주 큰 장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가치를 동등하게 본다는 점입니다. 무슨 얘기냐? 위의 <상황 2>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A 너는 돈 많쟎냐. 그러니까 B한테 좀 나누어 줘!" 너무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이 말에는 중대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A가 가진 행복의 기준('돈은 많을수록 좋다')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또는 A가 갖는 행복은 B가 가질 수 있는 행복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그런데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한 누가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한 사람의 행복의 판단기준 혹은 가치기준이 다른 사람의 판단기준에 비해 열등하다/우월하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
황당무계의 이데아가 울고가겠군요. 파레토 최적 기준이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은 사람들의 처지는 서로 다르지만 처지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동등하다고 할 때의 바로 그 동등한 마음입니다. 반면 A의 돈의 일부가 B에게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동등한 마음을 동등하게 존중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A의 처지가 악화되더라도 B의 처지가 개선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구요. 실로, 이 양 입장의 차이는 모든 인간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는 입장/각인의 나름의 행복의 기준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입장이냐 그렇지 않은 입장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순전히 '형식적'이기만 논리로 불평등한 분배상태를 정당화하는 입장이냐 처지가 어려운이의 처지가 처지가 좋은 이의 처지를 악화시켜서라도 개선되어야 할 '실질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입장이냐의 차이입니다. 파레토 최적 원리에 따른 효율성 내지는 정의 원칙은 이미 롤즈에 의해 충분하게 비판되었습니다.     ㅣ       
--

그런 상황에서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어떤 상태(상태 '가')가 다른 상태(상태 '나')로 바뀌는 과정에서 누구도 손해보는 사람이 없고, 반대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있다면 상태 '나'는 상태 '가'에 비해 우월하다"라는 식의 판단 이외에는 다른 기준이 있겠습니까? 만일 상태 '가'가 상태 '나'로 바뀌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면 두 상태 중에서 파레토 기준으로 더 우월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답은 '판단할 수 없다'입니다. 이익을 보는 사람의 이익정도와 손해를 보는 사람의 손해정도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요. 참으로 인간적인 판단기준 아닙니까? 

--
사람들이 서로 다른 처지로 처해있는 분배상태의 현황과 그 분배상태의 형성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도, 분배적 정의의 기준에 대한 '실질적' 논거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하는 이런 식의 얘기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파레토 최적 기준이라는 것은 엄밀한 학문적 탐구로 밝혀낸 진실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심리적 사실'을 가리켜 보일 뿐입니다. 물론 당연한 사람의 심리를 원리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 수준이 원래부터 부르주아 경제학의 수준이기는 했습니다.   
--

만일 누군가가 '상황과 상관없이 사람의 가치는 비교불가능하게 동등하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필연적으로 파레토기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가 얻는 행복의 크기를 다른 사람의 희생의 크기와 비교할 수 없다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사회의 행복이 증가한다면..."하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없는 거지요.

--
구체적 상황을 도외시한 이런 논리 비약은 불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처지가 악화되어야만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개선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그 처지 악화가 '희생'이냐 아니냐는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롤즈의 기준과 비교를 해 봅시다. 롤즈의 논증에 따르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사람들의 행복의 양이 사회 전체의 행복의 양을 규정'합니다. 그러면 위의 예에서 B가 가진 행복의 양만이 사회의 행복의 양이 됩니다. A는 사회 구성원으로 취급을 못 받는 셈이 되지요. 속된 말로 인간취급 못 받는 거지요. 단지 좀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요. 롤즈의 기준이 어마어마한 도덕성이라도 갖는 줄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만, 수많은 기준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거지요. 
아, 물론 파레토 기준에도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중의 하나는 현재상태(status quo)가 최선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가능성이 많다는 거지요. 또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비교불가능한 상태들이 다수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가 될 수 있지요.

--
롤즈의 정의 원칙은 불펑등의 정당화에 관한 것입니다. 즉 롤즈는 불평등 자체는 필연적이라고 봅니다. 이 전제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불평등의 정도입니다. 롤즈의 정의 원칙은 처지가 가장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개선시키지 않는 불평등의 심화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정의 원칙이 왜 타당한가에 대한,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정교하고 세련된 논증을 제시합니다. 예, 물론 수많은 - 정확히는 서 너 가지 - 기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불과하다'고 하기에는 비중이 큽니다.게다가 공동체주의든 마르크스주의적 평등주의든 현대 정치철학의 다른 주요 선수들이 제시하는 기준들은 롤즈의 기준보다 더 평등주의적이면 더 평등주의적이지 그것보다 더 오른 쪽에 있지 않으므로, 무소의님 마음에 드는 파레토 원칙 가까이 있는 기준이나 그 비슷한 부류는 정치철학에서 경제학에서의 주류 경제학만큼의 처지가 못됩니다. 물론 현실 자본주의 체제에 더 어울린다는, 학문외적 잇점은 충분히 누리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회 구성원으로 취급을 못받는 셈이 되지요. 속된 말로 인간취급 못받는 거지요' - 이런 말들은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무소의님의 그 추상적 휴머니즘만 찰랑대는 감수성과 (본질 아닌) 현상에만 집착하는 지성의 저 밑바닥까지 비춰주는군요. 
--

개인적으로 저는 파레토 기준에 담긴 철학을 매우 좋아합니다. 누군가 저를 못가졌다고/많이 가졌다고/잘 생겼다고/못 생겼다고... 제가 가진 판단기준 혹은 행복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열등하다고 한다면 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로, 다른 사람이 못가졌다고/많이 가졌다고/잘 생겼다고/못 생겼다고... 그 사람의 판단기준 혹은 행복의 기준을 열등하다고 하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판단기준의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른 얘깁니다.) 제가 '정부' 보다는 '시장'을 더 중시하는 이유, '보이는 손' 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을 더 높이 사는 철학적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정부'와 '보이는 손'은 그들의 판단 기준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전제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이 되면 나중에 이 부분을 다시 쓰지요.

--
저런, 평범한 심리적 사실이 철학으로까지 격상되는군요! 자본주의 세상은 많이 가지고 잘생긴 사람들의 판단기준 혹은 행복의 기준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판단 기준 혹은 행복의 기준보다 체계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사회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축약해 표현했지요.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반복해야겠군요. 정부와 보이는 손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판단 기준이나 행복의 기준을 강요하느냐 안하느냐는 정부와 보이는 손이 어떻게 구성되느냐를 논하는 맥락과 무관하게 미리 얘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광고되는 것이 실은 보이지 않는 주먹이나 발일 가능성도 높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