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사례를 통해 착취가 사전적 개념이냐 사후적 개념이냐, 개념이 애매모호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셨는데요. 우선 착취의 개념은 노동력의 산물이 노동자에게 온전히 지급되지 않고 자본가가 가져간다면 그걸 착취라고 합니다. 경제학 전공자라면 잘 아시겠지만 주류 경제학에서도 노동력의 수요독점인 경우에는 노동력의 착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 임금이 한계 생산물 가치 이하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이른바 공급독점적 착취라고 하는데 그런 걸 보면 제가 말한 착취 개념은 주류 경제학에서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착취라는 개념 자체는 전혀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죠. 

그리고 화가의 기댓값 같은 걸 언급하신 건, 그건 노동력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착취라는 개념을 위와 같이 정의하는 이상 설사 이윤이, 말씀하신 경우와 같은 위험부담에 따른 정당한(?) 대가로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노동력의 산물을 자본가가 가져가는 것이라면 그건 여전히 착취에 해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위험부담의 대가이다라는 말은 착취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론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비록 착취라고 해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착취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반드시 악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또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정말로 자본가의 이윤이 단순히 소유의 대가일 뿐 실질적 경제적 기여가 없는 것이라면 자본가의 역할을 배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고, 그것은 이윤이 윤리적으로 반드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겠죠. 단적인 예로 지주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지주가 토지를 임대해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그것이 상호 이익이 되는 계약인 한은, 윤리적으로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까지 볼 수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지주가 없다면 어떨까요? 지주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상관없이 땅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따라서 지주가 없어도 그 토지를 이용한 생산은 여전히 가능하겠죠. 결국 지주의 존재를 배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공익을 위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지주의 존재를 배제하게 되면 전에는 아무런 경제적 기여도 없이 지불되었던 비용이 이제는 생산적인 곳에 지출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자본가의 착취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도 그와 같은 차원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설사 착취가 존재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자본가의 실질적 기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경우 우리는 자본가의 역할을 배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경우 착취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위험부담의 대가라거나 자유계약의 결과라거나 상호이익이 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정당화된다고 해도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