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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mple courage of decision: a leftist tribute to Thatcher (By Slavoj Zizek)

결정을 행하는 순연한 용기: 대처에게 바치는 한 좌파의 조사 (슬라보예 지젝)


What we need today is a Thatcher of the left: a leader who would repeat Thatcher’s gesture in the opposite direction, transforming the entire field of presuppositions shared by today’s political elite.


우리가 오늘날 필요로 하는 것은 좌파의 대처이다: 오늘날의 정치 엘리트에 의해 공유되는 전제들의 전체 장을 변형시키면서 반대 방향에서 대처의 제스처를 반복할 지도자.



* 출처: Newstatesman / 2013417




In the last pages of his monumental Second World War, Winston Churchill ponders on the enigma of a military decision: after the specialists (economic and military analysts, psychologists, meteorologists) propose their analysis, somebody must assume the simple and for that very reason most difficult act of transposing this complex multitude into a simple "Yes" or "No". We shall attack, we continue to wait... This gesture, which can never be fully grounded in reasons, is that of a Master. It is for the experts to present the situation in its complexity, and it is for the Master to simplify it into a point of decision.


그의 기념비적 저작인 <이차세계대전>의 마지막 지면들에서, 윈스턴 처칠은 군사적 결정의 수수께끼에 관해 숙고한다: 전문가들 (경제 및 군사 분석가들, 심리학자들, 기상학자들) 이 분석을 내놓은 후, 누군가가 단순하고 바로 그 이유로 가장 어려운, 이 복잡한 다면성을 하나의 단순한 예스또는 로 바꾸어놓는 행위를 떠맡아야 한다. 공격해야 한다, 더 기다려야 한다... 결코 온전하게 논리적으로 정초할 수 없는 이 제스쳐가 주인의 제스쳐이다. 상황을 그 복잡성 면에서 서술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몫이고 그것을 하나의 결정지점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주인의 몫이다.


The Master is needed especially in situations of deep crisis. The function of a Master is to enact an authentic division a division between those who want to drag on within the old parameters and those who are aware of the necessary change. Such a division, not the opportunistic compromises, is the only path to true unity. Let us take an example which surely is not problematic: France in 1940. Even Jacques Duclos, the second man of the French Communist Party, admitted in a private conversation that if, at that point in time, free elections were to be held in France, Marshal Petain would have won with 90 per cent of the vote. When de Gaulle, in his historic act, refused to acknowledge the capitulation to Germans and continued to resist, he claimed that it was only he, not the Vichy regime, who speaks on behalf of the true France (on behalf of true France as such, not only on behalf of the “majority of the French”!). What he was saying was deeply true even if it was “democratically” not only without legitimacy, but clearly opposed to the opinion of the majority of the French people.


주인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는 특히나 필요하다. 주인의 기능은 진짜 분할을 제정하는 것이다 - 낡은 변수들 안에서 느릿느릿 걷기를 원하는 이들과 필요한 변화를 알아차린 이들 사이의 분할. 그러한 분할은 기회주의적 타협이 아니라 참된 통일을 향해 가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혀 문제적이지 않은 한 사례를 들어보자: 1940년 프랑스. 프랑스 공산당의 제2인자인 자크 뒤클로조차도 사석에서 당시 자유선거가 프랑스에서 시행된다면 페탱 원수가 90 퍼센트의 표를 가져갈 것이라고 인정했다. 드골이 독일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항전하는 역사적 행위를 했을 때, 그는 비시 체제가 아니라 오직 그만이 참된 프랑스 를 위해 (참된 프랑스 그 자체를 위해서, 그저 프랑스인들 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고 있던 것은 비록 민주주의 원칙상정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 다수의 의견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속들이 참된 것이었다.

Margaret Thatcher, the lady who was not for turning, was such a Master, sticking to her decision which was at first perceived as crazy, gradually elevating her singular madness into an accepted norm. When Thatcher was asked about her greatest achievement, she promptly answered: “New Labour.” And she was right: her triumph was that even her political enemies adopted her basic economic policies the true triumph is not the victory over the enemy, it occurs when the enemy itself starts to use your language, so that your ideas form the foundation of the entire field.


굽힐 줄 몰랐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처음부터 미친 짓으로 지각되었던 그녀의 결정을 고수하고 점차 그녀의 독특한 광기를 하나의 승인된 규범으로 승격시켜 나갔기에 한 명의 그러한 주인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을 질문받자 그녀는 즉각 답했다: “신 노동당.” 그리고 그녀는 옳았다: 그녀의 승리는 그녀의 정치적 적들조차도 그녀의 기본적 경제정책들을 승인했다는 것이다 - 참된 승리는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적 자신이 당신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 그래서 당신의 관념들이 전체 장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So what remains today of Thatcher’s legacy today? Neoliberal hegemony is clearly falling apart. Thatcher was perhaps the only true Thatcherite she clearly believed in her ideas. Today’s neoliberalism, on the contrary, “only imagines that it believes in itself and demands that the world should imagine the same thing” (to quote Marx). In short, today, cynicism is openly on display. Recall the cruel joke from Lubitch’s To Be Or Not to Be: when asked about the German concentration camps in the occupied Poland, the responsible Nazi officer “concentration camp Erhardt” snaps back: “We do the concentrating, and the Poles do the camping.”


그렇다면 오늘날 대처의 유산은 어떤 상태로 남아있는가? 분명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무너지고 있다. 대처는 유일하게 참된 대처주의자였던 것 같다 - 그녀는 분명 그녀의 관념들을 믿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반대로, “그 자신을 믿는다고 상상만 하며 세계가 동일한 것을 상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마르크스 인용). 요컨대, 오늘날, 냉소주의는 공개적으로 과시된다. 루비취의 <사느냐 죽느냐>에 나오는 고약한 농담을 떠올려 보라: 점령된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들(concentration camps)에 관해 질문을 받자, 책임 있는 나치 장교 강제수용소 에르트하트는 재깍 받아쳤다: “우리는 집결시키고(do the concentrating) 폴란드인들은 야영합니다(do the camping).”


Does the same not hold for the Enron bankruptcy in January 2002 (as well as on all financial meltdowns that followed), which can be interpreted as a kind of ironic commentary on the notion of a risk society? Thousands of employees who lost their jobs and savings were certainly exposed to a risk, but without any true choice - the risk appeared to them as a blind fate. Those, on the contrary, who effectively did have an insight into the risks as well as a possibility to intervene into the situation (the top managers), minimised their risks by cashing in their stocks and options before the bankruptcy so it is true that we live in a society of risky choices, but some (the Wall Street managers) do the choosing, while others (the common people paying mortgages) do the risking.


위험사회 개념에 대한 일종의 반어적 논평으로 해석될 수 있는 20021월의 엔론 파산 사태 (및 뒤이은 모든 금융 붕괴들)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업자가 되고 저금을 잃은 수천 명의 피고용자들은 확실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아무런 참된 선택도 할 수 없었다 - 위험은 그들에게 하나의 맹목적 운명으로서 닥쳤다. 반대로, 유효하게 그 위험들을 통찰하고 있었고 그 상황에 개입할 가능성을 가졌던 이들 (최고 경영자들)은 파산 전에 그들의 주식들과 옵션들을 현금화함으로써 그들의 위험들을 최소화했다 - 즉 우리가 위험한 선택들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참이지만 일부는 (월 스트리트 경영자들은) 선택을 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모기지 대출금을 상환하는 보통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한다.


One of the weird consequences of the financial meltdown and the measures taken to counteract it (enormous sums of money to help banks) was the revival in the work of Ayn Rand, the closest one can come to the ideologist of the “greed is good” radical capitalism the sales of her magnum opus Atlas Shrugged exploded again. According to some reports, there are already signs that the scenario described in Atlas Shrugged the creative capitalists themselves going on strike is enacted. John Campbell, a Republican congressman, said: “The achievers are going on strike. I’m seeing, at a small level, a kind of protest from the people who create jobs // who are pulling back from their ambitions because they see how they’ll be punished for them.” The absurdity of this reaction is that it totally misreads the situation: most of the gigantic sums of bail-out money is going precisely to the Randian deregulated “titans” who failed in their “creative” schemes and thereby brought about the meltdown. It is not the great creative geniuses who are now helping lazy ordinary people, it is the ordinary taxpayers who are helping the failed “creative geniuses.”


금융 붕괴와 그것의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취해진 조치 (막대한 액수의 은행 지원금)의 기괴한 귀결들 중 하나는 아인 랜드, 탐욕은 좋은 것이다급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스트가 되는데 가장 적격인 인물의 저작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었다 - 그녀의 대표작인 <아틀라스 슈러그드>의 판매가 다시 폭증했다. 몇몇 보고들에 따르면, <아틀라스 슈러그드>에서 묘사된 시나리오 - 창조적 자본가들 자신들이 파업에 나선다 - 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공화당 의원인 존 캠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일을 이룬 이들이 파업에 나서고 있다. 나는 작은 수준이지만,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저항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 그들은 그에 대해 처벌받을 것임을 알기에 야망을 접고 있다.” 이러한 반응의 어이없음은 그것이 상황을 완전히 오독한다는 것이다: 막대한 액수의 긴급구제금의 대부분은 실로 그들의 창조기획에 실패하고 그에 따라 붕괴를 초래했던 랜드적인 규제받지 않는 거인들의 수중으로 가고 있다. 지금 게으른 보통 사람들을 돕고 있는 것은 위대한 창조적 천재들이 아니다. 거꾸로 보통 납세자들이 실패한 창조적 천재들을 돕고 있다.


The other aspect of Thatcher’s legacy targeted by her leftist critics was her “authoritarian” form of leadership, her lack of the sense for democratic coordination. Here, however, things are more complex than it may appear. The ongoing popular protests around Europe converge in a series of demands which, in their very spontaneity and obviousness, form a kind of “epistemological obstacle” to the proper confrontation with the ongoing crisis of our political system. These effectively read as a popularised version of Deleuzian politics: people know what they want, they are able to discover and formulate this, but only through their own continuous engagement and activity. So we need active participatory democracy, not just representative democracy with its electoral ritual which every four years interrupts the voters’ passivity; we need the self-organisation of the multitude, not a centralised Leninist Party with the Leader, et cetera.


그녀의 좌파 비판자들이 표적으로 삼은 대처의 유산의 다른 측면은 그녀의 권위주의적인리더쉽 형태, 그녀의 민주주의적 조정감각의 결여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태는 얼핏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유럽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는 대중 시위들은 일련의 요구들로 수렴되는데, 그 요구들은 그것들의 바로 그 자발성과 투명성 면에서 우리 정치체제의 계속되는 위기에 적절한 대응하는데 일종의 인식론적 장애가 되고 있다. 이것들은 결국 들뢰즈적 정치의 대중 판본인 듯 보인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것을 발견하고 정식화할 수 있다. , 그들 자신의 지속적인 참여와 활동을 통해서만.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매 4년마다 선거의례로 투표자의 수동성을 방해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지도자가 있는 집중화된 레닌주의 정당이 아니라 다중의 자기-조직을 필요로 한다, 등등.


It is this myth of non-representative direct self-organisation which is the last trap, the deepest illusion that should fall, that is most difficult to renounce. Yes, there are in every revolutionary process ecstatic moments of group solidarity when thousands, hundreds of thousands, together occupy a public place, like on Tahrir square two years ago. Yes, there are moments of intense collective participation where local communities debate and decide, when people live in a kind of permanent emergency state, taking things into their own hands, with no Leader guiding them. But such states don’t last, and “tiredness” is here not a simple psychological fact, it is a category of social ontology.


최후의 함정인 것, 떨쳐야 하는 가장 깊은 환영인 것, 포기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대의적이지 않은 직접적 자기-조직이라는 신화이다. 물론, 모든 혁명 과정에는 2년 전의 타리르 광장에서 그런 것처럼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함께 공공장소를 점거하는 집단 연대의 황홀한 순간들이 있다. 물론, 지역 공동체들이 토론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안내하는 지도자 없이 그들 스스로 행하면서 일종의 영구 비상사태 속에서 사는 강도 높은 집단적 참여의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는 지속되지 않는데, 여기서 지침은 단순한 하나의 심리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존재론의 한 범주이다.


The large majority me included wants to be passive and rely on an efficient state apparatus to guarantee the smooth running of the entire social edifice, so that I can pursue my work in peace. Walter Lippmann wrote in his Public Opinion (1922) that the herd of citizens must be governed by “a specialised class whose interests reach beyond the locality" this elite class is to act as a machinery of knowledge that circumvents the primary defect of democracy, the impossible ideal of the "omni-competent citizen". This is how our democracies function with our consent: there is no mystery in what Lippmann was saying, it is an obvious fact; the mystery is that, knowing it, we play the game. We act as if we are free and freely deciding, silently not only accepting but even demanding that an invisible injunction (inscribed into the very form of our free speech) tells us what to do and think. “People know what they want” no, they don’t, and they don’t want to know it. They need a good elite, which is why a proper politician does not only advocate people’s interests, it is through him that they discover what they “really want.”


대다수 - 나도 포함된다 - 는 수동적이 되어 전체 사회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보장해주는 효율적인 국가 장치들에 의존하고 싶어 한다. 내가 평화롭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월터 리프만은 그의 <여론> (1922)에서 시민들의 무리는 국지적인 것 너머에까지 관심을 갖는 전문가층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썼다 - 이 엘리트층은 민주주의, 전능한 시민들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의 주요 결함을 회피하는 하나의 지식기구로서 작동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 우리의 동의와 함께: 리프만이 말하고 있던 것에는 아무런 불가사의도 없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불가사의는 그 점을 알면서도 우리가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로우며 자유롭게 결정하는 양 행동한다. (우리의 발언의 자유라는 바로 그 형식 속에 새겨지는) 보이지 않는 명령이 우리에게 생각하고 행하라고 얘기해 주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얘기해 주어야 한다고 요구를 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안다” - 아니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훌륭한 엘리트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정치가가 단순히 국민의 이해관심들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국민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를 통해서인 이유이다.

As to the molecular self-organising multitude against the hierarchic order sustained by the reference to a charismatic leader, note the irony of the fact that Venezuela, a country praised by many for its attempts to develop modes of direct democracy (local councils, cooperatives, workers running factories), is also a country whose president was Hugo Chavez, a strong charismatic leader if there ever was one. It is as if the Freudian rule of transference is at work here: in order for the individuals to “reach beyond themselves,” to break out of the passivity of representative politics and engage themselves as direct political agents, the reference to a leader is necessary, a leader who allows them to pull themselves out of the swamp like baron Munchhausen, a leader who is “supposed to know” what they want. It is in this sense that Alain Badiou recently pointed out how horizontal networking undermines the classic Master, but it simultaneously breeds new forms of domination which are much stronger than the classic Master. Badiou’s thesis is that a subject needs a Master to elevate itself above the “human animal” and to practice fidelity to a Truth-Event: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지하는 것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질서에 맞서는 분자적인 자기-조직적 다중에 관해서라면, 직접 민주주의 양식들을 발전시키려는 시도 (지역 평의회들, 협동조합들,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공장들) 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찬양했던 베네수엘라가 또한 강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을 휴고 차베즈가 대통령이었던 나라라는 사실의 아이러니에 주목하라. 여기서 프로이트적인 전이 규칙이 작동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다: “그들 자신을 넘어 서기위해, 대의정치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직접적 정치적 행위주체들로 참여하기 위해 개인들은 지도자 - 뮨하우젠 남작처럼 그들이 늪에서 자신들을 빼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도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안다고 상정되는지도자 - 에 준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가 최근 어떻게 수평적 네트워킹이 고전적 주인을 잠식하면서도 동시에 고전적 주인보다 훨씬 더 강한 새로운 지배형태들을 낳는지 지적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바디우의 테제는 주체는 그 자신을 인간 동물위로 올려놓고 진리사건에 충실한 실천을 하기 위해 주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The Master is the one who helps the individual to become subject. That is to say, if one admits that the subject emerges in the tension between the individual and the universality, then it is obvious that the individual needs a mediation, and thereby an authority, in order to progress on this path. One has to renew the position of the master - it is not true that one can do without it, even and especially in the perspective of emancipation.”


주인은 개인이 주체가 되는 것을 돕는 사람이다. 말인 즉, 주체가 개인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인이 이 경로를 따라 전진하기 위해 하나의 매개를, 그리하여 하나의 권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주인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 - 주인 없이도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 해방의 시각에서조차도, 그리고 해방의 시각에서 특히나 더, 그렇다.”


Badiou is not afraid to oppose the necessary role of the Master to our “democratic” sensitivity: “This capital function of leaders is not compatible with the predominant ‘democratic’ ambience, which is why I am engaged in a bitter struggle against this ambience (after all, one has to begin with ideology).”


바디우는 우리의 민주주의적감수성에 주인의 필연적 역할을 맞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도자들의 이 중대한 기능은 지배적인 민주주의적분위기와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이 분위기와 맞서는 가차 없는 투쟁에 뛰어든 이유이다 (결국, 우리는 이데올로기부터 처리해야 한다).”


We should fearlessly follow his suggestion: in order to effectively awaken individuals from their dogmatic “democratic slumber,” from their blind reliance on institutionalised forms of representative democracy, appeals to direct self-organisation are not enough: a new figure of the Master is needed. Recall the famous lines from Arthur Rimbaud’s “A une raison” (“To a Reason”):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의 제안에 따라야 한다: 개인들을 그들의 도그마적인 민주주의적 수면 상태로부터, 제도화된 대의 민주주의 형태들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의존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깨우기 위해, 직접적 자기-조직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주인 형상이 필요하다. 아르투르 랭보의 <하나의 이성에게>의 유명한 행들을 떠올려 보시라:


“A tap of your finger on the drum releases all sounds and initiates the new harmony.

A step of yours is the conscription of the new men and their marching orders.

You look away: the new love!

You look back, the new love!”


북을 두드리는 당신의 손가락 끝이 온갖 소리들을 풀어놓아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 낸다.

당신의 한 걸음은 새로운 인간들의 징집이자 그들의 행진 명령이다.

당신이 눈길을 돌린다: 새로운 사랑!

당신이 뒤돌아본다, - 새로운 사랑!“

There is absolutely nothing inherently ”Fascist” in these lines the supreme paradox of the political dynamics is that a Master is needed to pull individuals out of the quagmire of their inertia and motivate them towards self-transcending emancipatory struggle for freedom.


이 행들에 고유하게 파시스트적인 것은 전혀 없다 - 정치 동학의 최고의 역설은 개인들을 진구렁에 갇힌 무력 상태로부터 끌어내 자유를 위한 자기-초월적인 해방 투쟁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하나의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What we need today, in this situation, is a Thatcher of the left: a leader who would repeat Thatcher’s gesture in the opposite direction, transforming the entire field of presuppositions shared by today’s political elite of all main orientations.


우리가 오늘날 이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좌파의 대처이다: 오늘날의 모든 주요 정향들의 정치 엘리트에 의해 공유되는 전제들의 전체 장을 변형시키면서 반대 방향에서 대처의 제스처를 반복할 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