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 [비판]

 

1) 노동력과 노동의 구분

 

효성이 지극한 천하장사 대근이가 100평의 밭에서 근력으로 쟁기를 끌면서 농사를 지었을 때의 1년 수확량은 1000근이었다. 어느 해인가 대근이는 임금님으로부터 황소를 효행상으로 하사받았고 그 후에는 황소가 쟁기를 끌게 했다. 그러자 1년 수확량이 1300근으로 증대되었다. 1년 동안 황소를 돌보는 데 들었던 목초들과 기타 물자들은 100근의 수확물을 장에서 내다 팔거나 교환한 것으로 충족되었다. 따라서 황소로 하여금 쟁기를 끌게 함으로써 300근의 수확량 증대가 있었고 이중 순증대는 200근이다. 처음에는 황소를 돌보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황소로 하여금 쟁기를 끌게 함으로써 얻을 수확량 증대를 상회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으나 괜한 우려였다. 황소를 혹사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고 몇 번인가는 꿈에 황소가 나타나 수확량이 300근으로 늘어나게 한 것은 모두 내가 한 일이니 그 300근을 다 써서 내게 더 맛난 목초와 편안한 잠자리를 달라고 씩씩대기도 했지만 막상 눈을 뜨고 보면 아무생각 없이 얌전히 주인을 따르는 순둥이가 외양간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2)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노동

 

고물장사를 하던 병철이는 모은 돈으로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렸다. 공장 부지를 사고 공장을 짓고 정비도구를 들이는데 9천만원이 들었고 5명의 정비공에게는 매달 100만원씩의 임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마모될 정비도구를 대체하기 위해 매달 300만원씩을 따로 떼어놓았고 공장유지비로 매달 300만원이 들었다. 즉 병철이가 매달 지출하는 비용은 1100만원이다. 그러나 병철이의 매달 매출액은 2000만원이었고 따라서 900만원의 이윤이 생겼다. 10달이 지나자 공장을 짓고 정비도구를 들이는데 든 9천만원이 되돌아왔다. 그 다음달부터 병철이는 900만원의 순이윤을 챙기게 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지거나 경기침체로 사람들이 자동차를 덜 몰아 공장을 닫게 되거나 이윤이 줄어들 염려도 있지만 아직 그런 낌새는 없다. 물론 병철이가 공장에서 하는 일은 정비공들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 전부이다.

 

정비공장의 매달 매출액 2000만원은 비용 1100만원과 이윤 900만원으로 구성된다. 비용 1100만원은 임금(노동력의 가치=가변자본가치) 500만원과 공장유지비 및 감가상각비(불변자본가치) 600만원으로 구성된다. 500만원은 그들이 매일 정해진 시간동안 정비공장에서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 - 근력, 심리적 및 생리적 안정, 새로운 정비기술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비용 등등 - 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화 및 용역(임금재)을 구입하는데 들어간다. 공장유지비 및 감가상각비는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이전한다. 이윤 900만원 가운데는 공장유지비나 감가상각비는 1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윤 900만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윤 900만원은 임금 500만원과 함께 정비공들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즉 정비공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1400만원의 새로운 가치를 생산했지만(가치생산물) 그중 500만원만 받고 900만원은 병철이(자본가)에게 착취당한 것이다(현상적으로는 마땅히 자본가에게 가야하는 것으로서의 이윤이지만 본질은 노동자가 새로이 생산한 가치 가운데 노동력가치로서의 임금을 충당하고 남은 가치로서 오직 자본가가 생산수단 - 우리의 예에서는 공장과 정비도구 - 의 소유자이기 때문에만 자본가 몫이 되는 잉여가치).

 

결국 생산물가치= 불변자본가치+가치생산물([가변자본가치=노동력가치]+잉여가치)이다. 가치생산물이 노동의 생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불변자본 가치 역시 노동의 생산물이라고 전제한다면 가치의 원천은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3) 의문

 

(1)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량이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많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주어져 있는 보장은 없다. 그 가치량은 노동력 가치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 따라서 노동과정을 지휘통제해서 더 많게 되는 것을 보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 감독노동

 

(2) 노동자는 바보인가? 왜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자본가가 가져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가?

 

자신이 생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의 경험적 의식에는 잉여가치가 자본투자의 대가로서의 이윤으로 나타난다. -> (4)에서 부연설명

 

자신이 생산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자본가에게 받는 임금이 아니면 먹고 살길이 막연하기 때문에 적당한임금만 주면 최종생산물의 소유권은 자본가가 갖는 것을 인정한다는 노동계약을 승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3) 정말 이윤의 본질은 잉여가치인가? 자본가에게는 그 이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일말의 논거도 없는가? 다음과 같은 논거가 있다.

 

생산을 위한 자본의 제공은 소비를 절제한 것, 즉 비효용이다. 이윤을 이를 보상한 것이다(19세기 초 시니어와 세이).

 

1870년대 마샬은 절제를 기다림으로 대체한다. 자본가가 자신의 재산을 소비에 전부 사용하게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이윤취득을 정당화한다.

 

100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년간의 계약으로 이것을 대부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장래재보다 현재재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한다. 따라서 1년 뒤에 반환될 100원에는 추가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뵘바베르크).

 

비판: 과연 자본가는 전체 소득을 소비하지 않는 절제를 하거나 이윤이라는 대가를 가다리면서 어떤 희생을 하는가? 자기 요트에 앉아서 100만달러의 소득을 전부 소비하지 않고 그중 50%를 투자하기로 결정하는 이들이 자본가들 아닌가?

 

자본가의 이윤은 그가 생산과정에 추가한 자본에 의해 부과된 추가(혹은 한계) 생산량과 동일하다(1893년 클라크 <부의 분배>) - 한계생산성이론).

 

비판: 단순히 이윤이 무엇과 양적으로 동일하다는 설명은 그 이윤의 원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추가 생산량을 부과하는 것(생산적인 것)은 물리적 자본이지 자본가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가가 이윤을 갖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본소유는 생산적 행위가 아니다’.


(4) 경험적 의식에는 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가?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현상형태가 그 본질을 은폐하기 때문이다(경험적 의식에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것과 유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로, 즉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나타나는 이유

 

임금형태 하에서는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처럼 보이기 때문에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분할되는 노동일의 모든 흔적은 소멸된다. 즉 잉여노동 또는 불불노동조차 지불노동으로 나타난다.

 

첫째, 자본과 노동의 교환은 보통 상품의 매매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 네가 하니까 나는 준다. 네가 주니까 나는 한다.'

 

둘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이기 때문에 면화의 가격이 불합리한 표현이 아닌 것처럼 노동(노동력의 사용가 치명name)의 가격 또한 불합리한 표현이 아닌 것 처럼 나타난다.

 

* '면화의 가치'에서 '면화'는 면화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명이다. 보통의 경우 이렇게 사용가치명을 상품명으로 해서 그 '상품의 가치'이라는 형식의 표현을 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력 상품의 경우는 그 사용가치명을 써서 '노동의 가치'라고 표현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라고 표현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고 후자를 전도시킨다.

 

세째,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은 노동력이지만 제공하는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기능인 일정한 유용노동이다. 이 동일한 유용노동이 동시에 일반적 노동으로서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따라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매=(정말로) 제공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러저러한 노동들이 아니라 그런 모든 노동을 할 능력으로서의 일반적인 노동력이라는 사실)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 다른 상품들에서는 제공되는 것과 판매되는 것이 일치한다=다른 상품들에서는 제공된 것의 가치가 바로 그 상품의 가치이다.

 

네째, 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시점이 아니라 그의 노동을 제공한 후에 화폐를 받으며 따라서 사실상의 노동력에 대한 지불수단이 노동에 대한 지불수단으로 보인다.

 

다섯 째, 임금은 노동일이 길면 많이, 짧으면 적게 지불된다. 그래서 임금은 수행된 노동에 대하여 지불되는 것처럼 보인다.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나타나는 이유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면, 따라서 이윤의 원천이 착취되는 잉여노동이라면 이윤의 양은 생산수단과 결합되는 노동의 양에, 즉 가변자본의 양에 비례해 증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혹은 현상형태 상으로는 (장기적으로) 이윤의 양은 투자되는 총자본의 양에 비례한다. 정비공장 자본가 병철이는 5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식품공장 자본가 건희는 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해도 양자가 투자된 자본의 총액이 같다면 양자가 얻는 (장기적) 이윤은 같다.

 

- 이윤율R=S/(C+V)이다. 분모 분자를 V로 나누면 (S/V)/(1+(C/V))이다. 착취율(=S/V)이 동일하다면 이윤율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C/V)이 낮을수록 높다.

 

* S=잉여가치 C=고정자본가치 V=가변자본가치

 

- 각 산업 사이에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 말미암아 이윤율의 차이가 생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투자한 자본의 총액은 같은데 이윤은 차이가 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므로 이윤율이 높은 산업부문으로 자본이 몰리게 되며 공급 과잉이 되어 이윤율이 떨어지면 수요와 공급이 일치되는 선까지 다시 자본이 빠져나가게 된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산업간의 이윤율은 균등화(균등이윤 또는 평균이윤)되고 따라서 이윤은 가변자본의 양이 아니라 투하되는 총자본의 양에 비례하게 된다. 실로 이윤율R부터가 투자자본(=총자본투하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S/(C+V)), 즉 가변자본만이 아니라 불변자본도 잉여가치의 생산에 기여한 것으로 상정되는 수식으로 표현된다.

 

* 균등이윤율 = 잉여가치총액/투하자본총액

 

-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따른 이윤율의 차이가 균등화되는 과정을 통해 가치는 생산가격으로 전형된다.

 

* 이윤율이 균등화되기 이전

 

산업 A의 생산물 가치 = C5+V5+S5

산업 B의 생산물 가치 = C3+V7+S7

 

* 이윤율이 균등화된 다음(er = 균등이윤)

 

산업 A의 생산물의 생산가격 = (C5+V5)+er6

산업 B의 생산물의 생산가격 = (c3+v7)+er6

 

- 실제 시장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생산가격이다. 그러나 가치와 생산가격 간에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체계적인 관계(이윤의 총계와 잉여가치의 총계가 일치하고 생산가격의 총계와 가치의 총계가 일치한다)가 성립하므로 궁극적으로 가치가 가격을 규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연 1

 

1. 감독, 지휘, 경영 노동에 대한 대가와 이윤은 구별되어야 한다.

 

1) 어떤 노동이든지 간에 이윤을 자본가가 행하는 노동에 대한 대가로 보기에는 다른 노동에 대한 대가와 비교할 때 너무나 그 양이 크다.

 

2) 현대 자본주의 기업들에서는 감독, 지휘, 경영 노동을 자본가가 하는 경우는 드믈다.

 

2. 대근이 예 재고

 

1) ‘일단증대된 수확량 300근을 황소의 기여만으로 돌릴 수 없다. 황소를 부리는 대근이의 노동 역시 기여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황소가 증대에 기여한 몫이 황소노동력의 재생산에 소요되는 물량 이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2) 황소를 돌보는데 들어간 비용과 황소로 하여금 쟁기를 끌게 함으로써 그 비용을 초과하여 증대된 수확량의 구분은 확실히 노동력과 노동의 구분과 같은 의 구분인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의 구분이기도 한가? 즉 자본주의적 농경에서 쟁기를 끄는 황소는 그 황소를 부리는 노동자와 나란히 자본가를 위해 잉여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노동가치론은 그렇지 않다고 간주한다. 노동가치론에서 황소는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이전할 뿐인 생산수단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황소가 정말로하는 잉여노동은 인간노동자의 잉여노동의 일부로 나타난다.

 

3) 2)를 통해 1)다시 재고하면 황소의 기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황소는 잉여생산물의 증대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잉여생산물은 전적으로 황소를 생산수단으로 사용하는 대근이의 노동에 의해 증대되었다.

 

3. 기계는 가변자본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가?

 

1) 대근이 예에서 황소를 기계로 대체해도 결과는 같다. 증대된 수확량 300근은 기계로 쟁기질을 한 결과이며 1년 동안의 기계의 구입 및 유지비는 100근으로 충족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근이 예의 목적은 노동력과 노동의 개념적 구분을 ()적으로 예시하는데 있지 가변자본의 개념적 이해에 있지 않다. 맑스 자신이 이미 노동력과 노동의 개념적 구분을 설명하는 가운데 기계와 기계의 작동의 구분을 그러한 구분과 같은 종류의 구분으로 언급하고 있다. 노동력은 - 기계 자체가 그 작동과는 다르듯이 - 그 자체의 기능인 노동과는 다른 것이다.” (자본 1권 제 6편 임금 제 17장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화) 게다가 대근이 예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속한다고 할 수도 없다.

 

2) 그래도 대근이 예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기계는 가변자본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은가? 즉 기계는 자신의 유지 및 대체 비용을 초과하는 가치를 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원리상 모든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해도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있지 않을까? 유동민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자본주의사회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외의 사회들과는 구별된다. ,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취업이 결정되고 나면, 고용주인 자본가가 지정하는 작업장에서 일정한 지휘·통제로 특징지워지는 위계구조 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설명한 노동력 상품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량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만약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량을 생산한다면, 그 초과분은 누구의 것이 될까? 당연히 자본가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잉여생산물의 소유 및 처분권한은 자본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이 아닌 다른 생산요소, 노동수단이나 노동대상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생하지 않는다. 노동수단이나 노동대상의 경우에는 그 가치크기 만큼을 생산물에 그대로 이전시킬 따름이다.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되며, 그것은 노동과정 내에서 인간의 노동이 수행하는 주체적인 역할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성능 좋은 기계를 사다 놓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동이 작용하지 않으면 기계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연 2

 

(1) 노동력의 사용, 즉 노동만이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 기계의 사용이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는 말과 기계가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는 말은 다르다. 기계의 사용은 기계를 사용하는 노동인 반면 기계는 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따라서 가치를 증대시킬 수도 없다.

 

(2)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작동하는 훌륭하고 성능이 좋은 기계일 수록 그 기계를 사용하는 노동 가운데 일부의 노동이 고도의 질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 다수의 미숙련단순노동자와 소수이지만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적 노동자와 결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