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Where profit comes from (By Chris Harman)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가 (크리스 하만)
* 출처: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1995년
http://www.marxists.org/archive/harman/1995/madhouse/1-gonemad.htm
In everyday language we often say that workers are paid ‘for their labour’. But Marx pointed out that the phrase ‘their labour’ means two different things.
일상 언어에서 종종 우리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해’ 지불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들의 노동’이라는 구절이 두 가지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It means the labour they do, but it also means their capacity to work – which he baptised ‘labour power’.
그것은 그들이 하는 노동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의 노동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을 그는 ‘노동력’이라고 명명했다.
The two things are very different. People’s capacity to work depends on them getting enough food, shelter, clothing and rest time to enable them to arrive at work each day fresh enough to put in the required effort and pay sufficient attention to the tasks facing them. They will be physically incapable of work unless they get paid enough to buy these things. As Adam Smith noted:
그 두 가지는 매우 다르다. 사람들의 노동 능력은 그들이 충분한 음식, 거처, 의류 그리고 휴식 시간 - 요구받는 노력을 기울이고 할당된 업무들에 집중할 수 있을 만한 활력을 지닌 채 매일 작업장에 출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 - 을 얻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들을 구입하는데 충분할 만큼 지불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육체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특기한대로:
There is a certain minimum below which it is impossible to reduce for any considerable time the ordinary wages of even the lowest species of labour. A man must always live by his work, and his wages must be enough to maintain him. They must even on most occasions be somewhat more; otherwise it would be impossible for him to bring up his family and the race of such workmen could not last beyond the first generation.
가장 저급한 노동이라도 그것에 대한 통상적 임금을 다소간 오래 동안 그 아래로 깎는 것이 불가능한 일정한 최소치가 있다. 노동자는 언제나 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며 그의 임금은 그를 유지하는데 충분해야 한다. 게다가 임금은 대개의 경우 약간이라도 더 높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며 그러한 노동자들의 족속은 첫 세대를 넘어서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ly what counts as ‘enough’ for workers depends on the job they do and the general conditions in the society in which they live. So workers in Western Europe, the US, Japan or even South Korea today normally expect to get better food, shelter and clothing and more rest time than did the Manchester workers Engels met in the mid-1840s – or, for that matter, many workers in India or Africa today. And the more farsighted employer sometimes recognises that he must provide his workers with certain minimum conditions if they are to toil productively, just as the clever farmer knows he has to give his cows an adequate amount of hay if he is to get a high milk yield. An article in the Financial Times in January 1995 reported, ‘Many managers realise... that unless their staff take their holidays and maintain a life outside work they will fail to perform effectively. “I insist on my staff taking their holidays,” explained a partner at one leading British accountancy firm. “Otherwise they become less productive”.’
정확히 어느 정도가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것으로 셈되는지는 그들이 행하는 직무와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전반적 조건들에 달려 있다. 이를테면 서유럽, 미국, 일본 또는 심지어 한국에서도 노동자들은 오늘날 대개 1840년대 중반에 엥겔스가 만났던 맨체스터 노동자들보다 - 또는 그 문제라면, 오늘날의 인도나 아프리카의 노동자들보다 - 더 나은 음식, 거처, 의류와 더 많은 휴식 시간을 얻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더 멀리 내다보는 고용주들은 때때로 생산적으로 노동하게 하려면 노동자들에게 어떤 최소 조건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똑똑한 농부가 고품질의 우유를 얻으려면 소들에게 적당한 양의 건초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1995년 1월 <파이낸셜 타임즈>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많은 경영자들이 직원들이 휴일을 누리며 노동 외의 생활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한 주요 영국 회계 회사의 한 간부 사원은 “저는 제 부하 직원들에게 휴일에는 반드시 쉬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덜 생산적이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Of course, many employers do not see it like this. They resent every penny they spend on wages and every minute workers are not toiling for them. And the workers certainly do not see their wage as being just a means to enable them to work for the employer. They see it as something which gives them the chance to buy what they want – whether it is a few pints of beer, a secondhand car, toys for the kids, or a couple of weeks holiday. That is why there is always a continual struggle between employers and workers, with employers trying to force wages down below the minimum needed to sustain the lives of the workers’ families, and the workers trying to force wages above this minimum, to give themselves a little more ‘free time’ and a few ‘little luxuries’.
물론, 많은 고용주들은 달리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임금으로 지불하는 단 1원과 노동자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단 1분도 아까워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확실히 임금을 그들이 고용주를 위해 노동하도록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이 원하는 것 - 몇 병의 맥주일 수도 있고, 중고차일 수도 있고 자녀들을 위한 장난감일 수도 있고 2주 동안의 휴가일 수도 있다 - 기회를 주는 무엇인가로 본다. 그것이 언제나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이 계속 싸움을 벌이는 이유이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는데 필요로 되는 최소치 아래로 깎으려고 시도하고 노동자들은 이 최소치 위로 올리려고, 그래서 약간의 더 많은 ‘자유 시간’과 약간의 ‘소소한 사치재’를 누리려고 시도한다.
But the reality under capitalism today, just as much as in Marx’s time, is that the mass of manual and white collar workers are physically or mentally exhausted when they finish work, spending their money on things that do little more than restore them to a condition to resume work the next day or the next week. You don’t see many manual or white collar workers who are not tired when they crowd into the buses or trains to work in the morning, or when they crowd into them again to return home in the evening.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대만큼이나 오늘날 자본주의 하의 현실에서도 육체 및 화이트 칼러 노동자들 다수는 하루 일을 마칠 때쯤이면 심신의 활력이 고갈된다. 그들은 임금으로 다음 날이나 다음 주에 노동을 재개할 수 있을 만한 상태로 그들을 회복시켜주는 작용 이상은 거의 하지 않는 것들을 구매한다. 아침의 출근 버스나 기차에서 북적이는 사람들 틈새에 끼어 있을 때, 저녁에 다시 퇴근 버스나 기차에서 사람들 틈새에 끼어 있을 때 지쳐 있지 않은 육체노동자나 화이트칼러 노동자들은 많지 않다.
The wage or salary the worker gets depends on the cost of restoring this capacity to work – the cost of replenishing ‘labour power’. If wages are too low, workers will be ill nourished and too tired to work adequately. They won’t want to work and the capitalist won’t be able to get as much production out of them as he wants. If, on the other hand, the wage is greater than the cost of restoring the workers’ capacity to toil, the employer will do his utmost to replace them with other workers he can get more cheaply.
노동자가 얻는 임금이나 봉급은 이 노동 능력을 회복시키는데 드는 비용 - ‘노동력’을 재충전하는데 드는 비용 - 에 따라 결정된다. 임금이 너무 낮으면 노동자들은 충분히 먹고 마시지 못해 노동을 제대로 하기에는 너무 피곤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고 자본가는 그들로부터 원하는 양 만큼의 제품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 임금이 노동자의 노동 능력을 회복시키는데 드는 비용보다 크다면, 고용주는 그들을 더 싸게 부릴 수 있는 다른 노동자들로 대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Just as with any other good that is bought and sold, the value of the worker’s labour power depends on how much labour is needed to produce it. That is, it depends on how much labour goes into producing the sustenance needed to keep the worker fit, healthy and ready to work – how much is needed to provide three meals a day, transport to work, a little relaxation in the evenings and at weekends, the upbringing of children who become the next generation of workers. But the amount of labour required to produce the goods that make you fit and able for work is not the same as the amount you can actually do once you start working. It may only take four person hours of society’s total labour to produce your family’s food, shelter and clothing. But you are capable, under pressure, of putting in eight, ten or even 12 hours a day. And the capitalist will refuse to pay you your wage unless you do so.
구매되고 판매되는 여느 재화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도 그것을 생산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가에 달려 있다. 즉, 그것은 노동자를 노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들어가는가에 - 하루 세끼 식사, 출퇴근 교통편, 저녁과 주말 동안의 약간의 휴식, 다음 세대의 노동자들이 될 아이들의 양육을 제공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가에 - 달려 있다. 그러나 노동자를 건강하고 노동할 수 있게 하는 재화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노동자가 일단 노동을 시작할 경우 실제로 할 수 있는 노동의 양과 동일하지 않다. 노동자 가족의 음식, 거처 그리고 의류를 생산하는 데는 사회의 총노동 시간중 노동자당 네 시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압력을 받을 경우 하루에 여덟, 열 또는 심지어 열두 시간 동안도 노동할 수도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임금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He pays you the going rate for your labour power. But he gets from you a day’s labour – and that is worth much more than the going rate for a day’s labour power.
그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현재 시세를 지불한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로부터 하루의 노동을 얻는다 - 그리고 그것은 하루치 노동력의 현재 시세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다.
So if it takes four hours work to produce the goods you live on but you work an eight hour day, then the capitalist is taking four hours work a day off you for nothing.
따라서 노동자의 [하루] 생활에 필요한 재화들을 생산하는데 네 시간의 노동이면 되지만 노동자가 하루에 여덟 시간을 노동한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하루 네 시간의 노동을 공짜로 가져가는 것이다.
Because he controls the means of production he is able to pocket a surplus of four labour hours a day. This surplus Marx called ‘surplus value’ – the source of profit, interest and rent.
생산수단을 통제하기 때문에 그는 하루 네 노동시간의 잉여를 [하루 네 시간의 잉여노동을] 자기 주머니로 가져갈 수 있다. 이 잉여를 [상품의 가치 중 이 잉여노동이 생산한 가치 부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 이윤, 이자 그리고 지대의 원천.
The capitalist grabs this value off the worker every day. And by doing so, he continually puts himself in a position to grab still more surplus value. For the surplus value provides him with the wherewithal to get further means of production and to force workers to slave for him in future.
자본가는 매일 노동자로부터 이 가치를 가로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훨씬 더 많은 잉여가치를 가로챌 수 있는 위치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한다. 잉여가치가 그에게 더 많은 생산수단을 마련해 노동자들을 미래에도 계속 그에게 예속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자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Yet, after all this has happened, the capitalists claim they are doing the workers a favour by allowing them to work. They claim they are the ‘work providers’, as if no social labour could take place without their prior robbery. And some people within the working class movement are stupid enough to refer to them as ‘partners in production’, as if the slave owner is the ‘partner’ of the slave or the feudal lord the ‘partner’ of the feudal serf.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이 노동자들을 이롭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이 [자신들이] ‘노동 공급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그들의 사전 약탈 없이는 아무런 사회적 노동도 행해질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운동 내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을 ‘생산 파트너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어리석다. 그것은 노예 소유주가 노예의 ‘파트너’라거나 봉건영주가 봉건농노의 ‘파트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The reality is that, each time the worker works, he adds to the control which the capitalist exercises. This is true even if conditions are such as to allow an improvement in the workers’ living standards. As Marx puts it in Capital:
실상은 노동자의 모든 노동 시간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행사하는 통제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 조건이 개선되어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더라도 진실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대로 말이다:
Just as little as better clothing, food and treatment do away with the exploitation of the slave, so little do they set aside that of the wage worker. A rise in the price of labour only means that the length and weight of the golden chain the wage worker has already forged for himself allow of a relaxation of the tension of it.
더 나은 의류, 음식 그리고 대우는 노예의 착취를 제거하지 않은 것처럼 임금 노동자의 착취도 폐기하지 않는다. 노동가격의 상승은 임금 노동자가 이미 스스로 단조한 황금 사슬의 길이와 무게가 그것의 팽팽함이 약간 완화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만을 의미할 따름이다.
* 노동가격: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가 자본가한테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기 때문에 ‘노동가격’이란 표현은 허위적이다. 위 인용문에서 마르크스는 그 점을 깜박 잊은 것이 아니다.
This enables the capitalists to get into their hands all the plant machinery and raw materials needed for further production. They can then pretend to be the ‘wealth creators’, the people who ‘provide work’ for others. In fact, what they have done is steal the product of the labour of others – and then forbid it to be used for further production unless they are allowed to steal again.
이렇게 해서 자본가들이 생산증대에 필요한 모든 공장 설비와 원료들을 수중에 넣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들은 그러면서 ‘부의 창조자들’인 체, 타인들을 위해 ‘노동을 공급하는’ 이들인 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하는 것은 타인들의 노동생산물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그들이 다시 도둑질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한 그 노동생산물을 추가 생산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질문하려고 그랬는데
>수업 끝나고 바로 약속도 있고 글로 쓰는게 더 깔끔할 것 같아서 여기에 글 남깁니다
>
>수업시간 내내 들은 이야기의 요지는
>자본가 = 착취자
>노동자-자본가 관계 = 권력에 의한 지배관계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런 시각으로 봐야하는지 말이지요
>
===
한 학기 동안 수업들어야 할 주제를 1시간에 요약한 것을 듣고 잘 이해안가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받아들이기 힘든것이지요.
===
>대근이와 황소의 이야기에서
>황소(노동자)에 의한 순익 200근을 대근이(자본가)가 착취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착취'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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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적으로 쓴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착취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만 적용됩니다.
===
>착취라 함은 그것을 당하는 쪽이 고통을 당해야 성립하는 것인데
>위의 이야기와 논리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한 설명도 없습니다
===
착취는 착취를 당하는 이가 그 착취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착취 때문에 고통을 받느냐 안받느냐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착취는 주관적 상태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제적 지배관계에 대한 개념입니다. 노동가치가 생산가격의 실체임을 논증할 수만 있다면 임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취를 부인하려면 노동가치론을 논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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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노동자)가 자신이 얻는 100근에 대해서 만족한다면 '착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못하다면 성립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제 생각은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차지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착취'가 성립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
위에서 말한대로입니다. 노예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노예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노예가 다른 노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사실을 알고 더 행복해졌다고 해서 노예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고통이나 만족과는 무관한, 인간들간의 객관적 관계의 한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어떤 주류경제학자도 노동자의 고통이나 만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노동가치가 생산가격의 실체가 아님을 논증하고자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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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측면에서 '정도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자본가가 자신의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 노동력가치를 강제로 줄이는(평가절하하는) 상황이고 이 때문에 노동자가 고통을 당한다면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노동자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노동력가치를 인정하고 만족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만약 황소(노동자)가 100근의 처우로 제대로 된 삶의 영위가 힘들다면 이를 150근, 200근으로 변경할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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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통해 변경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철폐되지 않는 이상 잉여가치의 이윤의 형태로의 착출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를 그렇게 보는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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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근이(자본가)의 잉여가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생각해보지요
>대근이(자본가)가 황소(노동자)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비용이 300근이라면 즉,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대근이는 황소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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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이윤이 보장될 때만 자본가가 자본을 투자한다는 사실과 그 이윤의 실체가 잉여가치라는 사실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자본의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자본가에게 보장해주는 사적 소유권은 법적 및 제도적 사실이지 새로운 재화 및 용역이 생산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물질적 사실이 아닙니다. 그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지 않는, 즉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사회 전체가 민주적 합의를 통해 투자결정을 내려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동일한 재화와 용역이 생산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달라지질 때 잉여가치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자본가의 생산적 기여가 없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실로 노동가치론은 노동을 재화나 용역의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봅니다. 그 노동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소유권 관계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간에 비대칭적인 권리를 부여할 수는 있어도 생산물의 가치를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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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근이가 황소를 부리는 것은 수확량을 늘려보기 위함이지 황소를 키우고자 함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대근이같다면(잉여가치 없이도 황소를 부린다면) 모든 황소들도 잘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대근이가 황소에게 서비스를 제공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근이가 황소에게 착취당했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이와 관련하여 영주와 농노의 계급적 지배 관계와 비교한 것은 너무 비약인 것 같습니다)
>저는 노동자-자본가 관계가 '계약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계약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자본가가 가지는 상황이 있겠으나 그것을 권력관계,지배관계로 비약시키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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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했으되 납득이 안되는 것이겠지요. 체계적인 정치경제학 강의를 들으면 납득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이 게시판에서 정치경제학으로 제목 검색을 하면 마르크스 경제학 입문에 도움이 되는 정보글이 하나 나오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좁게 보면 대근이가 황소에게 서비스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황소가 인간을 떠나서 잘 살기는 힘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인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 인위적으로 야생소를 황소로, 가축으로 '개종'시킨 것은 인간입니다. 병을 준다음에 약을 주는 것을 서비스라 할 수는 없겠지요.
수확량 '순' 증대를 노리지 않고 황소를 부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본가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민주적인 대의기구를 통해 투자결정을 내리고 이윤에 해당하는 것을 직접적으로든 세금으로 받은 다음에 간접적으로든 노동자들에게 정의롭게 분배한다면 잉여가치를 착출당하지 않은채 노동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위 '사회주의' 사회 이야기 입니다.
계약하는 쌍방 사이에 권력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으면 그들간의 계약은 불공정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본가는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생존수단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고 노동자는 몸뚱아리(노동력)밖에는 갖고있지 않으므로 자본가는 자신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해 적정한 이윤의 창출을 보장해주는 노동계약을 노동자에게 '강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계약은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임노동자는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계약을 '거부'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모든 계약을 거부할 수, 즉 '굶어죽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반면 봉건주의 시대의 농노나 소작농에게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도 없었으니 그것에 비하면 확실히 임노동자는 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불공정한 계약의 구조적 가능성과 그 가능성의 필연적 현실화는 사실로 남습니다. 즉, 생산물 가치의 원천을 노동이라고 보고 임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을 불공정한 것으로 본다면, 이로부터 노동자로부터 자본가에게로의 잉여가치 착출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가와 임노동자 사이의 계약이 너무 과도하게 불공정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수 있고 마련되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의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착취가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에 위해를 가한다는 총자본의 인식을 대변하여 국가가 나선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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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생산물가치가 노동만의 생산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논리는
>자본가는 불변자본가치 등을 포함한 생산의 '판'을 짜서 소유하고 있는 것 외에 직접적인 '생산'과는 무관하므로 생산물가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인데
>저는 직접적 생산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며 그 '판'을 짠 것 자체로 '생산의 시작'을 만들었으므로 생산물가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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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생산에 기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자본가의 투자 없이는 생산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본가의 투자가 생산의 일부인 것은 아닙니다. 자본가의 투자는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부일 뿐이고 그것도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소유권법적으로만 일부일 뿐입니다. 생산물의 가치를 얘기할 때 우리는 그 생산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발적인 경제구조들을 추상하고 오직 생산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관점에서만 얘기해야 합니다. 그 우발적인 경제구조들은 그 생산 자체를 통해 생산된 것들을 분배하는 제도화된 약속, 컨벤션일 따름입니다. 그 컨벤션을 뒷받침하는, 무슨 초역사적 경제법칙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역사적 경제법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생산물)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이야말로 주류 경제학처럼 컨벤션, 즉 경제의 특정 역사적 '외피'가 아니라 경제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진정한 경제학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안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서 하는 얘기가 훨씬 그럴싸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근본적 패러다임 대립의 모습이 사회과학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쪽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지성수준이나 뇌용량이 다른쪽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뇌용량이나 지성수준보다 더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상한' 말을 진리라고 믿는 수 많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심지어는 자본주의 헤게모니국인 미국의 쟁쟁한 대학들에도 있습니다. 물론 정치경제학이 주류경제학보다 더 쉬운 수학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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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생산이라는 것은 노동의 관리와 경영의 측면에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가=경영자 인 상황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자본가=경영자 가 아닌 상황에서는 어떠한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시니어와 세이, 마샬, 뵘바베르크 등의 논거를 수업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 논거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하나의 의문점은
>왜 자본가의 투자를 전혀 의미없는 행위로 인식하는가 입니다
>자본가가 자본을 쓸 욕구를 절제하고 일정 시간을 기다렸으므로 이윤을 기대한다는 것은 돈을 가만히 놓고 시간이 지나면 돈이 불어나길 바란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욕구를 절제하고 돈을 정말 가만히 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가치없는 행동과 시간이 되겠지요
>하지만 자본가들은 '투자'라는 행위를 통해 '생산의 시작'을 일구어냅니다
>그 '시작'에 대한 모든 위험부담과 선택은 자본가의 몫입니다
===
시니어 등의 얘기는 투자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투자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으니 어떤 투자에는 노동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노동의 댓가로 보기에는 너무나 막대합니다. 또한 경영과 소유가 거의 완전히나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경우 투자에는 그저 '자본을 투입한다'는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는지를 결정하는 노동은 경영자가 합니다. 물론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을 투입한다'는 사실이 생산에 속하는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산수단이 투입되어야 생산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은 생산에 기여하는 사실이 아니라 생산하겠다는 실효성있는 '선언'일 뿐인 것입니다. 그 생산수단이 반드시 자본이어야만 생산이 시작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위험부담을 한다고 해서 위험부담을 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받아야 한다'는 자본주의 경제가 보장해주는 사실이지 경제나 생산 '자체'에 속하는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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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본가의 투자가 항상 성공해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이너스 잉여가치가 생긴다면(손해) 노동자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이런 면을 고려해본다면 자본가도 생산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자본소유는 생산적 행위가 아니다' 라는 말은 자본을 생산에 있어서 정체되어 있는 요소라고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시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본은 생산의 시작이고 노동은 생산의 행위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
>ps 자본가의 노력과 노동자의 노력을 자로 잴 수 있다면 이런 논의가 길어질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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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본가는 투자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잉여가치를 본질로 하는 이윤은 끊임없이 어떤 자본가들에게로 흘러가 그 일부가 자본화됩니다. 즉 개별적인 자본가들은 흥망성쇠를 거쳐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가라는 계급은 안정적으로 재생산됩니다.
생산에 대한 모든 결정은 자본가나 자본가를 대신하는 경영자가 내리기 때문에 노동자는 시장에서의 결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질 이유가 없습니다.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조차도 관리감독노동을 소흘히 한 경영자'측'에게 책임이 물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임금이 깎이고 해고될 수도 있는 것이 노동자입니다. 반면 왠만한 자본가라면 망해도 3대는 먹고살 것이 남아 있기 마련이지요.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에 정당한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마르크스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신고전 경제학)을 가르는 핵심적 질문입니다. 두 경제학 중 무엇이 진실을 가리키는지를 공정히 판단해줄 심판자가 없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불가통약적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두 경제학중 어느것을 받아들이냐는 감수성과 취향과 세계관의 차이를 반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학생 시기에는 시간을 충분이 들여 양쪽 모두를 공부해 보고 천천히 마음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류경제학에 대해서는 기본적 이해가 되어 있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듯 싶으니 앞에서 얘기한 참고글을 검색해 읽어보고 도움을 받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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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verty of economics (By Chris Harman)
경제학의 빈곤 (크리스 하만)
* 출처: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1995년
http://www.marxists.org/archive/harman/1995/madhouse/1-gonemad.htm
Professional economists are meant to be able to tell us how all this has come about. Yet anyone who looks to them for illumination will be sorely disillusioned.
직업적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이들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해명을 기대하는 누구든 큰 실망만을 맛보게 될 것이다.
The dominant capitalist school of economics today is called the ‘marginal’ or ‘neo-classical’ school. This is what you will be taught if you study economics at further education colleges, in an adult education class or at university. Its proponents claim that their economics is a technical discipline, ‘the human science that studies the relationship between scarce resources and the various uses which compete for these resources’.
지배적인 자본주의 경제학파는 오늘날 ‘한계주의’ 또는 ‘신-고전’ 학파라 불린다. 이것은 고등 교육 칼리지들이나 성인교육반이나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때 당신이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의 주창자들은 그들의 경제학이 하나의 전문 분과, ‘희소한 자원들과 이 자원들을 두고 경쟁하는 다양한 용도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Production takes place, they claim, according to the ‘law of supply and demand’. Demand depends upon the choices individuals make, the margins by which they prefer some things to others as shown by the way they spend their money. Supply depends upon the cost of producing goods – how much it costs to employ the workers and to use the tools they work on. And something will be produced whenever the extra amount people are prepared to pay for it equals the extra cost of producing it.
생산은, 그들은 주장하는데,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수요는 개인들이 행하는 선택들, 그들이 화폐를 지출하는 방식에 의해 현시되는, 그에 따라 그들이 저것들보다 이것들을 선택하는 한계[대체율]에 달려 있다. 공급은 재화들의 생산비에 달려 있다 -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그들이 갖추고 노동하는 도구들을 사용하는데 얼마나 많이 비용이 드는가. 그리하여 무엇인가가 생산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추가 금액이 그것의 추가 생산비와 같기만 하다면 말이다.
Wonderful graphs can be constructed from these theories with supply moving in one direction and demand moving in the other, with what is finally produced depending on where the two graphs meet. The trouble is, these graphs in reality explain nothing since they do not explain where supply and demand come from in the first place. On the demand side they do not explain why the desires of some people (rich landowners, property millionaires or heads of privatised industries) translate themselves into ‘effective demand’, ie demand backed up by hard cash, while the desperate needs of other people (the unemployed, the low paid, the hungry peoples of Africa and Latin America) are ignored. On the supply side they do not explain why things which are desperately needed are not produced when the resources for them exist in abundance.
이 이론들로부터 수요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공급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굉장한 그래프들이 그려질 수 있다. 최종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두 그래프들이 어디에서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골칫거리는 이 그래프들이 애초 수요와 공급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요 측면에서는 그것들은 왜 어떤 사람들 (부유한 지주들, 백만장자들 또는 사기업들의 수장들) 의 욕망들은 ‘유효수요’, 즉 현금에 의해 뒷받침 되는 수요로 번역되는 반면 다른 사람들 (실업자들, 저임금 소득자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굶주리는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들은 무시되는 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공급 측면에서는 그것들은 왜 긴급하게 필요로 되는 것들이 그것들을 위한 자원이 풍부하게 존재하는 는 데도 생산되지 않는 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Marginalist’ economists say the extent of people’s incomes, and therefore the extent of their demand, depends on how much they each contribute to the production of wealth. People get paid, it is claimed, according to the extra value their work creates. But this begs the question, why do some people get paid ten or 20 times as much as others for their labour, and why do some people get paid who don’t work at all but simply own wealth? What work does the shareholder or the moneylender do?
‘한계주의’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소득 정도는, 따라서 그들의 수요의 정도는 그들 각자가 부의 생산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이 창출하는 추가 가치에 따라 지불받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나 스무 배 더 많이 지불받고, 왜 결코 노동하지 않고 그저 부를 소유하고 있을 뿐인 일부 사람들도 지불을 받는 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주주들이나 대금업자들은 무슨 노동을 하는가?
There is an easy answer, to this, say the economists. Not only labour but also capital is involved in producing things. And just as labour gets paid according to what it contributed to wealth creation, so does capital. Each ‘factor of production’ gets a ‘reward’ equal to its ‘marginal output’.
그 경제학자들은 이 질문은 답하기 쉬운 질문이라고 말한다. 노동만이 아니라 자본 또한 물건들을 생산하는데 들어간다. 그리고 노동이 그것이 부 창출에 기여한 것에 따라 지불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 또한 지불받는다. 각 ‘생산요소’는 그것의 ‘한계산출’과 동등한 ‘보상’을 얻는다.
In fact, this argument solves nothing – apart from making it easier for the owners of capital to have an easy conscience. It really amounts to saying that those who are rich deserve to get richer. It relies on a tautology – like saying that ‘2 equals 2’ or ‘a cat is a cat’. For if the economists are asked how you measure the value of capital they refer to the ‘marginal output’ that capital produces. But if you ask them how you measure this ‘marginal output’ they refer to the value of the capital used up in producing it. They end up saying, in effect, ‘The value of capital equals the value of capital’, or, ‘Profit equals profit’.
사실, 이 논변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한다 - 자본 소유자들이 편한 양심을 갖는 것을 더 쉽게 할뿐이다. 그것은 실상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하게 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동어반복에 의존한다 - ‘2는 2와 같다’라거나 ‘고양이는 고양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런 얘기다: 어떻게 자본의 가치를 재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자본이 생산하는 ‘한계산출’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한계산출’을 어떻게 재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그것을 생산하는데 사용된 자본의 가치를 지적한다. 그들은 결국 ‘자본의 가치는 자본의 가치와 같다’, 또는, ‘이윤은 이윤과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The only thing orthodox economics can say is that certain things are bought and certain things are sold at present, without saying why certain things are produced and not others, why some people are rich and some poor, and why some goods pile up unsold while people who desperately need them go without. Orthodox economists cannot tell us why sometimes there are booms and other times slumps.
주류 경제학자들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현재 어떤 것들이 구매되고 어떤 것들이 판매된다는 것이다. 왜 다른 것들이 아니라 그 어떤 것들이 생산되고, 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지, 그리고 왜 어떤 재화들이 판매되지 않은 채 쌓여있는 한편에서 긴급하게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얻지 못하는 지는 말하지 않는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우리에게 왜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오는지 말해줄 수 없다.
These points were made against marginalist economics more than 80 years ago by the Austrian Marxist Rudolf Hilferding and the Russian revolutionary Nicolai Bukharin. They have been made again more recently in a rigorously logical form by dissident academic economists known as the ‘Cambridge school’.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과 러시아 혁명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80여년 전에 이미 주류 경제학에 맞서 이 점들을 지적했다. 더 최근에는 ‘케임브리지 학파’로 알려진 이단적인 강단 경제학자들이 엄밀하게 논리적인 형식으로 이 점들을 다시 한 번 지적했다.
There are many other absurdities at the heart of orthodox economics. Its model of the market assumes perfect knowledge of all economic transactions, not only in the present but also in the future – a logical impossibility. It uses the ‘theory of comparative advantage’ borrowed from the early 19th century economist David Ricardo to preach unlimited free trade to the world’s poorest countries – but the original theory was developed when capital did not have today’s freedom to move from country to country. It insists that if the state does not interfere then supply and demand will automatically balance – but its own equations show that not to be the case. Finally, orthodox economics insists that if the multiple factors which obstruct free competition in the real world – whether the monopoly powers of giant companies or trade unionists defending jobs – are removed things must get better. But the mathematics of their model actually show that removing one restraint but not others can actually make things worse.
주류 경제학의 핵심에 자리한 부조리들은 이것들 외에도 많다. 그것의 시장 모델은 현재의 경제적 거래들만이 아니라 미래에 경제적 거래들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을 가정한다. 물론 그 지식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게 제한 없는 자유무역을 설교하기 위해 19세기 초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로부터 빌려온 ‘비교우위 이론’을 이용한다 - 그러나 원래의 이론은 자본이 오늘날만큼의 국제간 이동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당시에 나온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공급과 수요는 자동적으로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역설한다 - 그러나 그것 자신의 방정식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주류 경제학은 현실 세계에서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다양한 요인들 - 거대기업들의 독점력이나 일자리들을 방어하는 노조들 - 이 제거되면 사정은 더 좋아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것의 모델의 수학적 계산은 다른 것들은 두고 그것들만 제거하면 사정은 실제로는 더 나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In fact the model offers no guidance to what is happening and what can happen in the real world. As one of the dissident economists, Paul Ormerod, pointed out in his Death of Economics, the orthodox wisdom is as much use in understanding the economy as medieval astrology was in predicting events. Economists who based themselves on the orthodoxy have completely failed to foresee the ups and downs of the world economy:
사실 그 모델은 현실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고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에 대해 아무런 지침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단적 경제학자들 중 하나인 폴 오르메로드는 그의 <경제학의 죽음>에서 주류 경제학의 지혜는 경제 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세 점성술이 사건들을 예측하는데 유용했던 정도로만 유용하다고 지적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세계경제의 부침들을 예측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Economic forecasts are the subject of open derision. Throughout the Western world their accuracy is appaling. Within the last 12 months alone, as this book is being written, they have failed to predict the Japanese recession, the strength of the American recovery, the depth of the collapse of the German economy, the turmoil in the European ERM.
경제 예측들은 공개적인 비웃음거리 대상이다. 서구 세계 도처에서 그것들의 정확성은 한심하다. 이 책을 집필 중이었던 지난 12 개월 동안 만에도 그것들은 일본의 경기후퇴, 미국 경제의 회복력, 독일 경제의 급락의 심각함, 유럽 환율조정제도의 혼란을 예측하지 못했다.
Yet the orthodoxy continues to be taught in schools, to be studied in universities and to be thrown in the face of anyone who suggests there might be an alternative to the existing system of market capitalism. Its basic contention, that the market is the only rational way to organise production, has been accepted in recent years not merely by the traditional right but by the leaders of the world’s Labour, social democratic and former Communist parties.
그러나 주류 경제학은 학교들에서 계속 교수되고 대학교들에서 계속 연구되고 기존 시장자본주의 체제에 대안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내는 이라면 누구의 면전에든 투척된다. 시장은 생산을 조직하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도라는 그것의 기본적 취지는 최근 들어 전통적 우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세계의 노동당, 사회민주당 그리고 이전 공산주의 정당들의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승인되어 왔다.
Such an acceptance is only possible if you do not challenge the absurdities of the world. The orthodoxy rests on taking the world at face value, on saying that things are as they are because they are as they are. But it is of no use to those who find life in the existing world increasingly intolerable, who want an alternative to long slumps interspersed with short booms, to rising unemployment and deepening poverty, to goods that cannot be sold on the one hand and people who cannot afford to buy them on the other. To come to terms with these problems you need a different approach.
그러한 승인은 세계의 부조리에 도전하기 않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주류 경제학은 세계를 액면가대로 받아들이는데, 현실은 현재 모습대로 있기 때문에 현재 모습대로 있다고 말하는데 기초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 호황들이 점점이 산재되어 있는 장기 불황들, 실업의 증가와 빈곤의 심화, 한 편의 판매될 수 없는 재화들과 다른 편의 그것들을 구매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대안을 원하는, 기존 세계에서는 삶이 점차 견딜 수 없게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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