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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공황/불황이 일어나는가? 그로 인한 대량 실업 그리고 민중의 고통은 누구의 책임인가?
거칠게 말하면, 마르크스는 노동착취로 인한 유효수요의 부족이 그 원인이라고 했다. 자본이 겨우 먹고 살만큼의 임금을 주기때문에 자본재로 생산한 제품이 소비할 여력이 없고 그로 인해 공황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즉, 현재의 경제적 고통은 계급갈등의 산물이며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케인즈는 장농에 돈을 숨겨놓고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물론 여기에는 문맥상 임노동자도 포함된다)때문에 공황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영화 넘버3에서 검사로 분한 최민식이 말한 것처럼.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죄를 지는 새끼가 나쁜 넘이지.' 케인즈는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결국 같은 소릴 하고 있다. '자본이 무슨 죄가 있느냐? 돈 안쓰는 새끼가 개새끼지.'
겉으로 보기에는 케인즈주의는 계급중립적이다. 유동성 함정에 빠져 유효수요를 창충하지 못하는 개새끼가 자본가인지, 자본의 주구인지, 아니면 임노동자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계급배반적이다. 공황발생의 책임을 자본이라고 규정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이론이므로(비록 케인즈가 사회주의와 각을 세우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계급에 반동적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사민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케인즈를 끌어들일 이유는 전혀 없다. 케인즈는 경기조절책으로서의 정부개입을 주장한다. 단기균형점이건 장기균형이건 결국 거시프레임 하에서의 경기와 고용을 다룬다. 그러나 사민주의는 결국 분배정책이다. 소득재분배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자는 철학적 바탕위에 서 있다. 도대체 사민주의자들과 케인지안의 접점이 어디란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정책적, 이론적 연관성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사민주의자들의 프로파겐더적인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케인지안들이 신자유주의자들보다 이념스펙트럼에서 보다 좌측에 위치한다고 볼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사민주의의 출발점은 결국 마르크스이다. 적어도 케인즈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가난한 이유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인때문이라고 갈파한 유일한 경제학자이다. 따라서 사민주의적 복지의 정당성은 마르크스에서 출발한다. 그런 마르크스가 말년에 몰락했다고해서 이를 부끄러워하고 옆집의 고상한 부자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케인지언도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그게 치유되는게 장시간이 걸리므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보지요.
그런데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을 끝까지 관철하다면 결국 분배측면에서 형평성이 도모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마르크스의 경우는 노자대립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요. 소위 근본주의자들이죠. 신마르크스주의자들중에는 스위지와 같은 과소소비론자들도 있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현재 자본주의가 노자대립만으로 설명하기는 전 어렵다고 봅니다. 노동자 내부에서도 엄청난 임금격차와 소득격차가 있고 또 한국에서 출신지역에 따라 (임금은 모르겠는데)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자본소득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자본가 내부에서도 재벌등 거대기업의 입장과 중소기업사장 벤처사장 영세자영업자 다 이해관계가 다르구요.
그렇다면 마르크스적인 노동-자본 대립시각으로만 현대 자본주의 문제점을 보는 건 좀 어폐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첫째 자본주의 자체는 스스로 형평성을 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형평성을 악화시킨다. 이것은 유효수요의 만성적 부족을 초래와도 연결이 되죠. 둘째 자본주의 자체는 많은 투기적 이익으로 인한 불로소득이 있다. 즉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섯째 자본주의 자체는 경기적인 면에서 불안정한다. 그것은 투자의 불확실성에 기반한다. 이것도 유효수요의 문제이다. 머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좀 더 보편시각에서 자본주의를 볼려면 굳이 마르크스에 전적으로 의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마르크스의 이론 중에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론특히 불황과 관련된 몇가지 이론을 빼고는요. 저번에 이와 관련해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이윤율하락 착취도등을 언급하면서 이야기 했던 것 같아요.
노동가와 자본가 즉 임금과 자본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이 틀렸다는 거지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이론체계를 전개해 가잖아요. 제가 언급했던 것은 굳이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다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마르크스의 이론체계가 노자대립론을 기반으로 전개하는데 뒤에 일부 저런 소리를 했다고 마르크스 이론체계를 전부 승인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근본적인 부분에서 현실에 안맞는데 말이에요.
노자대립을 중심이론으로 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많은 것들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한 공황에 이르는 과정을 사족들을 전부 떼버리고 아주 단순하고 거칠게 축약하면 이런거겠죠.
<자본가가 100개의 재화를 생산하여 유통업체에 100원을 받고 넘겼다. 그 중 80원을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받은 80원으로 유통업체에 가서 80개의 재화를 구매하여 소비했다. 자본가도 수중의 20원 중 10원을 이윤으로 축적한 다음 나머지 10원으로 10개의 재화를 구매하여 소비했다. 이제 유통업체의 현금과 재고는 90원과 10개. 자본가가 다시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켜 100개의 재화를 생산하여 유통업체에 들고 갔다. 그러나 유통업체는 90원밖에 없으니 100개를 모두 구매할 수 없고 또한 남아있는 10개의 재고는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판매 불가한 상황. 따라서 자본가의 납품은 불발되고 그 결과 임금체불 생산중단. 공황 시작.>
물론 현실은 이보다 굉장히 거대하고 복잡하고 신용거래나 승수효과등 온갖 변수들이 많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기본골격이 이와 같다는건 부인하기 어렵고, 순환사이클이 수없이 반복되다보면 최종적으로 모든 변수들은 소멸하고 기본골격으로 수렴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 보입니다. 저는 이거보다 더 알기 쉽게 공황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케인즈나 하이에크 계열의 주류경제학이란 것도 결국은 90원 밖에 없는 유통업체의 지불여력을 어떻게 해결할건가, 그리고 남아있는 10개의 재고들을 어떻게 해결할거냐에 대한 이론이겠죠. 정부가 재정정책을 통해 개입하여 수요를 강제로 만들어내거나, 화폐를 공급하여 금리를 낮추고 시장의 힘에 맡겨두면 자본가가 짱박아둔 10원의 이윤을 꺼내 새로운 투자를 하게 되서 저절로 해결된다거나. 이도 저도 안되면 은행을 통해 막대한 부채를 공급해서 소비를 진작시키거나 암튼. 물론 꽤 효과적인 방책이라서 오랫동안 버틸 수는 있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재정적자는 누적되고 자본가들의 신규투자 역시 새로운 성장동력이 없는 이상 마냥 계속될 수는 없는거고, 부채 역시 한계에 이르고... 어느 틈에 현실은 출구가 안보이는 시궁창.
사민주의 해법이란 결국 자본가가 짱박아둔 10원의 이윤을 '투자해라. 아니면 세금으로 걷어서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고 소비하게 하겠다' 인 거겠죠. 그럴려면 '이윤'에 대한 관점이 마르크스의 주장에 기반해야 하는건 당연한걸테구요.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잘 전달이 안되네요;;
금융의 이동 제한을 없앤건 그냥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거라서 그런건데, 그게 왜 신자유주의인지도 잘 모르겠구요.
저는 요즘 혹시 '신자유주의' 라는 말은 그저 '자본주의'라고 말하기가 뭔가 깨림칙하니까 바꿔서 부르는거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마치 좌파 라는 말이 뭔가 깨림칙하니까 진보라고 바꿔 부르듯이요.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가 의미적으로 뭐가 다른건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전자는 새누리당 의원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지만 후자는 꼴통 좌파들이나 하는 말인 것 같은 정도?
우선 사민주의자들이 케인즈를 자꾸 끌어들이는 걸 고깝게 보는 시각에는 공감이 많이 갑니다.
근데 사민주의와 맑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사민주의는 맑스라는 아버지를 '배반'한 자식 아닌가요?
굳이 사민주의 계보를 맑스와 연결시킨다면 말이죠.
전 이를테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 (베른슈타인식) 사민주의는 맑스주의가 아님. 껍데기만 그런 것처럼 꾸밀 뿐임. 저건 짜가임" 이라고 했던 주장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입니다.
참고로, 전 맑스주의자가 아닙니다.
미뉴에/
-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라는 아비를 배반했을지언정('배반'이라는 표현이 온당한지는 모르겠지만 뭐 대략 비슷하겠죠) 여전히 자신을 낳아준 아비임을 부인하지는 않았죠. 로자의 경우는 '하는 꼬라지가... 어디 한번 친자검사 좀 해보자'라는 식의 비판이었지, 제가 본문에서 표현한대로 '출발'이 마르크스라는 사실은 그 당시의 수정주의 논쟁에서도 당연한 전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사민주의가 중간중간 평화니 환경이니 하면서 옆길로 빠져나갔던 경우도 많지만 결국은 본래의 트랙인 경제 문제로 회귀했고 또 회귀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사민주의는 계급/계층갈등이라는 정치적 추동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케인즈주의의 이론적 특성상 그런 정치적 동력을 제공하기는 어렵습니다.
- 부자에게서 돈을 걷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의 강력한 정당성은 '그 돈이 원래 가난한 이들의 것이었다'입니다. 그런 수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론적 근거는 제가 아는 한 맑시즘이 유일합니다. '복지책을 시행하면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이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결과 유동성 함정을 빠져나와 경기가 호전되고...'라는 식의 케인즈주의는 복지정책의 유효수요 진작 효과를 설명할 뿐 복지 정책 자체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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