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한 식당 앞을 떠나 구두가게 쪽으로 걸어오는데 조그만 케익 가게가 문을 열고 있다. 방금 지나갈 때는 식당에만 정신이 팔려

못 보고 지나간 것이다.  '그 사이에 식당은 사라지고 대신 이 케익 가게가 생긴거로군.' 빵을 좋아하는 나는 빵 가게를 보면 무조건

반가왔다. 더구나 툴수카야 , 내가 자주 지나다니던 거리에 이런 아담한 가게가 생기다니.

 내가 케익 가게를 손짓하자, 이진이 할 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작고 아담한 가게였다. 그러나 내용은 충실했다. 유리

진열장에 품질 좋은 마실 것, 먹을 것 등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피부결이 아주 고운 중년여성이 우리를 맞았다. 에플 파이, 크르와쌍,

기름기가 있는 케익 몇조각, 그리고 쥬스를 시켰다. 옆 자리에 어느 동네 젊은 부인이 어린 딸 아이와 함께 앉아 빵을 먹고 있다. 엄마

는 커피를 마시고 딸은 노란 쥬스를 마시고 있다.

피부결이 좋고 선량한 인상을 지닌 가게 여주인이 빵을 나눠 먹고 있는 세사람의 동양인을 진열장 안쪽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 작은 가게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그 당시 이 가게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하루 한번씩은 이 가게로 와서 커피와

빵으로 한끼를 해결했을 것 같다. 창 가의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면서.

 빵 가게를 끝으로 우리는 툴스카야를 떠났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툴스카야 산책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앞 뒤 여건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의 신은 이번에도 나를 돕지 않았다. 날씨가 좋았거나 의복준비가 되었더라면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이

곳에 와서 툴수카야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7년 전의 시간을 되새김질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만 그곳을 다녀갔다는 기록

만 남기는 걸로 그쳤다. 나는 '나만의 툴스카야 산책'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날 저녁은 북한 식당에 가서 먹기로 했다. 내가 처음 민박집에 들어온 날 이진은 고맙게도 틈을 내서 나를 북한 식당으로 안내하

겠다고 약속했었다. 바로 이틀 뒤, 그러니까 내가 페레델키노의 A에게 가기 며칠 전에 이진은 나를 데리고 북한 식당으로 찾아갔

다. 그곳은 숙소에서 불과 차로 십여분 거리에 있었는데 공교롭게 러시아 사람들이 홀을 온통 전세내어 결혼피로연을 베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 일정을 뒤로 미루고 발길을 돌렸는데 이진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슈

메이는 빠지고 대신 우라디보스톡에서 온 박강수가 일행에 끼었다. 차오가 차로 우리를 식당 앞까지 데려다주었는데 그는 식당

에는 들어가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돌아갔다. 이진은 고용인을 차별하거나 가볍게 대하지는 않았으나 장소에 따르는 사람 구분

은 엄격하게 하는 편이었다.

식당은 입구에 <KORE>라고 적힌 간판을 내걸었는데 <고려>의 러시아식 표기인지 단순히 영자(英字)의 약식 표기인지 알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1층에 제법 넓은 홀이 나타났다. 한복을 곱게 입은 봉사원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미 몇차례

이곳에 다녀갔다는 이진은 봉사원들과도 가벼운 안부(安否)인사를 교환했다. 손님이 자리를 반쯤 채우고 있었는데 이날은 저녁

식사 시간인 걸 감안하면 손님이 적은 편이라고 이진이 말했다. 남인지 북인지 알 수 없으나 나와 혈통이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고 그들과 동행한 일부 러시아인들이 가끔씩 눈에 띠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북쪽 특유의 춤과 노래가 혼합된 민속공연이 베

풀어진다는데 이 날은 공연이 없었다. 무희들이 입는 진한 원색의 한복 몇가지가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 식당

의 소속과 성격을 알리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 밖에는 별다른 장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음식이 아주 상급이에요. 드시고 싶은 걸 뭐든 고르세요."

메뉴 책자를 내 앞에 놓으며 이진이 말했다. 책자에 적힌 음식 종류가 백가지도 넘었다. 물김치, 장국, 오징어 찜, 비교적 낯익

은 이런 이름들만 눈에 들어왔고 다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물론 그 맛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메뉴 책자를 이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난 여기 음식 맛을 모르니 아는 사람이 고르세요. 뭐 저녁식사니까 너무 여러가지 시킬 건 없고."

"그럴까요? 그럼 제가 골라보죠."

이진이 박강수와 메뉴 책자를 놓고 주문할 음식에 관해 의논을 시작했는데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이진이 상급의 음식

이라고 표현한 북쪽 음식에 관한 기대감이 너무 큰 탓일까. 박강수도 쉽게 선택을 못하고 메뉴 목록만 열심히 드려다보고

있다. 두사람이 의논하는 사이에 나는 09년 초봄, 평양의 양각도 호텔 식당에서 첫 저녁식사를 했던 때를 떠올렸다. 북에서

갖는 첫번째 식사였다. 우리 일행은 나를 포함, 당 (黨)쪽에서 3명, 남의 천도교 쪽에서 3명,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천도교

측에는 대학교수라는 삼십대 초반 여성이 한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여섯사람이 호텔 1층 식당의 식탁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북의 음식과의 첫 대면, 나는 마치 오래 잊혀졌던 연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설레

는 마음으로 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음식문화라는 말이 있지만 음식에는 혼과 땀과 마음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그 혼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양각도 호텔 식단은 기본 식단 외에 숭어요리, 몇가지 육류요리, 나물 요리 등 다양하고 풍성

했다. 그런데 제일 관심을 끈 것은 후식용으로 보이는 빵 접시였다. 작은 접시에 평범해 보이는 빵 몇개가 놓여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남측의 빵 가게에 가면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뽐내는 빵들이 사람들의 눈

길을 유혹하고 있다. 양각도 호텔의 그 빵은 정말 겉모습은 볼품이 없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빵 하나를 시식한 뒤 다시 빵 접시에 눈길을 돌렸을 때 이미 접시는 비워져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빵에 관심

이 많고 오랜기간 하루 두끼는 빵으로 해결해 왔다. 빵에 관해서는 체계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겉모양만 봐도 그 품질과

맛을 대강 알아낼 수가 있다. 한마디로 나는 처음 맛본 북의 빵에 매료되고 말았다. 미각을 자극하는 서양식 향료 같은 것

은 흔적도 없으나 그 작은 빵은 부드럽고 담백하며 곡물 자체가 지닌 은근한 자연의 향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런

빵이었다.

"그 빵 맛이 참  희안하네. 첨가물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맛은 아주 좋은데. 어디서 수입한 것인가?"

"의장님. 빵을 더 가져오라 할까요?"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무총장이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그만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맛이 좋긴 하지만 식량이 모자라다는데 우리가 식탐 부리면 안되지요."

"그 빵, 여기서 나온 밀로 여기서 만든 빵입니다. 항상 남측 손님에게 인기지요."

오십대로 접어든 사무총장은 이미 두어차례 북을 다녀간 경험이 있었다.

  당(黨)이니 의장이니, 이런 난데없이 튀어나온 용어, 그리고 방북경위 등에 의아심을 갖는 이가 있을 거다. 여기 관해

서는 해명할 차례가 곧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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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진과 박강수가 메뉴를 결정했고 음식은 시간을 끌지 않고 금방 나왔다. 식사 위주로 음식을 시켰기 때문에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여기서 장국이라고 말하는 것과 맛이 비슷한 된장국, 오징어를 둥글게 말아놓은 오징어 찜,

돼지고기 볶음,  김치와 물김치, 그리고 콩나물 등이 식탁 위에 놓였다. 그밖에 두어가지 음식이 더 나왔는데 지금 기

억이 분명하지가 않다. 김치는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맛보던 그 김치 맛을 연상시켜줬다. 제조과정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남쪽에서 사용하는 흔한 조미료가 배제되고 옛날 방식을 고스란히 지켜온 게 원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날

메뉴에서 내가 가장 끌린 것은 남의 장국 비슷한 된장국이었다. 국물을 가득 담은 큰 뚝배기를 각자 한그릇씩 배당

했는데 평소 국을 잘 먹지 않는 내가  그 큰 뚝배기를 완전히 비워냈다. 내가 음식에 취해 한참 식사에 열중하고 있

을 때 지나가던 여성봉사원이 우리 앞에 와서 내게 음식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마 처음 찾아온 년장자에 대한 예의

삼아 말을 건넨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엉뚱하게 내가 입고있는 양복 외투 한자락을 열고 안주머니 위에 부착된

상호 표지를 슬쩍 보여줬다. 거기에 <평양 양복점>이란 상호가 또렷하게 박혀있었다. 이 옷은 방북시기에 양각

도 호텔 의상실에서 맟춰 입은 것이다.

'어머!"

여성봉사원이 짧게 소리내고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것으로 나는 동포 여성의 친절에 대해 내 나름의 친밀감을 표

현한 셈이다. 우리가 식당에서 나올 때 둘 혹은 세명의 봉사원이 입구까지 따라나와서

"다음에도 꼭 다시 오시라요." 하고 공손하게 절하며 하직의 말을 한 것은 내가 보여준 친밀감에 대한 보답일 것이

다.

 

09년의 평양방문은 내겐 아주 드문 행운이었다. 시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이씨가 새로 집권자가 되어 남북 분위기

가 냉각기로 접어들었고 북에서 미사일을 발사하여 북에 대한 제재논의가 미국 중심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개성

공단이 무슨 이유인지 위기를 맞아 공단 운영자 몇사람이 북을 설득하고 북에 호소하기 위해 방북했는데 호텔 로

비나 복도에서 그들과 몇차례 마주쳤던 일도 떠오른다. 당에서 세사람이 가는데 의회 의원인 사람과 이미 방북

경험이 있는 사무총장은 통일부 심사에 문제가 없었으나 초행인 나는 일단 거부되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으나

글장이라면 관리들은 일단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당 대표인 M이 아직 의원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때여

서 그가 내 문제로 관리를 설득하느라고 노력을 많이 해줬다.

북의 청우당은 남의 천도교와 혈통이 비슷한, 민족종교를 배경으로 한 단체인데 노동당의 자매당, 혹은 위성정

당(衛星政黨) 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기 김주석의 가계(家系)와 특별한 연고가 있어서 밖에서 보기 보다는

실질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청우당의 위원장이 김주석의 과거 사저(대지 1800평이 넘는

대저택)를 물려받아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 청우당이 혈통이 같은 남의 천도교와 교류의 맥을 끊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은 천도교가 매개가 되어 청우당의 초청을 받았는데 천도교 소속인사이기도 한 사무총장이

그 연결고리역할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