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웹상에서 눈팅한 경험들에 의하면, 동북공정의 초점은 한반도의 고대사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더군요. 우리가 고대사라고 아우르는 그 기원적인 시점에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있었는가?의 문제를 놓고 강단사학자들과 재야사학자들이 크게 충돌하고 있고, 동북공정의 논리 역시 그 논란의 핵심이 되는 고조선의 경계 문제를 끼고 있으면서 동시에 고조선(=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을 근거로 한반도의 북부가 중국의 지방정부였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 같던데..이건 들여다 볼 수록 중국측의 얘기를 우리가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물론 고구려사가 중국사였다는 식의 주장은 택도없는 소리라고 보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중국의 논리를 반박하기 어려운 이유가 뭔고 하면 황하강이 세계 문명의 발상지였고, 그 황하를 끼고 있는 중국의 중원지역으로 부터 동심원적으로 문명이 확산되면서 한반도 또한 그 중화 문명권의 영향안에 포섭되는 식으로 전체 역사가 전개해 왔다는 점 때문이라고 보는데..(=뭐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영역이니..)

그래서 우리가 최초로 고조선을 인식하게 되는 것도 모두 문명의 진원지인 중국의 사서들을 통해서였거든요. 기원전에 쓰여진 관자나 산해경 등등..의 중국 사서들에 몇천리 밖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등등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서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우리가 시조로 모시는 단군과 기원전 2333년 그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면서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신화 역시 위서나 고기 등 모두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하면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사가들이 각기 그 기록을 파편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의 고대사를 대개 고조선으로 퉁쳐서 부르며 그 모두를 우리의 역사안에 편입시키고 있지만, 사실 그 고조선이 고구려가 성립하기 이전까지 단일한 국가의 형태로 존속해 오다가 이후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하는 식으로 한반도의 역사가 전개해 온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 바로 동북공정이 출발하는 빌미가 되고 있는 셈이죠.   

우선 한국의 표준적인 국사교과서의 서술을 따르게 되면 고조선은 크게 세시기로 구분이 됩니다.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 조선..

단군조선은 말그대로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면서 성립한 최초의 고조선을 이르는 말이고, 대개 일반인들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이 단군조선에만 국한되어 있는 편이죠. 하지만 기원전 2333년(=이 연대도 강단사학자들은 뻥튀기한거라며 부정하더군요. 고대"국가"의 성립은 모든 문명권에서 청동기 시대의 도래 이후에나 가능한 것인데, 한반도에 청동기 문명이 꽃피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부터이다, 그러니 기원전 2333년이면 엄연히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에 무슨 독자적인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논리로..)이후 단일한 국가체제가 근 2000년 동안 아무런 부침이나 변화없이 존속했을리는 만무한 것이니 당연히 단군조선의 국통이 그대로 이어졌을리는 없고..역시나 중국의 사서(사기, 한서 등등..)에 보면 은나라 사람 "기자"가 수천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기자동래설) 

우선 중국역사에서 요,순임금으로 끝이나는 삼황오제시대(+하나라)는 신화시대에 속하지만 그 이후 은나라 부터는 실제 유물 등이 발굴되면서 역사시대로 간주되고 있죠. 기자는 그 은나라의 충신이었고, 반면 기자가 섬기던 주왕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주지육림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희대의 난봉꾼이요, 폭군이었는데 어느시대에나 그렇듯 임금을 향해 사사건건 귀에 거슬리는 충언만 하는 이들이 무사한 경우는 거의 없죠. 기자 역시 주왕의 분노를 사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마침 그 시점에 은나라에서는 역성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은나라는 무너지고 주나라가 새롭게 문을 엽니다. 새롭게 문을 연 주나라의 무왕은 감옥에 있는 충신 기자를 자기 사람으로 쓰려고 했으나, 충신은 원래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 기자는 주나라를 떠나 멀리 조선땅으로 까지 건너오게 된 거죠. 

그래서 이때부터를 기자조선의 시대라고 합니다. 헌데 기자조선의 성립에 대한 짧막한 서술 이후 그 기자조선이 어떤 식으로 국가를 운영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들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중국의 사서에 조선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하는 장면은 거진 한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한 전쟁 얘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아주 길게 적혀 있습니다. 그 전쟁 이후 고조선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한나라는 고조선이 멸망한 그 지역에 4개의 "군"(=한나라의 지방정부)을 설치하여 한나라의 통치영역임을 표시했는데, 그게 이른바 "한사군(=낙랑군+진번군+현도군+임둔군)"이죠. 그리고 동북공정의 논리도 바로 이 한사군에서 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기자조선 이후 중국의 왕조사를 일별하면..

주나라(=기원전 12세기=한반도 북부에서는 기자조선이 성립) -> 춘추시대(=춘추 5패=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월나라 구천) -> 전국시대(=전국 7웅=진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제나라, 연나라, 초나라) ->진의 통일(=진시황이 최초로 중국대륙을 단일한 국가체제로 통일) -> 한의 통일(=중국이 실질적인 제국으로 거듭난 강력한 통일왕조이자 현재 중화민국의 모태가 되는 나라) 

여기서 전국시대의 전국7웅 중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나라를 굴복시키면서 최초의 통일왕조로 출범하지만 고작 14년만에 진시황의 나라는 내분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유방의 한나라가 다시 나머지를 통일하면서 중국에는 최초로 강력한 전제왕조(=유방에서 한무제에 이르기 까지의 전한시대)가 이어지게 되는데..

우선 진나라때는 나라를 통일한 후 "명목상으로는" 제후국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현"제를 실시했고 전국7웅에 속하는 나머지 나라들은 더이상 국가가 아닌 진나라의 "현"에 소속되면서, 진나라는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국가요, 천자는 진시황 하나인 중앙집권적인 통일왕조를 표방했지요. 하지만 한나라때에 이르러는 군현제가 군"국"제로 바뀌면서 (옛)전국7웅에 속하던 나라들이 각기 천자가 있는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지방의 제후국이 되고, 하지만 그 지방의 제후국들 마다 독자적인 왕의 옹립이 인정되는, "느슨해진" 중앙집권의 형태로 통일제국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나라의 제후국이자, 지금의 랴오둥(요동)지방에 위치해서 고조선과 경계가 맞닿아 있었던 곳이 "연나라"였는데, 이 연나의 왕이었던 노돈이 한나라 왕실의 등쌀에 못이겨서 갑툭튀 왕자리를 내팽개치고 국경 위쪽에서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던 흉노로 도망을 갔는데, 바로 이 뒤숭숭한 시기에 노돈의 휘하에 있던 "위만"이라는 사람이 연나라의 이주민들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건너오게 됩니다.(=근데 이건 삼국지 위략의 구절에 근거한 과거의 해석이고, 요즘은 위만을 노돈의 휘하 장수였던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계 유민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한 것 같더군요.) 그리고는 그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에게로 가서 고조선의 서쪽 변방지역의 수비를 맡겠다고 자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변경지역에 정착한 후 국경수비를 하는 게 아니라 넘어오는 이주민들을 다 받으면서 자신의 세력권안으로 규합을 합니다. 그렇게 때를 보다가 준왕이 머물던 수도 왕검성을 기습해서 준왕을 몰아내는 쿠데타에 성공하는데 이게 기원전 194년의 일이고, 이로써 고조선의 왕조가 다시한번 전복이 되면서 이때부터를 일컬어 "위만조선"으로 구분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이 성립하지만, 위만조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나라가 처음부터 느슨하게 중앙집권을 추구한 것은 북방의 패자였던 흉노의 기세에 밀려서 제국의 내실을 다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데, 한무제에 이르러 흉노를 북방으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면서 한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표방하며 동시에 한반도가 있는 동북방향으로의 정복사업을 시작합니다. 그 첫번째 타격지점이 연나라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던 위만조선이었죠. 그래서 한무제는 조선의 우거왕(=위만의 손자)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거왕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한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수년간 끌었던 이 치열했던 전쟁 끝에 위만조선은 수도인 왕검성을 함락당하면서 역사속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되는 거죠.

근데 바로 이 한무제와의 전쟁이 역사학계의 가장 치열한 쟁점이자, (중국과 한반도가 맞물린)고대사 강역의 모든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선 왕검성의 위치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 전쟁사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시기를 나눠서 1차 2차의 공격이 있었고 육로와 해로를 따른 공격이 제각각 있었지만 자세한 설명들은 다 생략하고..)그 전사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나라 군대가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패수(=강 이름)"가 지금의 어딘가? "왕검성(=도읍지)"이 지금의 어딘가?에 따라서 그당시 고조선 강역의 위치가 비교적 정확하게 복원이 된다는 소리겠죠. 그래서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 만리장성 위 그 요서지방(=과거의 요동지방) 일대를 다 포괄하면서 중국쪽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면 위만조선이 몰락하면서 한나라가 그 지역에 세운 지방정권인 한사군의 위치 또한 지금의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중국땅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동북공정의 근거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 관점에서는 오히려 지금의 중국땅이 한반도의 역사안으로 포섭이 되는 것인데, 이런 주장을 치우천황 운운하면서 무작정 극단적으로 하게 되면 환빠가 되는 거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하거나 합리적인 근거와 추론에 의거해서 이성적으로 하면 민족주의사학자나 재야사학자로 분류가 되는 식이죠.(=북한 사학계도 이쪽 계열..) 

그래서 고조선의 강역을 가장 크게 그리게 되면, 그 패수를 대릉하나 난하(=지도 검색해 보시고..)로 보고 왕검성의 위치도 만리장성(혹은 갈석산) 부근의 성(=지금의 요서, 고대에는 이곳도 요동지방)이 되면서, 고조선 패망후 설치된 한사군 역시 그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인 게 됩니다(=재야사학자들 중에서는 한사군이 아예 설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사기의 전쟁기록을 분석하면서 이치에 닿지않는 점들을 지적하던데 그 내용만 따로 떼서 보면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실제 낙랑(=한사군의 그 낙랑국)공주와 호동왕자의 얘기가 전해져 오고 또 기원후 4세기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국을 복속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어 보임..)   

반대로 고조선의 강역을 가장 작게 그리게 되면 그 패수가 한반도 안쪽의 청천강(평안북도)이나 대동강(평안남도)이 되고 왕검성 역시 현재의 평양지역이 되면서 결국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 거의 전체에 걸쳐서 존재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동북공정의 근거도 완전히 지울 수가 없게 되는데..

바로 이 후자의 이론이 (놀랍게도^^)현재 국사학계의 통설입니다. 이른 바 식민사학이라고 하고 이 식민사학을 주장하는 국사학계를 두고 강단사학자들이라고 일컫던데, 그래서 환빠+민족주의사학자+재야사학자 vs 식민주의 강단사학자..로 서로 편이 갈려져서 웹상에서 아주 열심히 싸우는 것 같더군요. 

저도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던데 아무튼 눈팅하면서 이쪽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만은 알겠고, 그래서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소개한다는 목적에서 한 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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