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皇五帝는 모두 동이족이다 !

삼황三皇이 동이족이었음을 이일봉님의 [實證한단고기]내용을 요약하여 아래에 수록한다. 삼황이후에 등장하는 오제五帝는 그 근원을 모두 삼황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 태호복희 

▣배달국 5대 태우의太虞儀환웅은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多儀發환웅(6대 환웅)이며 태호복희는 막내 아들로 태어나 배달국에서 우사雨師라는 관직에 있다가 중원으로 들어 갔다. 우사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역易을 만 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 이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를 복희팔괘伏羲八卦 혹은 선천팔괘先天八卦라 한다. 결국 고대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환단의 문화에서 발생한 것이다.

▣복희의 성은 풍風씨이다. 이것은 당시 동이족의 아홉갈래인 견이, 방이, 적이, 백이, 우이, 황이, 현이, 양이, 풍이風 夷중 풍족風族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희의 탄생에 관해서 <사기>와 <중국고대신화>는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복희의 어머니 화서씨華胥氏가 어느 날 동쪽에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뇌택雷澤이라는 연 못가에서 노닐다가 우연히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게 되었는데, 그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면서 아이를갖게 되었 으니 이가 곧 복희이다. 

▣여기서 뇌택이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뇌雷는 팔괘중에서 진괘震卦를 말하며 진괘는 팔괘중 동방과 동 북방에 배치된 괘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복희가 배달국에서 출생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뇌택에서 대 인大人의 발자국을 밟고 난뒤 복희를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大人은 환웅을 의미한다. 

▣복희에게는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女와가 있었다.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 하는데, 이름이나 행적이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여호와와 매우 유사하다. 복희는 동방을 상징하는 나무(木)의 덕 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동방의 제왕이라고 한다. 

▒ 염제신농炎帝神農 

▣염제신농의 아버지는 소전少典이라고 하며 배달국의 8대 안부련 환웅의 명으로 강수姜水라는 곳에서 군사를 감 독하는 직책에 있었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은 소호금천(5제중의 한사람)과 함께 고시씨(고시례)의 방계 지류이다. 
▣고시씨는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牛加의 직책에 있으면서 농사를 관장하였다. 신농은 조상인 고시씨로부터 내려 온 농사와 관련된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농사에 능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이러한 신농이 아버지 소전을 따라 중원으로 들어가 농사를 가르치고 의약을 만들어 의농醫農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에『염제炎帝는 인신우수人神牛首의 형상으로 강수姜水근처에서 성장했으므로 강씨 라 했다.』는 기록에서 신농이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뿌리가 배달국의 우가牛加, 즉 고시씨에 있음 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황제헌원黃帝軒轅 

▣황제黃帝는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즉,소전은 배달 국에서 갈려져 나간 사람으로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고,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후손중의 한 사람이 공 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다.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간에는 수차례의 전쟁이 있었으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는 황 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이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황제헌 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이며 이는 왜곡된 주장이다. 사실은 전쟁에서 패하여 치우천왕에게 귀의한 뒤 청구 국(배달국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이름을 청구국이라 함) 고유의 천부인 3개 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걸었다. 이로부터 헌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도교의 근원이 배달국에서 유래되었다. 

▣<사기>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有熊氏라 하여 그가 웅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먼 조상인 소전이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헌원이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부른 것은 그가 배달국 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를 '황제黃帝'라 일걷는 것은 그가 오행五行에서 중앙에 해당하 는 흙(土)의 기운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제五帝중 전욱고양(BC 2513~2436)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BC 2435~2365)은 증손자이다. 제곡고 신의 여러 부인중에 간적簡狄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간적이 [설]을 낳고 설은 순.우 임금때 벼슬을 하고 상商이라 는 곳의 제후로 봉해졌다.[설]의 후손인 성탕成湯은 하나라 말기에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상商(殷)나라를 세웠다.



은왕조 그 이후

은의 멸망과 은나라 성인 3인

은나라 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폭군 주왕紂王은 바른 말로 간하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한 때는 '포락'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뜨거운 숯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둥근 구리기둥을 걸쳐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을 받은 신하들은 미끄러운 구리기둥을 걸어가다가 숯불 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주왕과 달기는 이를 보면서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이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 비간比干

문헌과 표현방법에 따라 비간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자 또는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라고 되어있다. 왕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왕의 숙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간]은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태정제의 맏아들은 30대 을제(乙帝)가 되었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泉이라고 지었는데 泉의 나이 3세때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비간의 능陵은 현재 중국의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비간의 후손에 대한 상세 내용은 아래 [비간의 후손] 내용을 참조하시라.

▒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기자에 관한 내용은 이일봉님의 [實證 한단고기]을 인용해보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단군세기>는 당시 기자가 나라를 잃은 왕족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남성 서화西華라는 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제 갓 태어난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막강한 조선의 왕으로 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결국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조선이 쇠락하면서 중원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독자적으로 은나라를 물리칠 능력도 없어서 여러 동이東夷들의 도움으로 거사를 성사시켰던 무왕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서경>과 <사기>이다. 주지하다시피 <서경>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공자(BC 552~479)가 말년에 편찬했다는 문헌이고, <사기>는 한나라 때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 저술한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이다. 이 두 문헌은 아무런 근거나 출처도 밝히지 않고 기자와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자와 사마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단군조선이 건재하고 있었고,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 때에는 단군조선의 삼한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한(번조선 : 이 무렵에는 한나라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차지하고 있었음)도 엄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에 기록된 내용은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공자와 사마천이 직접 기록했다면 의도적인 곡필임이 분명하다.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며 기자조선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당연히 중원에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를 주해한 중국의 학자들도 집해集解.정의正義.색은索隱에서 한결같이 기자의 무덤이 황하 남쪽의 하남성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梁國蒙縣 有箕子塚 양국의 몽현은 현 하남성 상구商丘시 일대를 말하는 것을, 상구는 옛 은나라를 일명 상商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그곳에 기자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에는 <단군세기>에서 기자가 말년에 살았다고 한 서화西華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미자微子가 다스리던 송宋나라 지역이다. 기자가 이곳 서화에서 두문불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고 중국의 학자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이곳은 기자가 살았다 하여 지명이 기성箕城으로 바뀌기도 했다. 중국의 문헌인 <수경주水經注>는 기성箕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안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는 기자의 무덤이 있다.』 

城內有成湯塚 其西有箕子塚 

양국 몽현에 기자의 무덤뿐만 아니라 은나라를 세운 탕왕의 무덤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자가 옛 은나라 땅인 송나라에서 은거하다가 탕왕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는 말이 된다.』

▒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폭군 주왕紂王의 이복형제이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해서 옛 은나라 백성들의 동요와 반란을 막고 은나라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경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무경이 죽자 미자微子가 제후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를 송宋나라라 하였다. 송나라는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

비간의 후손

기자箕子의 후손과 폭군 주왕紂王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아래 자료는 왕족중 장자였던 비간比干의 후손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인데, 이 기록은 특정 성씨를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왕조 멸망시의 왕족의 신분으로 주왕紂王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하여 간언하다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후대를 추적해봄으로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발굴에 일익이 되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비간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대손]으로 아래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황제헌원과 비간, 황제헌원과 동이족의 연계성을 수립하기 위해 부득이 林氏先祖寶鑑중의 일부를 수록하였으니 양지하시고 이 자료를 보시는분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족보라는 것은 만드신 분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통해, 심지어는 해외출장 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의 결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역사연구의 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본 林氏先祖寶鑑상에는 헌원황제가 동이족이었음을 주장하거나 그러하리라고 예상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섭섭하던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역사 연구가이신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 한단고기]를 발견하고 읽어본즉 은나라에 대한 언급이 상상외로 많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위에 서술한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및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 다음은 수풀림林 한국종친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 수록되어 있는 '林氏의 源流를 찾아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땅의 임씨林氏는 득성得姓 이후 3천 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대 중국땅에서 2천년을, 그리고 한국에서 천 백여년 동안 조상님들의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은殷나라 마지막 왕자王子이신 비간(比干 : 3090년전)공을 꼽을 것이다. 이분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의 33세 후손이시며 그당시 은나라 3인(비간比干, 기자箕子, 미자微子)중 한분이시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부터 중국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시장.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세계에 퍼진 임씨종친의 인구수가 약 7천만명인데 중국대륙에 6천만명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외의 전 세계 곳곳에 1천만명이 살고 있고 그 1천만명 중에서 우리나라에 약 1백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林氏先祖寶鑑의 내용대로라면 전 세계의 수풀林을 쓰는 사람들은 시조가 한분이며 그분은 고대 은나라 말 三仁중 한 사람인 비간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 다음은 저 유명한 기자箕子의 조선朝鮮 망명설과 관련, 비교 연구의 여지가 있을듯하여 임윤화林允華 대법사의 축간사祝刊辭를 인용해 본다.

『…우리 林氏 조상의 원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林氏 太始祖 비간공은 순국하시고, 그 동생 기자箕子는 해동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 태조대왕이 되시고, 미자微子왕자는 국외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비간공의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 석실에 피난하여 아들을 낳으니 子 천泉 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따서 임씨로 사성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기자의 조선 망명설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기자는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는 [實證 한단고기]를 쓴 이일봉님과 [古記로 본 古代韓國史]의 한순근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순(舜)임금이 동이족(조선족)이라는 근거 


1. 중국기록 -《맹자(孟子)》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明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였으며, 명조에서 죽었다. 제풍, 부하, 명조는 동이의 땅이다. 순은 동이 사람이다. 



2. 순임금의 정체 


맹자라는 책에서 순임금이 동이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받아 중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동이족은 중국측에서 보면 단군조선 사람이다. 요임금과 단군왕검은 병립하였는데, 이때 동이족이라 함은 바로 단군조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초기에는 중심지인 송화강 아사달을 비롯하여 산동반도를 포함한 중국대륙 동쪽과 황하유역의 북쪽을 관할하였다. 

그러면 순임금은 과연 누구인가? 


가. 순(舜)은 조선(朝鮮)의 사자(使者) 


순임금은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중신(重臣)인 유호씨(有戶氏)의 큰 아들로 요(堯)임금을 치러간 조선(朝鮮)의 사자(使者)였다. 우리 기록에 의하면 유호씨는 고수(高未)라고도 한다. 유호씨는 중국기록에서는 고수(嗧杚)라고 적혀있다. 고수(嗧杚)는 우매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장님이라는 말이다. 또 유호씨(有扈氏)라고도 적기도 한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유호씨(有扈氏)가 무도해서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들 계(啓)가 즉위한 후 감(甘)에서 싸워 멸망시켰다라고 한다. 유호씨(有戶氏), 고수(高未), 고수(嗧杚), 유호씨(有扈氏)는 모두 동일인이다. 


나. 순이 요임금의 사위가 되어 선양받아 임금이 되다. 


서기전 2357년 요(堯)가 제지(帝摯)를 멸하고 천자(天子)가 되었다. 이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은 14세의 나이로 웅씨국(熊氏國)의 비왕(裨王)이 되어 섭정을 하였다. 요임금이 서기전 2334년경까지 3차례의 난을 일으키고 급기야 단군왕검이 왕성을 나가 순치(巡治)를 하는 틈에 왕성을 점령하고 이때 웅씨국왕이 붕어하므로 단군왕검은 오가와 무리 800을 이끌고 배달나라 중심지를 떠나 송화강 아사달로 이동하여 서기전 2333년 10월 3일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나라를 정비한 후 곧 단군왕검은 유호씨와 유호씨의 아들 순(舜)으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100여명을 보내어 요임금을 깨우치도록 하였다. 이에 요임금이 명령에 복종하고 유호씨 등을 공손히 대접하였다. 이때 요임금이 순의 사람됨을 보고 딴 뜻이 있어서 두딸을 주어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해졌다. 순은 곧 요임금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은 이때부터 순은 아버지 유호씨의 뜻을 그르치기 시작하고 요임금의 촉탁을 받아 현자(賢者)를 찾아 죽이기도 하였다. 서기전 2284년 요임금은 순에게 양위하였다. 순의 나라를 우(虞)라 한다. 


다. 순임금이 홍수로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 9년 대홍수가 발생했다. 단군조선에도 대홍수가 발생했으나 풍백(風伯) 팽우가 치수를 잘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우수주(牛首州)에 기념비를 세웠다. 한편 요임금은 곤(噓)에게 치수를 시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순(舜)이 곤에게 책임을 물어서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禹)에게 다시 치수를 맡겼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자 순임금은 단군조선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기전 2267년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재케 했다. 순임금은 우를 보내어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이에 태자부루가 우에게 치수의 요결인 신서(神書)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이때 경계를 따져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조선에 영속시켰다. 우가 치수법을 전수받은 후 치수에 성공하였다. 우(禹)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치수법을 전수 받은 것을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는 천내석우(天乃錫禹)라고 하여 하늘이 우(禹)에게 주셨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하늘은 바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것이다. 단군이 바로 천제이기 때문이다. 즉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제후격이었다는 것이 된다. 


라. 형제간의 전쟁 


순임금이 점점 단군조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자 이에 유호씨는 작은 아들 유상(有象)으로 하여금 순을 토벌케 하였다. 이것이 형제간의 전쟁이다. 유상이 권사를 이끌고 순을 치고 요임금의 무리인 우(禹)가 또한 순을 치니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다 죽었다. 이에 순의 두 처도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앞서 순은 우의 아버지 곤(噓)이 홍수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책임을 물어 죽인 일이 있으므로우가 순에게 복수를 한 것이 된다. 우(禹)가 유상(有象)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서서 관찰하니 우가 도읍을 옮기고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단군조선으로부터 중국이 독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제후 


[중국의 기록-《서경》우서(虞書) 순전(舜傳)의 사근동후(肆覲東后)의 뜻] 


世二月 東巡守 至于岱宗 肆覲東后 ... 

-> 그해 이월에 동쪽을 순수하고 대종(태산)에 이르러 동쪽의 임금을 찾아 뵙고... 


가. 근(覲)의 뜻 



근(覲)은 찾아뵙다의 뜻이므로 순임금이 동쪽 제후를 찾아뵈었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래서 동후(東后)가 누구를 가리키느냐가 문제된다. 


나. 동후(東后)란? 


후(后)는 임금, 왕비 등을 가리킨다. 반면 후(侯)는 제후(諸侯) 중의 두 번째 봉작에 해당된다. 그래서 후(后)와 후(侯)는 다르다. 그러므로 동후(東后)는 동쪽의 제후가 아니다. 하(夏)나라 임금인 우(禹)를 하후(夏后) 우(禹)라고 한다. 후(后)는 즉 왕(王)의 뜻이다. 물론 제후도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계급을 순서대로 보면 역사기록을 볼 때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 또는 단군(檀君)인 단제(檀帝), 한(韓), 왕(王), 군(君), 제후(諸侯 : 公, 侯, 子, 男, 伯), 한(汗) 또는 욕살(褥薩), 읍차(邑借) 등으로 적을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제(帝), 왕(王), 군(君), 후(侯)의 순서로 나타낼 수 있다. 후(后)는 왕격(王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왕(夏王) 우(禹)가 즉 하후(夏后) 우(禹)가 된다. 

이렇게 보면, 동후(東后)는 동쪽의 제후가 아니라 동쪽의 임금으로서 순임금과 같은 격의 임금이나 그 이상이 된다. 그런데 근(覲)이라는 글자가 찾아뵙다라는 뜻이므로 동후(東后)는 순임금보다 높은 격의 임금이 될 것이다. 


다. 동후(東后)는 진한(震韓) 즉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 


순(舜)의 사공 우(禹)가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로부터 치수법을 전수받았고 이에 순(舜)을 낭야성에 두어 감독케 했는데, 단군조선의 진한(辰韓)은 낭야를 5년에 한번씩 순수하였는데 순(舜)의 제후(諸侯)는 진한에 조근(朝覲)하기를 네 번이었다라고 한다. 여기서 진한(辰韓)은 천제자를 가리키는데, 천제자는 곧 단군왕검의 아들을 말한다. 바로 태자 부루이다. 태자부루가 도산회의 때 치수의 비결을 우(虞)나라 사공(司空)인 우(禹)에게 전수하였던 장본인이다. 즉 태자 부루가 5년에 한번씩 낭야성을 순시하는데 이때 순임금과 제후는 진한인 태자부루를 찾아뵈었고 회수가 4번이었다라는 말이 된다. 즉 20년에 걸쳐 태자부루가 순시한 것이 된다. 도산회의가 서기전 2267년에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20년이면 서기전 2247년경까지가 된다. 서기전 2240년에 태자부루가 제2대 단군이 되었다. 태자부루가 단군이 된 후에는 진한(辰韓)의 치적이 기록된 것이 없는 바, 아마도 진한을 따로 두지 않고 단군이 겸한 것으로 보인다.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은 각 세습하여 대를 이었다. 


라. 사근동후(肆覲東后) 


결론적으로 사근동후는 순임금이, 천제(天帝) 즉 단군(檀君)의 아들이자 진한(辰韓)인 태자 부루를 찾아뵈었다라는 말이다. 이때 순임금은 단군조선과 날짜와 도량형을 맞추었다. 



4. 여론 


역사기록을 볼 때, 순임금은 동이족 출신으로서 원래는 서기전 2300년경에 요임금을 토벌하러간 단군조선의 사자(使者)였으나 요임금에게 협조하므로 순의 아버지와 순의 동생인 유상이 순과 전쟁을 하였고 이에 순임금이 효도를 다하므로 다시 평화를 찾았으며, 서기전 2267년에 순임금이 단군조선에 홍수 때문에 도움을 청하자 태자부루를 도산으로 파견하여 치수의 비결을 전수하여 주었고, 순임금 말기에 순임금이 도를 잃게 되자 유상이 다시 순을 치고 이에 요임금의 무리였던 우(禹)가 아버지 곤(噓)의 복수를 위해 순을 쳐 죽게 하고 자칭 하왕(夏王)이 되어 점차 단군조선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