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시절 우리나라 식자층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 책이건만 지금도 그 울림은 유효하다. 게오르규의 25시가 그러하듯이. 밀려든 서구 문명은 우리나라를 파고 들었고 결국 그들이 겪었던 오류를 시간차를 두고서 겪고들 있다. 물론 그 문명의 보편성에 한국의 특수성이 더해진 상태로.

쉽게 달구어졌다가 쉽게 식는 관계들. 뜨거운 상태에서 상처를 입고 나면 관계를 단절하는 일은 무척 손쉽다. 휴대전화 전화번호부에서 지우고 번호 차단 설정하면 끝이다. 그 어찌 가볍지 아니한가. 이게 일부 사람들이 겪는 일일까? 함 생각들 해보자. 휴대전화에 손가락을 대고서.

아는 이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것이 언제적인지 함 생각을 떠올려보자. 나는 어쩌다 한 번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았는데 마지막으로 받아본 게 얼추 2년 전이다. 디지털은 디지털대로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대로 효용이 있다. 그래도 인간은 본래 아날로그이다. 생각해 보면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는 것은 내가 손으로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수십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이, 여친이 섹시한 속옷을 입은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오는 일이 손으로 쓴 짤막한 편지 한 장의 무게를 견딜 수 있으랴. 모두들 매트릭스라는 디스토피아는 먼 미래의 일이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치부할른지 모르지만 삭제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끝나는 관계는 이미 매트릭스 아닌가?

이웃과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지도 않고 지금은 그저 돈이 있으면 비싼 거 시켜서 먹는 것으로 이웃간의 정을 확인한다. 정이 아니라 우열을 가리는 행위일 터이지만. 김치도 못 담그는 여자들. 정확히는 결혼해서 자기 손으로 식구들 밥상 차릴 실력이 되지 못하는 여자들. 간단한 가구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남정네들. 배관 하나 손보지 못하는 수컷들. 기술자들 불러 돈 주고 일 시키면 된다. 그런데 그럴려면 돈이 많이 들지. 대개 물정 모른다 싶으면 눈탱이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닌 세상이니까.

왜 의사검사경찰기술자교수건축업자를 사귀고 인맥을 쌓으려 들까? 낯선 업자에게 시키면 눈탱이 보려 들고 의료사고 내고 자신에게 피해줄까봐 그런 탓이다. 사람을 못 믿는 것이지 뭐. 그게 뭐 술집 작부들하고 돈 내고 술마시고 살 섞고 그러는 관계랑 본질에서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누군가 그러드라. 자신을 이해해주는 딱 한 사람만, 속내를 이해해줄 한 사람만 있었어도 노통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아마 맞는 말일 거다.

다들 멀리서 찾는다. 그렇게 고도를 기다린다. 구세주를.

나는 바로 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도 믿지 못하는 년놈들이 신을 믿는다고, 성불하겠다고 하는 말을 죽어도 믿지 못하겠더라.

아니 이웃을 믿지 못하니까 신을 믿게 되겠지. 신은 상처는 주지 않잖아.

댁들이 지독히도 양가 감정을 느끼며 부대끼고 살아가는 그 이웃들이, 쪽팔려 죽겠는 댁네 피붙이들이 예수고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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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 이름을 머리 속에서 검색해 찾아내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아무리 봐도 자질구레한 데이터 과잉이다, 머릿속이. 나도 수첩공주님처럼 수첩을 가까이 해야 될란갑다. 이 황당한 건망증을 해소하는 방편은 실은 아무나 친구에게 전화 걸어서 물어보거나 집밖에 나가 옆집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뒤진다고 그 제목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디지털 통신이 그러하듯이 답을 찾으려면 한참 걸리거나 아예 묵묵부답이다. 요새는 사람들이 스마트폰하고 사귄다. 기계로 된 신이 따로 없다. 나는 이번에 선불폰 했는데 그 정도로 문명에 사로잡히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요새는 식구들보다 TV 속, 인터넷 속 전문가들을 믿드라 사람들이. 요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