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전은 다음 사이트에서 내리받을 수 있습니다.  


2. 이 인터뷰와 가장 연관이 깊은 지젝의 저작은 다음 셋입니다. 처음 두 책은 번역 수준이 형편없는 모양입니다.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2000]

믿음에 관하여 [2001]

죽은 신을 위하여 (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장이>) [2003]

3. 위 세 책에 대한 리뷰는 이미 적잖게 나와 있겠지만 제가 읽어본 것은 다음입니다.

4. 이 인터뷰와 관련해 가장 읽어볼 만한 웹상의 최근 지젝 글은 다음 인터뷰입니다. 훌륭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신적 폭력과 해방구

5. 다 이해하면서 번역한 것이 아니며 직역 위주의 초역입니다. 자신 없는 부분들도 있구요(특히 욥 관련 문단들이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인용한 것도 유려한 번역본들을 참조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직역했습니다). 번역한 이유는 종교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종교 안에서 싸우는 것이 [철없는 리버럴들과는 다른 좌파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도킨스식이나 속류 유물론식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비판은 유치찬란한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혁명적 사랑의 전형으로 기독교의 '본래' 정신을 해석하는 지젝의 관점에 직관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6. 혹시라도 오역을 지적해 주시는 분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 매 문단마다 번호를 달았습니다.


An Interview with Slavoj Zizek
"On Divine Self-Limitation and Revolutionary Love"
Joshua Delpech-Ramey, Journal of Philosophy and Scripture
[Volume 1, Issue 2 | Spring 2004]

슬라보이 지젝과의 한 인터뷰
“신적 자기-제한과 혁명적 사랑”
조슈아 델페크-라미, <철학과 성경 저널>
2004년 봄, 제1권 2호

(Note: An  unpublished article by Slavoj Zizek which complements and extends the discussion pursued in the following interview will be included in the Fall 2004 issue of JPS)

(주: 이하의 인터뷰에서의 진행된 논의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슬라보이 지젝의 미출간 논문이 본 저널의 2004년 가을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JPS:  Of late, the writings of St. Paul have become for you, as well as for Alain Badiou and Giorgio Agamben, a touchstone for radical thought.  You seem to see in Paul's works  something of a revolutionary manual, and in the founding of the community of believers a supreme example of the structure and effect of an authentic revolutionary act.  For Badiou, Paul articulates a general structure of universality.  But how separable is Paul's gesture in founding Christianity from the particularities of Christianity itself?   How general are the lessons one can learn from Paul?   Can or should those lessons be separated out, as form from content, from their particularity as aspects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tself?   Or are the particularities of Christianity somehow, of the essence of this gesture?

1. 최근 성 바울의 저술들이 알랭 바디우와 조르지오 아감벤만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급진적 사유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바울의 작품들에서 혁명의 매뉴얼이라 할 만한 것을, 그리고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구조의 최고의 사례와 진정한 혁명적 행위의 효과를 본듯 합니다. 바디우에게, 바울은 보편성의 일반적 구조를 명시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창립하는 중의 바울의 제스처를 그리스도교의 특수성들 자체로부터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바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얼마나 일반적일까요? 그 교훈들은, 형식이 내용으로부터처럼, 그리스도교의 역사의 측면들로서의 그것들의 특수성 자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거나 분리되어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리스도교의 특수성들은 어떻게든간에 이 제스처에 본질적일까요?    

SZ:  My problem with Badiou, although I admire his book very much, is that Badiou . . . allows for only four truth procedures:  science, art, politics, and love (and then philosophy is just the study of these genetic procedures . . . ).  The point is that his supreme example of a truth-procedure—event, and so on—its implicit model is a kind of religious interpellation.  So no wonder that the best example, it's religious!  But paradoxically there is no place for religion.  You know the irony is that the supreme example of the seminal structure of truth event that he tries to articulate, and it doesn't count as a truth-event.

2. 비록 그의 책에 대단히 감탄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디우에게는 문제가 있는데 , 그것은 그가 ... 과학, 예술, 정치, 그리고 사랑이라는 네 가지 진리과정들만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덧붙이자면, 철학은 이들 발생적 절차들에 대한 연구일 뿐입니다 ...). 요는 진리과정 - 사건, 기타 등등 - 의 최고의 사례가,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모델이 일종의 종교적 호명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종교가 최상의 사례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디우에게는] 종교를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이러니는 종교가 그가 명시하고자 하는 진리사건의 핵심적 구조의 최고의 사례이면서도 그에 의해 진리사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So what he does is something similar to Heidegger—there is a long history to this.  As we know the early Heidegger started with the same reference, St. Paul.  He [Heidegger] I think used the term formales anzeigen, formal indication.  The idea being that, as Heidegger would have put it, religious experience is just an ontic experience, it doesn't really have this transcendental dignity, and so on, but you find there a certain formal structure which can be then generalized, abstracted from its particular context into a kind of transcendental a priori.  But still what is not answered, as you said, is that we cannot simply arrange this and say it's a simply empirical concept.  Why this structure?

3. 그렇다면 그가 하는 것은 하이데거와 비슷한 어떤 것입니다 - 거기에는 긴 역사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초기 하이데거는 동일한 전거, 즉 성 바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하이데거는] 형식적 지시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이디어는, 하이데거가 말했음직한 대로, 종교적 경험은 하나의 존재적 경험일 뿐이라는 것, 그것은 실제로는 초월적 위엄 등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거기에는 일반화될 수 있는, 그것의 특수한 맥락으로부터 일종의 초월적 아프리오리로 추상될 수 있는 어떤 형식적 구조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답변되지 않은 것은, 당신이 말했던 대로, 우리가 단순히 이렇게 배치하고 그것은 단순히 경험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왜 이 구조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The second point I want to make here is, I think the reason that Badiou does not deploy this, as I tried to develop in the long chapter on Badiou and St. Paul in The Ticklish Subject , the key question for me is negativity in the sense of death.  For him, in Badiou's reading of St. Paul, the death of Christ, as he puts it, has no inherent meaning whatsoever—it's just to prepare the site for the event.  All that matters is resurrection life.  This is connected with a very complex philosophical-theological topic . . . you may have noticed if you read Badiou, Badiou has some kind of natural, gut-feeling resistance toward the topic of death and finitude.  For him, death and finitude, animality and so on, being-towards-death, death-drive—he uses the term sometimes in a purely non-conceptual way, "death drive, decadence" as if we were reading some kind of naïve Marxist liberal optimist from the early 20th century.  This is all somehow for me interconnected.  Although I am also taking St. Paul as a model, a formal structure which can then be applied to revolutionary emancipatory collectivities, and so on, nonetheless I try to ground it in a specific Christian content, which again for me focuses precisely on Christ's death, [his] death and resurrection.  I am trying even to identify the two.  The idea that resurrection follows death, the idea that these are two narrative events, this is at the narrative level of what Hegel would have called vorstellungen , representations.  Actually, the two of them are even united.  That is to say that Christ's death, in the Hegelian reading, is the disappearance of disappearance.  It is in itself already what becomes for itself the new community.

4. 제가 여기에서 제기하고 싶은 두 번째 논점은, 바디우가 이것을 배치하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만, <까다로운 주체>에서 바디우와 성 바울에 관한 긴 챕터에서 개진하고자 했던 대로, 저에게서의 핵심적 질문은 죽음이라는 의미에서의 부정성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에게서, 바디우의 성 바울 독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가 말한 대로, 도대체 어떤 고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그것은 단지 사건을 위한 장소를 준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모든 것은 부활 생명입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철학적-신학적 토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 바디우를 읽었다면 알아차렸을 텐데, 바디우는 죽음과 유한성이라는 토픽에 대해 어떤 종류의 자연적인, 직감적인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과 유한성, 동물성 등등,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충동 같은 용어들을 때때로 순수하게 비개념적인 방식으로, 이를테면 “죽음충동, 즉 데카당스” 같은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마치 20세기 초의 소박한 마르크스주의적 자유 낙관주의자의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지요. 저에게 이것은 모두 어떻게든 상호관련되어 있습니다. 비록 저 또한 성 바울을 하나의 모델로서, 혁명적 해방적 집합체들, 기타 등등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형식적 구조로서 취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특유의 기독교적 내용 속에 정초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다시 저에게는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저는 심지어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까지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죽음을 뒤따른다는 아이디어, 이것들이 두 개의 내러티브 사건들이라는 아이디어, 이것은 헤겔이 표상이라고 부르곤 했던 것의 내러티브 수준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들 둘은 심지어 통일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헤겔식으로 읽자면, 소멸의 소멸입니다.  그것은 즉자적으로 이미 대자적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What interests me is how precisely to distinguish Christ's death from this old boring topic—and all the old materialist critics of Christianity like to point this out:  what's the big news, don't you have this sacrificial death of God in all pagan religions?   Ah ah!  You don't.  The structure is totally different if you read it closely:  already at the most superficial level, after Christ's death what you get is Holy Spirit, which is something totally different than in previous societies.  All this about Isis, and so on, this rather boring circular myth, where basically god dies . . . you know, it's like, people are disordered, things go bad, but then there is the phoenix, everything is good again—no wonder this version is so popular, like even in The Lion King, where you have a kind of  Hamlet-version where king dies, son redeems, there is a new king and so on . . . Christianity precisely is not this.

5.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 오래되고 지루한 토픽으로부터 구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물론적 그리스도교 비판자들은 “왜 그리 야단법석인가? 신의 이 희생적 죽음 이야기는 모든 이교 종교들에도 들어있지 않은가?”라고 지적하기를 좋아합니다. 아하! 들어있지 않습니다. 세밀하게 읽어보면 구조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미 가장 표면적인 수준에도 드러나 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 후에 우리가 갖게 되는 것, 즉 성령은 이전 사회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입니다. 이시스 등등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 기본적으로 신이 죽는 이 따분한 편인 순환신화들에서는,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사태는 악화되지만 불사조가 있고 모든 것은 다시 좋아집니다. 이 버전이 그토록 널리 퍼져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왕이 죽고, 아들이 구원하고, 새로운 왕이 되고 기타 등등 하는 일종의 햄릿 버전이라 할 <라이온 킹>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그리스도교는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This brings us to two further topics.  Now in Badiou's reading of psychoanalysis, he totally dismisses death drive.  But the paradox for me, as I try to develop in my work, is that death drive is a very paradoxical notion if you read Freud closely.  Death drive is basically, I claim, the Freudian term for immortality.  Death drive has nothing to do, as Lacan points out, convincingly, with this so-called nirvana principle where everything wants to disappear, and so on.  If anything (and because of this I like to read Richard Wagner's operas where you have this), death drive is that which prevents you from dying.  Death drive is that which persists beyond life and death.  Again, it's precisely what, in my beloved Stephen King's horror/science fiction terminology he calls the "undead":  this terrifying insistence beneath death, which is why Freud links death drive to the compulsion to repeat.  You know, it can be dead, but it goes on.  This terrifying insistence of an undead object.

6. 이것은 우리를 두 가지 더 나아간 토픽들로 이끕니다. 정신분석을 독해하면서 바디우는 죽음충동을 전적으로 기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역설은, 제 작업에서 논구하고자 하고 있는 대로, 프로이트를 세밀히 독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만, 죽음충동이 매우 역설적인 관념이라는 점입니다. 죽음충동은, 제 식으로 주장하면, 불멸에 해당하는 프로이트의 용어입니다. 죽음충동은, 라캉이 설득력있게 지적한 대로, 모든 것이 소멸 등등을 하기를 원하는 소위 니르바나 원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무엇인가라면 (그리고 이 무엇인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저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읽기를 즐깁니다만), 죽음충동은 당신이 죽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죽음충동은 삶과 죽음 너머에서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제가 애호하는 스티븐 킹의 호러/사이언스 픽션 용어를 쓰자면, 그가 “언데드[죽지 않는 것]”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죽음 밑에서의 이 무서운 관철, 이것이 프로이트가 죽음충동을 반복강박에 연결시키는 이유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죽을 수 있지만 계속됩니다. 그것은 언데드[죽지 않는] 대상의 무서운 관철입니다.      

Point two:  This is the big lesson to be learned, with all my criticism (criticism is the vulgar word, my difference of horizon), from Heidegger.  The big breakthrough of Heidegger is to totally reconceptualize the notion of finitude.  Already we have this in the early Heidegger with special reference to Kant.  Already you see precisely how the other of finitude, the big stuff—infinity, eternity, and so on—is a category, modality, horizon of finitude.  This was, for Heidegger, Kant's big breakthrough:  transcendental as opposed to transcendent is a category of finitude.

7. 이것은 모든 나의 비판과 함께 (비판은 속악한 말입니다. 지평 차이가 좋겠습니다) 하이데거로부터 배워야 할 큰 교훈입니다. 하이데거의 대돌파구는 유한성 관념을 완전히 재개념화한 것입니다. 우리는 칸트에 대한 특별한 참조와 함께 초기 하이데거에게서 이미 이것을 발견합니다. 이미 당신은 정확히 어떻게 유한성의 타자, 큰 것들 - 무한성, 영원성 등등 - 이 유한성의 한 범주, 한 양상, 한 지평인지를 보게 됩니다. 초험적인 것과 대립되는 초월적인 것은 유한성의 한 범주라는 생각은, 하이데거에게는, 칸트의 대돌파구였습니다.

All this somehow gets lost, in Badiou.  [But] the whole category of "event" works only from the category of finitude.  There are events only in finite situations.  You can prove it only from his own position.  Only for a finite being do you have this infinite work, what he likes to describe, in Christian terms, this trinity of faith, hope, love.  Faith that the event did take place, hope in the final state (in Christianity universal redemption, in Marxism I don't know, communism at the end) and love as work, as what is between the two, fidelity to the event and so on.  But . . . when in his last work, Badiou tries to articulate the structure of totalitarian danger, he calls "forcing the event," which means simply to ontologize the event, as if the event were not an infinite process whose place you have to discern in reality, as if the event totally permits its irrealities.  But the gap between event and reality, that which is covered up by totalitarianism, is precisely the gap of finitude—so there is something missing at this level in Badiou.

8. 바디우에게서 이 모든 것은 상실됩니다. [그러나] "사건“의 전 범주는 유한성 범주로부터만 작동합니다. 사건들은 유한한 상황들 속에서만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그 자신의 입장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만 당신은 이 무한한 작업, 그가 그리스도교 용어를 써서 믿음, 소망, 사랑의 이 삼위일체라고 기술하고 싶어하는 것을 갖습니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믿음, 최종 상태에 대한 희망(그리스도교에서는 보편적 구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종점에서의 공산주의) 그리고 작업으로서의,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사건 기타 등등에 대한 충실로서의 사랑 말입니다. 그러나 ... 그의 최근 저작에서 바디우는 그 자신이 ”사건을 강제하기“라고 부르는 전체주의적 위험의 구조를 명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건을 존재론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건이 현실 속에서 그것의 자리를 식별해야 하는 하나의 무한한 과정이 아니기라도 하다는 듯이, 사건이 그것의 비현실성들을 완전히 허용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전체주의에 의해 덮여지는 사건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바로 유한성의 간극입니다 - 따라서 바디우에게서는 이 수준에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JPS:  A fourth term for that triad, as it were, of faith, hope and love?

9. 그 삼위일체, 그러니까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의 그 삼위일체를 위한 네 번째 용어인가요?

SZ:  Yes, yeah, maybe, but also . . . in these terms, I would say it:  what I do like in Badiou is his clear awareness that the authentic Christian notion of love is something basically very violent and unilateral, it's totally different for me from the pagan notion where love is this kind of universal balance, you love the whole universe, you say yes to everything—no!  Love—you find this in Christianity—is one-sided, unilateral.  Love means "I love you more than everything":  love is precisely what Buddhists would have called the origin of evil.  Love is a kind of radical imbalance.  Here I think you get (as I tried to put it in my Fragile Absolute) a very fine analysis of this logic of finitude already in the Bible, already in Paul, in Corinthians.  It's very mysterious, that part, that paragraph on love [I Corinthians 13].  The mystery is the following one.  He [Paul] oscillates basically  between two versions, and the key point I think is to read them together.   The first one is a kind of radical affirmation of love's priority, in the sense of "even if I got to know everything, and have all the power, without love I would be nothing, etc."  But then two paragraphs later, he says—as if since now we don't know everything—all that we have is love.  And I think that the two are to be read together.  This is the paradox of Christianity, for me, that it's not God sitting up there and was a good enough guy to come to us . . . what we have to think, in a way, is the self-limitation of divinity itself.  

10. 흠,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또한 ... 그것을 이렇게도 말하고도 싶습니다: 제가 바디우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사랑 관념은 기본적으로 매우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어떤 것이라는 그의 분명한 자각입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사랑이, 당신이 전 우주를 사랑하는, 당신이 모든 것에게 예스라고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우주적 균형으로 이해되는 이교적 사랑 관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일면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사랑은 “나는 당신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해”를 의미합니다: 사랑은 바로 불교도들이 악의 기원이라고 불렀을 법한 것입니다. 사랑은 일종의 근본적인 불균형입니다. 여기서 저는 (<연약한 절대자>에서 논하고자 했던 대로) 우리가 성서 속에서 이미, 바울 속에서, 고린도 전서 속에서 이미 이러한 유한성의 논리에 대한 매우 훌륭한 분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대한 그 부분, 그 문단은 매우 신비스럽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그[바울]는 기본적으로 두 버전 사이를 오갑니다. 제가 생각하는 키 포인트는 그것들을 함께 읽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의미에서의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일종의 근본적 긍정입니다. 그러나 두 문단 뒤에서 그는 - 마치 현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처럼 -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둘은 함께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유해야 하는 것은 저기서 일어나 우리에게 올 정도로 충분히 선한 사내인 신이 아니라, 한 의미에서, 신성 그 자체의 자기 제한입니다.        

The basic message is that I think there is a certain dimension of Christianity which for more complex reasons is missed, I think, by Badiou, because of his overall view that there is no place for finitude, as for example in his critique of Heidegger where he misses the point.  He even goes into this mode where being-toward-death is just the animal level of being threatened . . . although I don't identify Heidegger's being-toward-death with death drive, Badiou is also missing that, because he cannot elevate finitude to its transcendental a priori dignity.  He remains precisely, at a certain level, a pre-kantian metaphysician.  

11. 기본 메시지는 제가 그리스도교에는 아주 복잡한 이유들로, 예를 들어 핵심을 놓치고 있는 그의 하이데거 비판에서처럼, 유한성에는 아무런 자리도 없다는 그의 전반적 견해 때문에,  바디우가 놓치고 있는 어떤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는 죽음을 향한 존재는 동물적인 위협당함의 수준일 뿐이라고까지 그 방식으로 논합니다. ... 비록 저는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를 죽음충동과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바디우는 유한자를 그것의 초월적인 선험적 위엄성으로 고양시킬 수 없기 때문에, 죽음충동 또한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정확히, 어떤 수준에서, 전칸트적인 형이상학자로 머물러 있습니다.  

JPS:  Next let's talk about this idea of the incarnation, as you read it in The Puppet and the Dwarf, as symbolizing an internal difference, a lack in God.  The other side of that speculative judgment is the way you read Christ, from the perspective of finitude.  Now for orthodox Christianity, Christ is the icon of God:  what can be known of God is seen in Christ.  Now for your materialist idiom, you want to say something like "Christ is the icon of humanity, or of what in humanity is not quite human"—is  that what is breaking through from the perspective of finitude?

12. 이제 <꼭두각시와 난장이>에서 당신이 읽었던 대로 신 속에서의 하나의 결여, 하나의 내적 차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이 성육신이라는 아이디어에 관해 얘기해 보지요. 그 사변적 판단의 다른 면은 당신이 유한성의 시각에서 그리스도를 읽는 방식입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는 신의 아이콘입니다: 신에 대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속에서 보인다는 것이죠. 반면 당신은 유물론적 어법으로 “그리스도는 인류의 아이콘, 또는 별로 인간적이지 않은, 인류 속의 무언가의 아이콘이다”같은 것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 유한성의 시각에서 어떤 돌파구가 열린 것인가요?

SZ:  One thing I would like to specify is that nonetheless I violently reject this so-called "humanist" reading of Christianity, which says that simply, in a kind of Fuerbachian boring statement, that God is only the projection of various aspects of being human, and so on.  No, I think this "more in the human than humanity"—you have to take it very radically.  The basic message of religion, to put it in a nutshell, is that humanity cannot stand on its own, that you need an otherness, not a natural otherness like the earth or the all-embracing feminine . . . Here I may be approaching not so much gnosticism as certain not a little bit heretical twists, because I want to say not only that humanity only knows God through Christ but that only through Christ does God know himself.  We all know that this is a well-known gnostic, or not so much gnostic as a certain mystic tradition or heretical move, this idea that our knowledge of God is divine self-knowledge, and so on.

13. 그럼에도 제가 그리스도에 대한 소위 이 “인간주의적” 독해를 단호히 거부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종의 진부한 포이에르바하적 진술로 신은 인간임의 다양한 측면들의 투사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저는 신을 “인간보다 더 인간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당신은 그것을 매우 급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의 기본 메시지는, 단적으로 말하면, 인류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 지구나 전포괄적인 여성성같은 자연적 타자성이 아닌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저는 영지주의에보다는 어떤 적잖게 이단적인 변형들에 근접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저는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을 안다고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이 그 자신을 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이 잘 알려져 있는 영지주의적,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신비주의 전통이나 이단적 움직임이라는 것을 압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신의 자기 지식 등등이라는 이 아이디어 말입니다.    

But this is also how I read Jewish iconoclasm.  I don't think Jewish iconoclasm is opposed to Christianity.  Those who claim Jews got it correctly, let's not conceive God in an anthropomorphic way, Christians screwed it up in a half-pagan way—no!  They don't get it.  The true lesson already of Jewish iconoclasm is against this gnostic fake mysticism.  The only terrain of the divine is contact with other humans.  The divine is not [there] in this gnostic way, you withdraw into some absolute knowledge.  Images of God [are not proscribed] because God is tout autre, beyond, and every image betrays him, but because the space of the divine is not up there, it's here, in human interactions, and I think this is perhaps only brought to a conclusion in Christianity.

14. 그런데 이것은 또한 제가 유대교적 우상파괴주의를 읽는 방식입니다. 저는 유대교적 우상파괴주의가 그리스도교에 대립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올바로, 우리 신을 신인동성동형적으로 상정하지 말자고 했던 반면 그리스도교인들은 그것을 반은 이교적인 방식으로 망쳤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미 유대교적 우상파괴주의의 참된 교훈이 이 영지주의적인 사이비 신비주의에 대한 반대입니다. 신적인 것의 유일한 영토는 다른 인간들과의 접촉입니다. 신적인 것은 어떤 절대적인 지식으로 퇴거하는, 그러한 영지주의적 방식에는 없습니다. 신의 이미지는 신이 전적으로 타자이고 넘어서 있고 모든 이미지가 그를 잘못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신적인 것의 공간이 저기 위가 아니라, 여기에, 인간적 상호작용 사이에 있기 때문에 금지되는데,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만 결론에까지 다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But again I cannot emphasize enough, I am not playing the old game, "theology is just the alienated self-image of humanity" and so on.  The whole problem is precisely that humanity never coincides with itself.

15. 단, 제가 “신학은 다만 인류의 소외된 자기 이미지일 뿐이다 등등”의 옛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님은 여전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체 문제는 바로 인류가 결코 그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JPS:  Does this have to do with why for you the true anti-type of Christ is not Adam, but Job.  Why is that, exactly?

16. 이것은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안티-유형이 아담이 아니라 욥인 이유와 관련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확히 왜 그런가요?

SZ:  On the one hand, as we all know, this is one of the standard readings of Christianity, that Job's suffering in a way points towards Christ's suffering.

17.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욥의 수난은 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표준적 독해들 중 하나입니다.

JPS:  But you also, in The Puppet and the Dwarf, propose the character of Job as the first great critic of ideology.  What is uncanny about Job however, is that unlike the modern liberal subject who considers herself as having the legal right to the criticism of the state, of religion, of any authority, etc., Job does not presume that he has the right to criticize God.  After God's "answer" to Job—an answer which takes the form of a kind of obscene slide-show of the history of God's power—Job remains silent.  How, then, can you claim that Job is the first critic of ideology?   How and in what sense are we to interpret Job's silence as critical?

18. 그러나 당신은 또한 <꼭두각시와 난장이>에서 욥의 인물됨을 최초의 위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자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서 꺼림칙한 것은 그 자신이 국가, 종교, 일체의 권위 등등에 대한 합법적인 비판 권리를 갖고 있다고 고려하는 근현대의 자유주의적 주체와는 달리 욥이 자신에게 신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이 욥에게 “응답” - 신의 권능의 역사의 일종의 외설스러운 슬라이드 쇼의 형태를 취하는 응답 - 한 후에도 욥은 침묵을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욥이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자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욥의 침묵을 비판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까?

SZ:  There is sympathy with God:  Job correctly reads this very strange text, this divine boasting:  "I created monsters, sea serpents, who are you?" [Job replies:] "I sympathize with you, I know that this is a show to conceal that you are impotent. . ."
19. 신과의 공감이 있습니다: 욥은 올바르게 다음의 매우 이상한 텍스트, 이 신의 뽐냄을 읽어냅니다: “나는 괴물들, 바다 뱀들을 만들었다. 너는 누구냐?” [욥의 응답:] “당신에게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이 당신이 무능하다는 점을 가리기 위한 쇼라는 것을 압니다..”

Where I see this critical-ideological dimension is more in this—I would really like to write about these three or four guys who confront Job.  In these three or four guys you see a spontaneous categorization of different modes of ideology.  The first guy is a pretty brutal, simplistic ideologist.  He says God is God, you suffer because you must have done something wrong.  The other guys have more and more refined versions and so on.  But again, the shocking news for me is that when God appears, you remember he says "every word that Job says is true."  In a way Job doesn't even have to answer because God, in a way . . .

20. 저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거기에 이러한 비판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이 더 있다고 봅니다 - 저는 정말이지 욥을 대면하는 이 세 네 사람들에 관해 쓰고 싶습니다. 이 세 네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양식들의 자생적인 범주화를 목도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주 난폭한, 단순주의적인 이데올로기스트입니다. 그는 신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무언가 그릇된 것을 했음에 틀림없기 때문에 수난을 당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점점 더 세련된 버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저에게 충격적인 소식은 신이 나타날 때,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가 “욥이 말한 모든 것은 참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한 방식으로, 욥은 심지어 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한 방식으로..  

JPS:  God answers for him?

21. 신이 그를 위해 답하지요?

SZ:  Yes, God says everything Job says is true and everything those four ideologists said is false.  So God clearly takes sides.  This is for me really the single maybe most radical theological breakthrough, especially if you read it with Rene Girard.  I don't always follow Girard but here I think he was right that what matters is this parallax as such, that is so uncanny.  It's not simply who is right:  in a way, nobody is right.  The point is not simply that God was wrong . . .

22. 그렇습니다, 신은 욥이 말하는 모든 것이 참이고 이 네 이데올로기스트들이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은 분명히 편을 듭니다. 이것은 저에게는 실로 유일한 가장 급진적인 신학적 돌파구인듯한데, 르네 지라르와 함께 그것을 읽는다면 특히나 그렇습니다. 저는 언제나 지라르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저는 그가 중요한 것은 이 시차 자체라고, 그것은 매우 무시무시하다고 본 점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옳은가가 아닙니다: 한 방식으로, 누구도 옳지 않습니다. 요는 단순히 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

I tend to agree with historicist critics of Christianity about this first scene with the devil.  Probably this was a remainder of some previous pagan tradition where you have something like this, a gentleman's conversation between God and devil, let's make a deal, and so on . . . but I wouldn't make too much out of that.  OK, they took it, OK!  Bricolage, it's how you write sacred books!  What interests me more is that you have two perspectives, and you cannot say this or that is the true one.  You cannot say simply Job was right, God was cruel, you cannot say it was just illusion, there is this undecided openness.  This is for me such a tremendous breakthrough.  Why?   It's not the usual oriental openness, where all our perspectives are finite. . . it's not just different finite perspectives on some more primordial maternal chaos or whatever.  No, the gap is between God and man . . . Never forget this.

23. 저는 악마가 등장하는 이 첫 번째 장면에 관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역사주의적 비판가들에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이를테면, 신과 악마 사이에서의 신사의 대화, 우리 타협해 봅시다 등같은 어떤 것을 지닌 이전의 이교적 전통의 잔여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을 그리 중히 여기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맞습니다! 브리콜라쥬, 그것이 성스러운 책들이 씌여지는 방식입니다! 저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두 가지 퍼스펙티브들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것이나 그것이 바로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단순히 욥이 옳았다, 신은 잔인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은 환영일 뿐이었으며, 거기에는 이러한 결정되지 않은 개방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대단히 엄청난 돌파구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모든 우리의 퍼스펙티브들이 유한한, 통상적인 동양적 개방성이 아닙니다 ... 그것은 어떤 더 원초적인 모성적 카오스나 그밖의 무엇이든간에 그것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유한한 퍼스펙티브들일 뿐인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 결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That's my thesis:  you just have to transpose this radical gap back into God himself and you get Christ.  This is the big mystery I'm struggling with.  This is in the subtitle of the book [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In a way I am sorry for that subtitle because some of my more vulgar materialist antitheological friends misread it and thought that I was saying Christianity is in itself perverse, and that I want to point to some perverse core in a negative way.  Or some people even misread it as if in a kind of vulgar Deleuzian way that I want to assert "yes, Christianity is perverse!"—you know, people who praise perversion as liberation, and so on.  No, no none of it!  

24. 저의 테제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이 근본적인 간극을 신 자신에게로 되돌기만 하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고투하고 있는 대 신비입니다. 이것은 책 [<꼭두각시와 난장이>]의 부제, “그리스도교의 비꼬여 있는 핵심”에 들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 부제는 유감스러운 것이기도 한데, 저의 더 속류 유물론적인 반신학적 친구들 일부는 그것을 오독해 제가 그리스도교가 그 자체로 비꼬여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그리고 제가 부정적인 방식으로 어떤 비꼬여있는 핵심을 지적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을 속류 들뢰즈주의자적 방식으로 오독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좋아, 그리스도교는 비꼬여있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고 말입니다 - 당신도 알다시피, 그들은 비꼬임을 해방 등등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이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My desperate problem is how to draw, how to extract the Christian notion of redemption from this financial transaction logic.  This is what I'm desperately looking for.  Here I think it is crucial to read Christ's sacrifice not literally as paying a debt.  It is also—we should just trust our intuitions here—because the message of Christ's sacrifice is not "now I take it for you, you can screw it up again."  No, it just opens the space for our struggle, and this is the paradox I like.  This is what I like in what maybe is the best chapter of this book, the fifth one [of Puppet].  To put it in very simple terms, Christ's redemption doesn't mean that, OK, now we can go watch hard-core movies because we are redeemed each time.  No, it's done, the Messiah is here, it's done, means that the space is now open for struggle.  It's this nice paradox that the fact that the big thing happened does not mean it's over.  It precisely opens the space for struggle.  This is what I find again so incredible.  Which is why to the horror of some of my Jewish friends, who doesn't like this idea that in Christianity everything happened whereas in Judaism the Messiah is always postponed, always to-come, and so on.  No, I like here this crazy radicality of Christianity which is that, no, it happened, it already happened.  But precisely that doesn't mean everything is already decided.  No, again, what intrigues me is that I find here such a shattering revolution of the entire economy. . .

25. 제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구원 관념을 금융적 거래 논리로부터 끄집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문자그대로가 아니게 행해진 채무 지불로 읽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또한 -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직관을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 그리스도의 희생의 메시지가 “지금 나는 너를 대신해 그것을 받아들인다, 너는 그것을 다시 망쳐놓을 수 있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투쟁을 위한 공간을 열어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좋아하는 역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책[<꼭두각시와 난장이>]의 최고의 장일 5장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좋아, 이제 우리는 매번 구원받기 때문에 하드코어 영화를 보러갈 수 있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구원이 행해졌다는 것은, 메시아가 여기 있다는 것은 공간이 이제 투쟁을 위해 열려있음을 의미합니다. 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멋진 역설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투쟁을 위한 공간을 엽니다. 이것이 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것이 일어났던 반면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언제나 연기된다, 언제나 앞으로 올 것으로 존재한다 등등의 이 아이디어를 싫어하는 저의 유대인 친구들 일부가 공포를 느끼는 이유입니다. 저는 여기서 구원이 일어났다는,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는 그리스도교의 이 광폭한 급진성이 좋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시 저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제가 여기서 전체 경제를 산산히 부수는 혁명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And another aspect which is linked to this entire economy—and here I do agree with Badiou—I do not agree with his critics who think Paul's famous "for me there are no Jews nor Greeks" simply means everybody can become a member, it is universally open.  Then you can play all these games:  if you are out, then you are not even human, there are only my brothers and if you are not my brother you are not even people.  OK, OK, but my point is that Badiou nonetheless is still more precise.  I speak here ironically of Badiou's Leninism.  The shattering point is that truth is unilateral, that universal truth, no less universal for that reason, is accessible only from an engaged position.  We don't have, "you are saying this, I am saying that, let's find the neutral position, the common."  Truth is unilateral.

26. 그리고 이 전체 경제에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은 제가 바디우에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즉 저는 “나에게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는 바울의 유명한 말이 단순히 모든 이가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구원은 보편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비판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다음의 모든 게임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밖에 있다면, 당신은 심지어 인간조차도 아니다, 오직 나의 형제들만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형제가 아니라면 당신은 심지어 사람도 아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저의 요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우가 여전히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이러니칼하게도 바디우의 레닌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파쇄점은 진리는 일방적이라는 것, 보편적 진리는, 그 이유로 덜 보편적인 것은 아닌데, 오직 참여적 입장에서만 접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중립적 위치, 공통적 입장을 찾아보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일방적입니다.    

This is where I think Agamben misreads Badiou (because Agamben's book is explicitly in polemic with Badiou) precisely concerning universality.  What Agamben tries to prove is that Paul's position is not universality but even double division—you cut a line, a division between those who are in and those who are out within every community.  But I would say that precisely this is the Paulinian-Hegelian notion of universality, not universality as a positive encompassing feature.  Universality is a line that cuts universally and this is, how shall I put it, absolutely unique in Christianity and this is what we are losing with these gnostic wisdoms and even with political correctness, tolerance, and so on, because the notion of truth there is not that of a fighting truth but that of differences, space open for everything.  This notion of truth as painful, truth means you cut a line of difference . . . which is why for me, as I claim, you know that mysterious statement of Christ's "I came here not to bring peace but a sword"—I don't think this should be read as "kill the bad guys."  It is a militant work of love.

27. 제 생각으로 이것은 아감벤이 바로 보편성과 관련하여 바디우를 오독하는 지점입니다(아감벤의 책은 명시적으로 바디우를 논박합니다). 아감벤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의 입장이 보편성이 아니라 이중적이기까지 한 분할이라는 것, 바울의 입장에서는 모든 공동체에서 안에 있는 이들과 밖에 있는 이들 사이에 분할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바울적-헤겔적 보편성 관념이라는 것, 그들에게서 보편성은 실정적인 포괄적 면모가 아니라는 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보편성은 보편적으로 절단하는 선이며 이것은, 제가 어떻게 표현해야 하든 간에, 그리스도교에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 영지주의적 지혜들로 인해, 그리고 심지어는 정치적 올바름, 관용 등등으로 인해서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서 진리의 관념은 투쟁하는 진리의 관념이 아니라 차이들의, 모든 것에 개방된 공간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관념에서 진리는 당신이 차이의 단절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바로 그것이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을 가져오기 위해서 여기 왔다”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진술을 제가 “나쁜 녀석들을 죽이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전투적인 사랑의 역사입니다.  

JPS:  A cut within ourselves?

28. 우리자신들 내에서의 절단 말인가요?

SZ:  Yeah, yes!  This is why again, in a totally different way (you put it wonderfully) this too, is in a movie that I like,  Fight Club, where at first, you hit yourself.  This is the most difficult part.  The change is a change in you.  Herbert Marcuse of the Frankfurt School, so sadly forgotten today, put it in a very nice way in his essay on liberation, "freedom is the condition of liberation."  In order to liberate yourself you must be free.

29.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당신은 멋들어지게 표현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파이트 클럽>에도 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가격합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변화는 주인공 속에서의 변화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은 망각되어 있는데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해방에 관한 그의 에세이에서 그것을 매우 휼륭하게 “자유는 해방의 조건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당신은 [먼저] 자유로워야 합니다.  

We see this today, with feminists, that the first step in liberation is that you perceive that your situation is unjust.  This already is the inner freedom.  The problem is not, at first, that the situation for women was bad, but [rather] that they just accepted it as a fact.  Even in revolution it goes like this.  If you look at the French Revolution, the shift was purely ideological.  They overthrew the king when they started to perceive that position as unjustified.  Look at it in an objective way.  The ancienne regime was, in the second part of the 18th century, much more liberal and open than before.  It's just that the implicit ethical standards changed.  My big obsession with Christianity is that there is something extremely precious in this legacy that is being lost today.

30.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봅니다. 해방에서의 첫 단계는 당신이 당신의 상황을 부정의한 것으로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내적 자유입니다. 문제는, 최초에는, 여성들에게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저 그것을 하나의 사실로 승인했다는 것입니다. 혁명에서도 사정은 이와 같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보면, 전환은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위치를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지각하기 시작했을 때 왕을 전복시켰습니다. 그것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보아 봅시다. 구체제는 18세기 후반부에 그 전보다 훨씬 자유로웠고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암묵적인 윤리적 기준이 변화했던 것 뿐입니다. 제가 그리스도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이 유산에 오늘날은 상실되어 있는 극히 귀중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JPS:  This is a question about idolatry, one of the greatest, perhaps the greatest theme of monotheistic religion, and of the Jewish, Christian, and Islamic scriptures.  You claim provocatively in The Puppet and the Dwarf that "the ultimate idolatry is not the idolizing of the mask, the image, but the belief that there is some hidden, positive content beyond the mask" (138).  What do you mean, exactly, by this phrase?

31. 우상숭배에 관한 의문으로 가보지요. 그 의문은 유일신 종교의, 그리고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성전들의 가장 큰 테마들 가운데 하나, 아마도 가장 큰 테마입니다. 당신은 <꼭두각시와 난장이>에서 도발적으로 “궁극적 우상숭배는 가면의, 마스크의 우상화가 아니라 가면 너머에 어떤 숨겨져 있는, 실정적인 내용이 있다는 믿음이다”(138)라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이 구절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SZ:  The key point for me is that Hegelian statement which I make all the time, which is that what dies on the cross is not a finite representative of God, but the God beyond himself.  So that "Holy Spirit" means precisely, we are on our own, in a way.  This terrible opening, this freedom, which, and here I am quite dogmatic:  what we really mean by freedom was opened only through Judeo-Christian space.  Freedom in this radical sense only is or appears as a correlate of what Lacan would have called desire of the Other qua Other.  Without the abyss of the other, without perceiving the other in an abyss, without not knowing what the other wants, you are not free.  If you know what they other one wants, and you are the object of his desire . . . Here it can be said also why Christianity is the religion of love.  It's a positive ontological constituent of love:  you only love someone who is an abyss, whom you don't know.  Love always means this. . .  In order to love someone, it should be an abyss . . . it should be a lacking in perfect being, but at the same time a being with an impenetrable excess.  There is no love without this.  You have all that mystical stuff where you say yes to the universe, but that's not what is uniquely Christian love.  

32. 저에게서 키 포인트는 제가 내내 제기한 헤겔적 진술 - 십자가에서 죽은 이는 신의 한 유한한 대행자가 아니라 그 자신 너머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독립적이라는 것을[책임의 주체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가공할 열림, 이 자유, 자유라는 말로 우리가 진실로 의미하는 그것은, 대단히 독단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만,  유대-그리스도교적 공간을 통해서만 열렸습니다. 이 근본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라캉이 타자로서의 타자의 욕망이라고 불렀을 것의 한 상관항으로서만 존재하거나 등장합니다. 타자의 심연 없이는, 타자를 심연 속에서 지각하지 않고는, 타자가 원하는 것을 모르지 않고서는, 당신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들 타자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그의 욕망의 대상입니다 ... 왜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인지가 또한 여기서 말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심연인 이만을, 당신이 모르는 이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사랑의 한 실정적인 존재론적 구성요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누군가는 하나의 심연이어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완벽한 존재 속의 한 결여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침투할 수 없는 과도함을 지닌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 우주에 예스라고 말하는 온갖 신비주의적 잡동사니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독특하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인 것이 아닙니다.

And here I think, again, as for the essence of Christianity Kierkegaard got it first.  When he emphasized that it is totally wrong to read Christ as a metaphor in the sense that first the truth appears just as a person but then with the Holy Spirit we know that it's not a person but just a universal notion of love, or whatever.  The greatness of Kierkegaard is to show that our only access to eternity is through temporality.  Not in this fake Hegelian sense that eternity is just the totality of the movement of the temporal, but this crazy paradox that in a specific historical moment something happened.  Only through that passage do you get eternity.  That is to say, if you go directly to eternity, you get nothing, you miss eternity itself.  So if I were to pick out one writer here who got it, it would have been technically Kierkegaard.  It's also clear that the Kierkegaardian triad aesthetic-ethical-religious is so clearly the Lacanian imaginary-symbolic-real.  It fits so perfectly.  

33. 그리고 여기서 저는 다시 키에르케고르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처음으로 제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나타나지만 그 다음에는 성령과 함께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사랑 관념 또는 그 무엇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하나의 은유로 읽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가 강조했을 때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위대함은 우리가 시간성을 통해서만 영원성에 접근할 수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영원성은 시간적인 것의 운동의 총체라는 사이비 헤겔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부조리한 역설로 이해됩니다. 오직 그 경과[사건]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원성에 이릅니다. 즉, 직접적으로 영원성으로 간다면 우리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영원성 그 자체를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한 저자를 한명 골라내야 한다면, 그것은 학술상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일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적인 삼항(미적인 것 - 윤리적인 것 - 종교적인 것)이 라캉적인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라는 것도 아주 명백합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Also, what interests me in some of my works is to explain this relation between sexuality and love.  Not in some cheap New Age religious sense where the ultimate religious experience is to have good sex, because you get the yin-yang balance and so on . . .  what I think is that something is missing for me, in Kierkegaard.  I develop this, I think, in my Wagner book.  It's that you have a.) the aesthetic mode of sexuality which is, basically—I know it's more complex than this—seduction, Don Giovanni, blah blah.  Then you have the ethical mode which is marriage.  Then where is the religious mode?   I think it is courtly love, this absolute logic, and so on.  But something is missing there.  And the whole trick of it, and Kierkegaard was approaching it, is how (we should never forget it) with Kierkegaard, it's either/or:  the three are not at the same level, you always have to make a choice between the two.  Which is why (and in some of his most radical formulations Kierkegaard did get a presentiment of it), paradoxically, once you make the fundamental choice and you opt for the ethical, from within the ethical the only step toward the religious is, often in its appearance, a regression towards the aesthetic.

34. 또한, 제 저술들 일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성과 사랑 사이의 이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종교적 경험은,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등등의 이유로 좋은 섹스를 하는 것이라는 어떤 싸구려 뉴 에이지 종교적 의미에서 이 관계에 관심있는 것은 아닙니다 ... 제가 생각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그너를 다루는 책에서 개진했던 듯한데, 이런 생각입니다. 우리는 심미적인 성의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 이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 유혹입니다. 돈 죠반니 등등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그 다음 우리는 결혼이라는 윤리적인 성의 양식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성의 양식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궁정식 사랑, 그 절대적 논리 등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접근법의 전체 트릭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키에르케고르적 방식입니다: 그 셋은 동일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일단 근본적 선택을 행해 윤리적인 것을 선택하면, 윤리적인 것 안에서부터의 종교적인 것을 향한 유일한 이행이 종종 그 외관상에서 심미적인 것을 향한 퇴행인 이유입니다. 그의 가장 급진적인 정식화들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그것을 예감했습니다.  

Which is why I refer, in the last pages of my On Belief , to that weird English catholic novel by Evelyn Waugh Brideshead Revisited, where you have exactly this.  For the heroine, it would be ethical to marry the guy, now [at the end], because she is divorced.  But she says no.  Her only way to maintain fidelity to God is to go on changing lovers like crazy.  Ethical would be, as Kierkegaard puts it (in a wonderful way apropos Abraham) the ethical is sheer interpretation itself.  To act ethically, as opposed to religiously . . . from a religious perspective ethics is not something you should stick to against temptation.  The ethical, as such, is the temptation.  Which is why, again, this crazy leap of faith into the religious, can well appear, to external observers, to those not within the event, as merely aesthetic, as some kind of aesthetic regression.  And again I think that to return to a diagnosis of where we are today, I think that precisely what I find horrible in these new forms of spirituality is that we are simply losing our sense for these kinds of paradoxes, which are the very core of Christianity.

35. 그것이 제가 저의 <믿음에 관하여>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블린 워 브라이드헤드에 의해 수정된 괴상한 영국 카톨릭 소설을 언급했던 이유입니다. 그 소설에서 사태는 정확히 이렇습니다. 여주인공에게는, 이혼했기에,  끝에 가서 남주인공과 결혼하는 것이 윤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노라고 말합니다. 신에 대한 충실을 유지하는 그녀의 유일한 방도는 미친듯이 계속 연인들을 바꿔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아브라함에 관해 기막히게) 말한 것처럼, 순전한 해석 그 자체입니다. 윤리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행위하는 것과는 대립됩니다 ... 종교적 관점에서는 윤리는 유혹에 맞서 고수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것은, 그 자체로, 유혹입니다. 그것이, 역시, 이 신앙에서 종교로의 이 부조리한 도약이 외부의 관찰자에게는, 그 사건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단지 심미적인 것으로, 어떤 종류의 미적 퇴행으로 충분히 보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진단으로 돌아가면, 이 새로운 형태들의 영성에서 제가 끔찍하다고 느끼는 것은 정확히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바로 핵심에 있는 이러한 종류의 역설들에 대한 감각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