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
Such study shows that, by following
the spontaneously generated moral traditions underlying the competitive market
order (traditions which do not satisfy the canons or norms of rationality
embraced by most socialists), we generate and garner greater knowledge and
wealth than could ever be obtained or utilised in a centrally-directed economy
whose adherents claim to proceed strictly in accordance with `reason'. Thus
socialist aims and programmes are factually impossible to achieve or execute;
and they also happen, into the bargain as it were, to be logically impossible.
(『The Fatal Conceit: The
Errors of Socialism』, 7쪽, http://www.libertarianismo.org/livros/fahtfc.pdf)
하이에크가 지지하는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르자.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념을 둘러싼 온갖 문제들도 잠시 무시하기로 하자.
논의의 편의상 하이에크의 주장대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지식과 부가 사회주의 체제보다 더 크게 생산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은
과학의 교권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주의자의 목표가 사실의
측면에서 또는 논리의 측면에서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도덕 철학의 교권의
문제, 즉 도덕적 가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하이에크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제 1 (사실 명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지식과 부가 사회주의 체제보다
더 크게 생산된다
전제 2 (가치 명제):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
결론
(가치 명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열등하다
만약 하이에크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그리고 사실 명제가 입증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그의 논리를 논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개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논리적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삼단 논법의 결론에 시비를 걸기 위해서는
전제를 문제 삼아야 한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지식과 부가 사회주의 체제보다 더 크게 생산된다”라는 사실 명제가 참이 아님을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과학 논쟁이 될 것이다.
둘째,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라는 가치 명제에 시비를 거는 방법이 있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도덕 철학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또는 실증적으로 입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가치 명제는 입장일
뿐이기 때문에 논박이 아예 불가능하다.
만약 누군가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내 입장은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지식과 부의
크기뿐 아니라 기회의 평등,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것, 범죄율
감소, 생태계 보호 등도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기회의 평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논쟁은 아무리 뛰어난 천재가 나타나도 과학 논쟁처럼 말끔하게
해결될 수 없다.
하이에크는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라는 가치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이에크의 논증이 무의미하다.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은 전제에서 시작한 논증은 그 논증 과정에
아무런 흠이 없다 하더라도 무의미해진다.
위에 인용한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지식과 부를 자본주의보다 더 크게 생산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지상 목표다. 또는 사회주의자들은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라는 가치 명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하이에크가 보기에는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실행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어느 정도 아는 저명한 사회주의자들
중에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라는 가치 명제를 주창하든 말든 그것은 하이에크의 자유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자신의 가치 명제를 공유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얼마 전... 어떤 다른 사이트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그때 주제가 참 진부하게도 경제학적 관점에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하는가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저는 주로 관망하는 파였는데 어떤 복거일 꼬붕 경제학과 신입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신자유주의 예찬론을 펼치면서 성매매를 적극 찬성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덕 원리주의로 몰아붙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덕하님에게 주워들은 가락으로 과학과 도덕의 교권을 나눠야 하지 않냐면서 어차피 정책 결정을 하는데 있어선 당위명제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선/악을 따지는데 너만 진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했죠. 그 사람이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 오가다가 제가 범죄가 이익이 된다면 왜 이를 단속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럼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저하되면 왜 안되냐고 했죠. 그러자 상대가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아니 경제학은 당연히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의 소유방법을 추구하는 사고 체계인데 그 기본원리에 시비를 걸면 어쩌겠다는 거냐?"고 반문하더군요. 솔직히 일순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당시야 워낙 여러 말이 오고갔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경제학 (사회주의건 아니건) 에 대해서는 "오직 지식과 부의 크기만 중요하다"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이덕하 / 여기서 하이에크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온갖 사회주의의 총체, 또는 온갖 사회주의 유파들의 엑기스, 혹은 사회주의의 이념형, 그런게 아니라 현실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가 표방하던 경제제도과 목표 및 그와 관련된 공식적 이념체계를 말하는 겁니다. 그 사회주의에서는 현실 자본주의보다 생산력 수준에서 우월한 수준을 (머지 않은 미래에) 달성가능하다고 공언했습니다.
아래 정리가 덕하님의 정리보다 하이에크에게 훨씬 공정한 정리가 될 겁니다.
1) 적어도 같은 값이라면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보다 더 큰 부와 지식을 산출하는 체제가 우월하다.
2) (소비에트식 현실) 사회주의는 분배정의 등 다른 조건에서 우월하거나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은 조건하에서도 자신들의 경제체제로 자본주의보다 더 큰 부와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주장).
3) 만약 이 사실주장이 옳다면, 진실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한 체제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4) 하지만, 이 사실주장은 (여차저차한 이유로) 틀렸다.
덕하님의 글을 읽을 때 곧잘 느끼는 답답함이 있는데, 님이 뻔히 아는걸 상대방은 절대로 모를 거라고 '가정'한다는 겁니다.
그리고서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여러 가능한 해석들 가운데 가장 바보스러운 것을 골라낸다는 겁니다.
바둑의 수읽기를 할 때 그렇게 하시진 않을 거 아닙니까?
이덕하 / 하이에크가 깐 건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권력을 통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를 깐거죠. 그리고 존재했던 모든 현실사회주의가 사실상 이 체제를 따랐습니다. 시장사회주의 등 다른 사회주의적 대안들은 아카데믹한 논의에만 머물렀지 정치적으로 실현된 바 없었죠.
고로 하이에크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를 따르는 사회주의 유파 (사실 이게 사회주의의 '대표'격, 혹은 주류격이었죠)를 성공적으로 깠다면, 해서 하이에크가 이를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망했다"라고 한다면 이걸 뻔뻔하거나 멍청하다고 부를 순 없습니다.
과거 근대기에 동아시아에서 유교적 사회체제를 공격한 논자를 두고, "왜 논리적으로 상정 가능한 모든 유교적 대안들을 까지도 못하고 '현실' 유교체제만 깐 주제에 유교를 깠다고 의기양양하느냐"고 따지는 건 이렇게 따지는 쪽이 오히려 무리하는 겁니다.
그런 시비를 걸 시간과 정력이 있다면, 그렇게 공격당한 현실 체제를 성공적으로 옹호하든지, 혹은 다른 대안적 유교 혹은 사회주의적 대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에 신경쓸 일입니다.
미뉴에 님의 지적에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하이에크가 당시의 현실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깠다고 해서 그게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성공적인 비판이라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단적인 예로 당시 현실 사회주의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그처럼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세력을 동일시 해서 한 쪽에 대한 비판이 다른 쪽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건 마치 같은 우파(?)라고 해서 한국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이 미국 공화당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뭐... 그건 우리나라 대부분의 수꼴들의 생각과도 일치하는군요. 모든 것을 다 시장과 경쟁에 맡겨야 한다고 악을 쓰다가도 박정희의 계획경제에 대해서만은 극구 예찬하고 있지 않습니까?
http://www.cfe.org/mboard/bbsDetail.asp?cid=mn1308578001&pn=1&idx=29096
하이에크는 민주주의의 남용에 대해 경고하면서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정부보다는 자유주의적 독재자가 더 낫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후진국들에서 [피노체트, 박정희같은 장군들의] 독재가 자유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해주는 역할 - 이행기 독재 - 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독재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계획경제이기도 하므로, 계획경제의 비합리성 내지는 바람직하지 않음에 대한 하이에크의 논거들과 이행기 독재에 대한 하이에크의 옹호가 어떻게 양립가능한 지는 분명 논쟁적입니다.
http://coreyrobin.files.wordpress.com/2012/07/hayekchile.pdf
하이에크가 정확하게 무엇을 깠는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노예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Socialism과 Collectivism은 '계획경제'라는 방법론적 특성을 공유한다.
- 내가 공격하고 싶은 것은 Socialism에서의 계획경제이다.
- 그런데 liberal들과 논쟁하다보면 Collectivism적 계획경제(즉, 보다 넓은 범위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무시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그 대상이 된다.
- 따라서 나는 이책에서 Collectivism적 계획경제를 공격하겠다.
실제로 하이에크는 이런 저술방침에 의거하여 책 초반에는 Nazi 등의 계획경제도 곁들여서 거론합니다. 그런데 책 말미로 갈수록 소비에트 계획경제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찌되었건, 하이에크는 명시적으로 '실제적 구현이 없는 사회주의는 무의미하다. 나는 사회주의 이념의 구현 수단인 계획경제를 비판하고 싶다. 그 와중에 비사회주의적 계획경제까지 비판하는 일을 양해해달라.'라고 선언합니다. 즉, 하이에크가 소비에트 비판 = 사회주의 전체의 비판으로 간주하고 저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합니다.
문화/예술/과학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