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http://www.lrb.co.uk/v30/n08/letters.html
* 관련 컬럼
http://www.inthesetimes.com/article/3425/chinas_valley_of_tears/
No Shangri-La
From Slavoj Žižek
샹그리라는 없다
슬라보예 지젝 씀
The media imposes certain stories on us, and the one about Tibet goes like thi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hich, back in 1949, illegally occupied Tibet, has for decades engaged in the brutal and systematic destruction not only of the Tibetan religion, but of the Tibetans themselves. Recently, the Tibetans’ protests against Chinese occupation were again crushed by military force. Since China is hosting the 2008 Olympics, it is the duty of all of us who love democracy and freedom to put pressure on China to give back to the Tibetans what it stole from them. A country with such a dismal human rights record cannot be allowed to use the noble Olympic spectacle to whitewash its image. What will our governments do? Will they, as usual, cede to economic pragmatism, or will they summon the strength to put ethical and political values above short-term economic interests?
미디어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부과한다. 티베트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지난 1949년 티베트를 불법적으로 점령한 차이나 인민공화국은 수십년 동안 티베트의 종교만이 아니라 티베트인들 자신들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폭압을 자행해왔다. 최근, 차이나의 점령에 반대하는 티베트인들의 저항은 다시 군사력에 의해 분쇄되었다. 차이나는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되어있으니, 티베트인들로부터 훔친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도록 차이나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인권 성적이 그토록 실망스러운 나라가 그것의 이미지에 분칠을 하기위해 고귀한 올림픽 장관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정부들은 무엇을 할까? 그들은 으레 그렇듯이 경제적 실용주의에 굴복할까 아니면 도의심과 용기를 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가치들을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관심들 위에 둘까?
There are complications in this story of ‘good guys versus bad guys’. It is not the case that Tibet was an independent country until 1949, when it was suddenly occupied by China. The history of relations between Tibet and China is a long and complex one, in which China has often played the role of a protective overlord: the anti-Communist Kuomintang also insisted on Chinese sovereignty over Tibet. Before 1949, Tibet was no Shangri-la, but an extremely harsh feudal society, poor (life expectancy was barely over 30), corrupt and fractured by civil wars (the most recent one, between two monastic factions, took place in 1948, when the Red Army was already knocking at the door). Fearing social unrest and disintegration, the ruling elite prohibited industrial development, so that metal, for example, had to be imported from India.
'좋은 놈들 대 나쁜 놈들'이라는 이 이야기에는 뒤얽힌 것들이 있다. 갑작스럽게 차이나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인 1949년까지 티베트가 독립국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와 차이나 사이의 관계의 역사는 장구하고 복잡한 것으로, 그 관계에서 차이나는 종종 보호를 맡은 상급 영주의 역할을 해왔다: 반공을 내걸었던 국민당 또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주장했었다. 1949년전, 티베트는 샹그리라가 아니라 가난하고(수명은 30을 간신히 넘겼다) 부패하고 내전들(가장 최근의 것은 붉은 군대가 이미 문앞에 와있을 때인 1948년 두 종파사이에서 벌어졌었다) 의해 찢긴 극단적으로 가혹한 봉건사회였다. 사회적 불안과 해체를 두려워해서, 지배 엘리트는 산업 발전을 금지했고, 따라서, 예를 들어, 금속은 인디아에서 수입되어야 했다.
Since the early 1950s, there has been a history of CIA involvement in stirring up anti-Chinese troubles in Tibet, so Chinese fears of external attempts to destabilise Tibet are not irrational. Nor was the Cultural Revolution, which ravaged Tibetan monasteries in the 1960s, simply imported by the Chinese: fewer than a hundred Red Guards came to Tibet. The youth mobs that burned the monasteries were almost exclusively Tibetan. As the TV images demonstrate, what is going on now in Tibet is no longer a peaceful ‘spiritual’ protest by monks (like the one in Burma last year), but involves the killing of innocent Chinese immigrants and the burning of their stores.
1950년대 초 이래 CIA가 티베트에서 반-차이나 소요들을 야기시키는데 관여해 왔으므로, 차이나인들이 티베트를 불안정화시키려는 외부의 시도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1960년대 티베트의 사원들을 파괴했던 문화혁명은 단순히 차이나인들이 들여온것이 아니었다: 티베트에 들어온 홍위병들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사원들을 불태웠던 청년 폭도들의 절대다수가 티베트인들이었다. TV 이미지들이 보여주듯이, 지금 티베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더이상 (지난 해 버어마에서 일어났던것 같은) 승려들에 의한 평화로운 '영적' 저항이 아니라 무고한 차이나인 이주자들의 살해와 그들 상점의 방화를 포함하고 있다.
It is a fact that China has made large investments in Tibet’s economic development, as well as its infrastructure, education and health services. To put it bluntly: in spite of China’s undeniable oppression of the country, the average Tibetan has never had such a high standard of living. There is worse poverty in China’s western rural provinces: child slave labour in brick factories, abominable conditions in prisons, and so on.
차이나가 티베트의 하부구조, 교육 그리고 보건 서비스에만이 아니라 경제 개발에도 상당한 투자를 한것은 사실이다. 터놓고 말해보자: 차이나가 티베트를 억압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평범한 티베트인들은 결코 그와 같이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반면] 차이나의 서부 농촌 지역들에서 빈곤은 심각한 지경에 와있다: 벽돌 공장들에서의 아이들의 노예 노동, 감옥들의 끔찍한 조건 등등.
In recent years, China has changed its strategy in Tibet: depoliticised religion is now tolerated, often even supported. China now relies more on ethnic and economic colonisation than on military coercion, and is transforming Lhasa into a Chinese version of the Wild West, in which karaoke bars alternate with Buddhist theme parks for Western tourists. In short, what the images of Chinese soldiers and policemen terrorising Buddhist monks conceal is a much more effective American-style socio-economic transformation: in a decade or two, Tibetans will be reduced to the status of Native Americans in the US. It seems that the Chinese Communists have finally got it: what are secret police, internment camps and the destruction of ancient monuments, compared with the power of unbridled capitalism?
최근, 차이나는 티베트에서의 전략을 변경했다: 정치화되지 않은 종교는 이제 허용되며, 종종 지원까지 받는다. 차이나는 이제 군사적 강제보다는 민족적 및 경제적 식민화에 더 의존하고 있으며 라싸를 서구 관광객들을 위한 가라오케 바들과 불교 테마 파크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차이나판 와일드 웨스트로 변형시키고 있다. 요약하면, 불교 승려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차이나 병사들과 경찰들의 이미지들이 가리고 있는 것은 훨씬 더 효과적인 아메리카 스타일의 사회-경제적 변형이다: 10년에서 20년 내에,티베트인들은 합중국에서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위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차이나 공산주의자들은 마침내 해낸 것으로 보인다: 비밀 경찰, 수용소 그리고 고대 기념비들의 파괴가 고삐풀린 자본주의에 비할 손가?
One of the main reasons so many people in the West participate in the protests against China is ideological: Tibetan Buddhism, deftly propagated by the Dalai Lama, is one of the chief points of reference for the hedonist New Age spirituality that has become so popular in recent times. Tibet has become a mythic entity onto which we project our dreams. When people mourn the loss of an authentic Tibetan way of life, it isn’t because they care about real Tibetans: what they want from Tibetans is that they be authentically spiritual for us, so that we can continue playing our crazy consumerist game. ‘Si vous êtes pris dans le rêve de l’autre,’ Gilles Deleuze wrote, ‘vous êtes foutu.’The protesters against China are right to counter the Beijing Olympic motto – ‘One World, One Dream’ – with ‘One World, Many Dreams’. But they should be aware that they are imprisoning Tibetans in their own dream.
서구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차이나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 이유들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이다: 달라이 라마에 의해 교묘하게 선전되는 티베트 불교는 최근 들어 대단히 유행하게 된 향락주의적 뉴 에이지 영성의 주요 준거점들 중 하나이다. 티베트는 우리가 우리의 꿈들을 투사하는 하나의 신화적 실체가 되었다. 우리가 진정한 티베트적 생활양식의 상실을 슬퍼할 때, 그것은 우리가 현실의 티베트인들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티베트인들에게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미친 지랄같은 소비주의 게임을 계속할 수 있게 티베트인들이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 번역자 추가] 진정으로 영적이 되는 것이다. 질 들뢰즈는 '당신이 타자의 꿈 속에 갖히게 되면, 당신은 끝난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이나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베이징 올림픽의 모토 -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 에 '하나의 세계, 많은 꿈들'로 맞서는 것은 올바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꿈 속에 티베트인들을 가두고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The question is often asked: given the explosion of capitalism in China, when will democracy assert itself there, as capital’s ‘natural’ political form of organisation? The question is often put another way: how much faster would China’s development have been if it had been combined with political democracy? But can the assumption be made so easily? In a TV interview a couple of years ago, Ralf Dahrendorf linked the increasing distrust of democracy in post-Communist Eastern Europe to the fact that, after every revolutionary change, the road to new prosperity leads through a ‘vale of tears’. After socialism breaks down the limited, but real, systems of socialist welfare and security have to be dismantled, and these first steps are necessarily painful. The same goes for Western Europe, where the passage from the welfare state model to the new global economy involves painful renunciations, less security, less guaranteed social care. Dahrendorf notes that this transition lasts longer than the average period between democratic elections, so that there is a great temptation to postpone these changes for short-term electoral gain. Fareed Zakaria has pointed out that democracy can only ‘catch on’ in economically developed countries: if developing countries are ‘prematurely democratised’, the result is a populism that ends in economic catastrophe and political despotism. No wonder that today’s economically most successful Third World countries (Taiwan, South Korea, Chile) embraced full democracy only after a period of authoritarian rule.
종종 질문이 제기된다: 차이나에서의 자본주의의 만발을 고려해 볼때, 언제 차이나에서, 자본의 '자연스러운' 정치적 조직형식으로서, 민주주의가 관철될까? 질문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종종 제기된다: 차이나의 발전은 정치적 발전과 결합되었었다면 얼마나더 빨랐을까? 그러나 그렇게 쉽게 가정할 수 있을까? 2년전 한 TV 인터뷰에서, 랄프 다렌도르프는 탈공산주의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의 증대를 모든 혁명적 변화 후에 새로운 번영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에 연결시켰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제한된 것었지만 진짜였던 사회주의적 복지 제도와 안전망은 해체되어야만 하는데, 이 첫번째 행보는 필연적으로 고통스럽다. 동일한 것이 복지국가 모델에서 새로운 글로벌 경제로의 이행이 고통을 수반하는 폐기들, 덜한 안전, 덜 보장되는 사회적 배려를 동반하는 서유럽에도 해당된다. 다렌도르프는 이 이행이 민주주의적 선거들 사이의 평균 기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라고, 따라서 단기적인 선거이득을 위해 이 변화들을 연기시키려는 커다란 유혹이 있을 것이라고 특기한다. 파리드자카리아는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들에서만 '인기를 끌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발도상국들이 '성급히 민주주화'된다면, 결과는 경제적 파국과 정치적 전제로귀결되는 포퓰리즘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제3세계 나라들(타이완, 남한,칠레)가 모두 권위주의적 통치의 시기를 거친 후에야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용했던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Following this path, the Chinese used unencumbered authoritarian state power to control the social costs of the transition to capitalism. The weird combination of capitalism and Communist rule proved not to be a ridiculous paradox, but a blessing. China has developed so fast not in spite of authoritarian Communist rule, but because of it.
이 노선을 따라, 차이나인들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사회적 비용을 조절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는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을 사용했다. 자본주의와 공산당 통치의 기괴한 결합은 조롱할 만한 역설이 아니라 축복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차이나는 권위주의적 공산당 통치 때문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공산당 통치 때문에 그토록 빨리 발전했다.
There is a further paradox at work here. What if the promised second stage, the democracy that follows the authoritarian vale of tears, never arrives? This, perhaps, is what is so unsettling about China today: the suspicion that its authoritarian capitalism is not merely a reminder of our past – of the process of capitalist accumulation which, in Europe, took place from the 16th to the 18th century – but a sign of our future? What if the combination of the Asian knout and the European stock market proves economically more efficient than liberal capitalism? What if democracy, as we understand it, is no longer the condition and motor of economic development, but an obstacle to it?
여기에는 그 이상의 역설이 작동하고 있다. 약속된 두번째 단계, 권위주의적인 눈물의골짜기를 뒤잇는 민주주의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것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가 우리의 과거 - 유럽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일어났던 자본주의적 축적과정 - 를 상기시켜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바로 이러한 의심이 오늘날의 차이나에 관해 우리를 그토록 심란하게 하는 것 이리라. 아시아의 가죽채찍과 자유로운 주식 시장의 결합이 자유(민주주의적 - 번역자 추가) 자본주의보다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으로 증명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대로의 민주주의가 더이상 경제 발전의 조건과 기동력이 아니라 그것의장애물이라면 어떻게 될까?
Slavoj Žižek
Birkbeck College, London WC1
참고 삼아 한 번 보시죠...
http://www.allestelle.net/bbs/view.php?id=www_bbs&no=4794
글 보다보면 지젝의 글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쓴 글들도 pdf로 볼 수 있을겁니다.

지젝의 글의 여러가지 매력중 가장 큰 것은 역설적인 성격을 포함해서 현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꼬여 있는지를, '이상적인 조합'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그 어떤 리버럴 휴머니스트들보다 냉엄하고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좋은 생각만 앞서는 순진한 이들의 박약한 지성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이런 특장점은 레닌에 대한 재평가나 스탈린(주의)에 대한 과격한 언급들에서도 엿볼 수 있고 그가 가끔 '신념의 도약'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지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략 바로 그의 이런 지점들 때문에 싫어합니다. 간혹 파시스트라고 욕하기도 하죠.
윗 글은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현실적 상관관계의, 그 상관관계에 대한 전통적이거나 순진한 생각을 깨는, 두 가지 역설에 대한 지적이고, 그 역설이 가리키는 위기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글에 대해 '박사모'니 '개발독재에 대한 옹호'니 하는 분들은 헛다리를 짚은 것입니다.
입속에서 혼자만 알아들을 소리로 우물거리지말고 할 말 있으면 분명하게 하세요.
이 노선을 따라, 차이나인들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사회적 비용을 조절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는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을 사용했다. 자본주의와 공산당 통치의 기괴한 결합은 조롱할 만한 역설이 아니라 축복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차이나는 권위주의적 공산당 통치 때문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공산당 통치 때문에 그토록 빨리 발전했다.
'그 공산당 통치 때문에 그토록 빨리 발전했다.' 와
'박정희의 군사독재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가 그토록 빨리 발전했다' 라는 논리에 그렇게 헛다리라 할 만큼 거리가 있습니까 ?
저는 지젝을 좋아 할 이유도 싫어 할 이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포스팅 된글을 중심으로 이야기 할 뿐 입니다.
개발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해놓고, 좀 거시기하니까 엉뚱한 소리로 얼버무리는..
교활한 사이비 지식인 특유의 말투로 들린다는..
윗글의 끝맺음은, 경제적 효용성을 이유로 민주주의가 파시즘으로 부터 위협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인데...
이게 전혀 우려로 들리지 않는다는 말씀.
경제적인 효율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파시즘과 바꿀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 일까요 ?
경제 개발에 독재만큼 효과적인 통치 수단은 없습니다.
그거 몰라서 독재자들과 피터지게 싸웁니까 ?
지젝 아니라 지젝할애비라도 헛 소리는 헛리로 가려 들어야지..
영어를 직역만하려 하지 말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도 좀 해보세요.
그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도 한 줄 쯤은 남기는게 토론방에 대한 예의이고...
이의가 있다면 한 줄이 아니라 열 줄이라도 남기지요. 덧붙인 글이 없을 때는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글의 기본 논지에는 동의하는구나라고 해석해도 되는거에요.. 물론 다른 분들이 알맹이 있는 코멘트를 남긴다면 제가 한글을 모르는 지젝을 대신해서 어느 정도 그를 대변해 줄 수는 있겠지요..
좋아할 이유도 싫어 할 이유도 없다면서 교활한 사이비 지식인 운운은 뭔가요? 물론 어떤 사람을 전혀 모른다면 좋아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다는 말은 믿어줄 수 있으나 어쨌든 글 하나라도 읽고 나름의 평가적 발언을 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면 모순이죠. 말하고자 하는 바에 어울리는 표현을 쓰라는 얘기에요...
그거 몰라서 피터지게 싸우냐구요? 그게 그렇게 상식이면 다렌도르프니 자카리아니 하는 유명한 식자들이 뭐하려 그런 말을 하겠어요? 장하준 선생의 최근 저서 하나에서도 논급되고 있지만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발전의 상관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쟁은 끝나있는 게 아니에요. 미국같은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에 시비를 걸고 간섭을 할때, 그 상관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척 하는) 관점이 그 시비걸기를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해왔던 면도 있구요..
우려로 들려야지요.. 지구상에는 이미 자본주의 발전도 넘칠만큼 이루었고 자유민주주의도 한계선까지 누려 온, 경제발전을 위해 이미 누려온 자유민주주의를 어느정도 희생하자는 논리가 통하지 않을 듯한 선진국들만 있는게 아니거든요.. 지젝 자신은 특히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하고 있는 얘기지만 러시아, 인도 등 후보들은 많아요.. 한국은 어떨것 같은가요? 경제논리가 민주주의적 상식을 후퇴시키고 있는 양상이, 그 양상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게 안보여요??
지젝보고 헛소리 한다고 말하는 식자들이 적지 않아요.. 어차피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은 헛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에요.. 논리적 정합성이나 논거가 현저하게 부족한 말이나 글을 헛소리라고도 하는데, 지젝의 글과 말이 그런 의미에서 헛소리일 가능성이 있기에는 리버럴에서 좌파까지 망라하는 식자들의 세계와 학문 선진국들에서 지난 20여년 이래 지젝이 누리는 권위와 유명세가 너무나 커요.. 굳이 유비를 하자면 삿갓님은 지금 아주 찐한 장면이 나오는 연애 영화에서 그 찐한 장면만 떼어보고서는 이 영화는 포르노다라고 외치는 이와 같아요..
찐한 장면 보면 찐한 장면이라하고
포르노 보고 포르노라 해도 괞찮습니다.
복분자니, 디하이드로진 옥사이드니 하지않고
그냥
산딸기 말린것, 물 이라해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모르쇠하실까봐 한 말씀 추가.
지젝이 말하는 '우리'에 러시아, 인도, 혹은 중국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
지젝의 말이라도 헛 소리는 헛 소리라해도 무식하다고 흉보지 않으니 너무 두려워마세요.
삿갓님의 위 두 댓글은 뭐라고 코멘트 할만한 알맹이나 논리가 없어요. 예를 들어, 두번째 글 첫줄이 당체
왜 거기 있는건가요? '우리'는 글쓴이들이 자기 글을 동감하며 읽어주기를 기대하는 독자를 가리키기 위해
통상 쓰는 표현일 뿐이에요. '우려'의 오타겠지요? '우려'는 일단은 중국으로 예시되고 있는데, 인도, 러시아
등은 제가 덧붙인 거에요.
첫번째 글도 엉망인데, 찐한 장면을 찐한 장면이라고 하기는커녕 철지난 감수성을 지닌 노친네들처럼 그저
찐한 장면이 나오는 연애영화일 뿐인것을 그 찐한 장면만 가지고 포르노그라피다라고 헛삯대질하고 있다는 거
에요.
복분자는 산딸기와도, 산딸기 말린 것과도, 물과도 달라요. 다른 것을 같게 말해도 괜찮다니, 비슷한 것들은 대충
같은 것으로 놓고 얘기해도 상관없다는 사고를 가진 분인듯 한데, 그런 자유분방한 사고는 남들과 이야기를 나누
거나 토론을 할 때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무엇이 알맹이고 무엇이 껍질인지 분간을 못하니안보이는 거지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안보거나
아예 마음대로 바꿔치기를하니 뭐가 보이겠습니까 ?
'우리'라고 했으면 '우리'라고 받아들여야 최소한 대화가 진행 되는거지...
포스팅하신 글 곳곳에 등장하는'우리'들중 통상적인 표현이 아닌 구체적인 의미를 띈 '우리'를 한번 짚어 봅시다.
글머리 문단에 등장하는 특정 그룹을 지칭하는 '우리' 입니다
The media imposes certain stories on us, and the one about
'우리'가 압력을 가해야 할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의 '우리' 또한 같은 의미 입니다.
There is a further paradox at work here. What if the promised second stage, the democracy that follows the authoritarian vale of tears, never arrives? This, perhaps, is what is so unsettling about China today: the suspicion that its authoritarian capitalism is not merely a reminder of our past – of the process of capitalist accumulation which, in Europe, took place from the 16th to the 18th century – but a sign of our future? What if the combination of the Asian knout and the European stock market proves economically more efficient than liberal capitalism? What if democracy, as we understand it, is no longer the condition and motor of economic development, but an obstacle to it?
'우리'의 과거는 명확히 16-18세기에 '유럽'에서 진행된 역사를 지칭하며 '우리'의 미래 또한 유럽의 미래를
의미 한다고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 ? 여기서도 중국은 '우리'가 참고로 해야할 타산지석 같은 것이지
'우리'는 분명 아닙니다.
한 줄 짜리 첫 댓글은 장난기가 섞인
농반/진반(이런류의 글들을 조.중.동이 매우 효과적으로 쓰먹지 않습니까?)의 낚시성 댓글 이었습니다.
'경청..'님이 돈을 주고 팔아도 되겠다고 응수하고...
그것에 대한 님의 무례한 반발에 눈높이를 맞추어 놀아본 것 입니다.
10분 정도만 소모하였다니 뭐, 그정도야 놀아가며 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
삿갓은 1시간 이상 소모하여서 좀 피곤 합니다^^
저는 상대방의 글을 꼼꼼히 읽고 말이 안되는 것도
될 수 있으면 말이 되는 쪽으로 이해해 볼려고 노력을 많이 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디하이드로진 옥사이드가 뭔지 아직 모르겟습니까 ?
왜 그런걸 물었는지도 모르겠고 ?
강유원님 홈페이지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나온 다른 번역글들 모두 칼도님이 올린 지젝의 글보다 더 중국편향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일단 전 기본적으로는 칼도님이 이야기 한 지젝의 주장의 요지(즉,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현실적 상관관계의, 그 상관관계에 대한 전통적이거나 순진한 생각을 깨는, 두 가지 역설에 대한 지적이고, 그 역설이 가리키는 위기에 대한 경고입니다.')에 대해선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지젝이 저 주장을 끌어내기까지 전개한 각론에 대해선 유럽 좌파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사랑'의 한 단면을 보는거 같아 좀 씁쓸합니다. 그리고 그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의 단초는 68 때의 마오이즘과 홍위병 찬양에서부터 나왔으니 꽤 뿌리가 깊죠...)이 엉뚱하게 진행되면, 삿갓님이 지적한 방향(즉 개발독재에 대한 회의가 아닌 노골적 찬양으로의 발전)으로 전개될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마지막으로 몇 마디 첨언하자면 칼도님의 '헛다리 짚기'는 이영표 드리볼 광경을 지켜보셨을 때 쓰셨으면 더 적절했을거 같고... ^^
삿갓님의 '우물거림'은 콩국수 드실때 하시는게 더 적절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
굳이 안 써도 될 말을 쓰는건 저같은 잡배가 가끔 개싸움이 생각날때 하면 되는거지, 다른 분들은 좀 지양하셨으면.... ^^;;;
선후관계를 따지지 않은 양비론은 좋지 않아요. 글의 한 부분에서 행해진 이러저러한 사실지적(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제3세계 나라들 모두 권위주의적 통치의 시기를 거친 후에야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용했다, 중국의 경제발전도 공산당의 권위주의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통치 때문에 이뤄진 것이 등등) 을 두고 곧바로 박사모에 팔아도 되겠다느니 개발독재를 찬양 또는 옹호하는 거라니 하는 것은 덩치 크고 글쓰고 생각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게 출몰하는 게시판들에나 어울리는 비약이고 헛다리에요. 물론 그 사실지적을 포함하는 글의 전반적인 (숨은) 의도 또는 메시지가 무엇이다라고 '해석'하고 싶어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글의 나머지 부분과 그 사실지적 부분을 연관시키고, 또 필자의 다른 관련 글을 끌어와 논거를 보충하고 하는 식의 일정한 해석과정을 거쳐야 하는거에요. 글의 한 부분에서 대뜸 글쓴이의 의도나 메시지를 '때려잡는' 이런 식의 댓글들이 적을 수록 이곳이 회의적 거시기니 뭐니 하는 곳과 차별화될 수 있는 거에요..
중국편향적이니 뭐니 하는, 이미 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정해놓고 상대쪽의 평가를 자신의 평가에 비추어 재단하는 식의 표현은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해요. 중요한 것은 누가 편향적이냐가 아니라 그 사안의 진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헤쳐보려는 태도에요. 중국편향적이니 하는 표현은 서구 선진국들과 리버럴 식자들의 반중국 편향성에 대한 지적을 자신의 거울 이미지로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 따름이에요.. 그 번역글들의 효과가 결국은 중국에 대한, 그리고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에 대한 흔한 '카더라' 또는 '넝마' 소문들/지식들에 균형추를 달아주는 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균형추를 다는데 성공했는지만 따지면 되는 거고 편향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 따짐의 결론부에 양념으로 집어넣으면 되는거에요..
저는 유럽이든 미국이든 좌파 식자들의 전형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사랑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요.. 사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지만 사랑이 더 주되다거나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을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지젝의 윗 글만 해도 우리 모두의 미래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세계사의 다음 단계의 한 신호탄이 될 수도 있는, 중국의 어두운 미래의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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