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기사 혹은 팩션을 줄곧 써온 류재순 씨. 예전에 자신이 쓴 일본 취재글 수첩에 있는 글을 전여옥 씨가 도용해서 송사에 휘말렸다가 결국 승소한 적이 있다. 80년대 중반 동아일보 등에 줄곧 르포 기사를 써 왔는데 게중에 '난지도 사람들'이라는 글이 있다. 원래 월간 게재 형식으로  썼던 르포 기사를 르포 소설 형태로 편집하여 80년대 중반 발표하여 대학가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기억하고 있다.

거기 일정 기간 생활하며 취재했던 류재순 씨는 난지도 사람들 말미에 대충 이런 풍경을 그린다. 쓰려져가는 판자집들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사람들 중에 과부 한 사람이 야심한 시각, 아마 수챗가 혹은 전개에서 몸을 씻다가 알약을 꺼내 샅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샅에 자극을 주는 용도로 쓴 것이다. 작중 화자와 눈이 마주치자 아마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투의 말 혹은 눈빛을 보낸다.

꼬방동네 사람들, 원미동 사람들, 그리고 김중미 씨의 어떤 소설이나 유랑 작가 공순옥 씨의 글 역시 난지도 사람들과 그 풍경이 비스꾸레한 면이 있다. 그런데 세간에서 그런 글에 영향을 미쳤던 미국 소설이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라고 그러는 이들도 있다. 어쩌다 재미 삼아 저 소설을 번역했는데, 여튼 비슷한 내음이 나긴 헌다.

하긴 그 시절은 앤더슨의 소설로 치자면 젊은 것, 풋풋한 것, 서툰 것들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여기 사람들이 씹어댈법한 조갑제(나는 자꾸 조갑지가 떠오른다) 씨도 있다. 그 풋풋하던 시절과 40대까지 조갑제의 글들을 읽어왔던 이들이라면 어쩌면 저럴 수가, 아니면 인생이란 그런 것 둘 중의 하나로 태도가 갈릴 게다.

각설하고

요새 것들은 풋풋한 맛이나 서툰 맛이 없다. 공장에서 나노 기술로 찍어내 몸매 미끈하고 품어봄직하지만 영 사람 냄새 혹은 생명의 냄새는 나질 않는 것이다. 어둑어둑한 인공 조명 아래 아찔한 속옷을 입고서 농염한 매력을 뽐낼 수는 있겠으나 뜨거운 뙤약볕 아래 치마 입고 수건 둘러매고 밭을 매다가 소피가 마려워 슬쩍 궁둥이를 까고서 시원스레 볼 일을 보고 옷을 추슬르고서 불어오는 시원한 미풍에 젖가슴께 땀을 훔쳐내는 관능미는 풍기지 못할 아이들. 넓게 펼쳐진 자연과 햇볕 아래에서는 생명의 기운을 내뿜지 못하는 아이들. 관능미마저도 자본의 힘을 빌려 무언가를 구매해야만 발산할 수 있는 아이들. 그건 원래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신상품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질 게다. 관능미 one, two, three...

하긴 뭐 그 아이들 키우는 년놈들 수준이 그러니까 그런 것이겠지. 나는 그 세대에 속하니 그냥 찌그러져 있는 게 낫겠다. 그래 원래 엔트로피는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가는 사람이다. 주변의 평을 종합해보자면. 피해버리고도 싶은 존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기에게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존재. 하지만 그들은 날 피하지 못한다 혹은 피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길을 택했을때라야 내게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럼 내 짊어진 짐도 사라진다. 앤더슨의 소설을 빌자면 나는 많은 괴인들 틈에 섞이되 괴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키워낸 내 고향 자연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