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운명이다
최근에 동성애가 어떻게 유래되는지 설명해주는 Ray Blanchard의 이론이 우리나라 신문에 새삼스럽게(?) 다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가설은 요즘 상당히 각광을 많이 받는 이론입니다. 맷 리들리의 [Nature via Nurture(한국어판 제목: 본성과 양육)]에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서 읽어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한겨레 기사

남아를 임신한 산모는 태아몸속의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남성으로 성정체성을 만드는데 관연하는 단백질에 노출되기 때문에 여기에 항체를 만듭니다. 그래서 이 항체가 태아의 두뇌에 영향을 끼쳐서 이후 또 남아를 임신했을 때 이 아기가 남성으로 발달하는 걸 방해한다는 이론입니다. 즉 형의 수가 많을 수록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 이론은 근접 원인(proximate cause)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당할 (아마도 엄청난) 번식적 불이익을 감안하면 형의 수가 많은 태아라도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매우 낮아지게끔 자연선택이 작용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에 대한 진화적 원인(ultimatae cause)에 대한 설명이 따로 더 필요하긴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의아하게 여긴건 이 이론이 "동성애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내지 "동성애는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생물학적 운명이다" 라는 함의를 지닌 것으로 보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과학평론가 이인식씨도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성애의 원인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견해가 맞서 있다. 하나는 동성애 성향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동성애를 성장 과정의 결과로 본다. 전자는 동성애를 선천적인 운명으로,후자는 후천적인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동성애를 성적으로 문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선택으로 보기 때문에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개인적 선택으로 보는 견해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1990년대부터 동성애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히려는 연구가 놀라운 성과를 내놓은 덕분이다... 게이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주장은 2002년 미국의 레이 블랜처드가 제안한 '큰형 효과'에 의해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블랜처드는 15년간 형제의 출생순서가 동성애 성향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한 끝에 게이가 이성애자들보다 형을 더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큰형 효과가 발생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임신 중에 어머니의 면역계가 태아에게 작용한 결과일 것으로 추정된다."

맷 리들리가 그의 책에서 잘 지적하듯이, 태아가 (남성으로의 성정체성 발달을 저해하는) 엄마의 면역 반응의 영향을 받는지 안 받는지는 곧 태아가 어떤 "출생전 환경(prenatal environment)"을 경험하느냐를 말합니다. 그리고 "출생전 환경"은 정의상(!)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이요, 본성(nature)가 아니라 양육(nurture)입니다.

유전자니 본성이니 이야기 하는 바는 엄밀히 말하면 어떤 사람의 유전적 구성(genetic makeup)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아가 자궁내에서 성정체성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엄마의 면역반응을 얼마나 받느냐( => 형의 수가 많느냐 적으냐와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는 처음에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했을 때 그 태아가 어떠한 유전적 구성을 지니게 되었는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수한 환경적 요인입니다.

그런데도 꼭 저 이론이 동성애는 운명이고 본성이다 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는 까닭은, 역시 리들리가 말하다시피, "양육은 본성보다 더 유연하고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오해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큰형 효과 이론에서 "게이 유전자"는 태아의 성정체성 발달을 저해하는, 엄마 몸속에서 태아에 대한 면역반응을 지정하는 유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동성애라는 형질은 태아의 출생순서라는 환경적 요인이 태아의 성정체성 발달을 저해하는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엄마 몸속의 유전자를 작동시켜서 태아를 동성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마가 자식을 더 안 낳거나, 딸을 새로 임신했을 경우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rture)인 셈입니다.

아무튼 위의 예에서처럼 거의 모든 형질이 저렇게 본성과 양육이 복잡하게 얽혀서 발현되기 때문에, 또 본성보다 양육이 훨씬 더 바꾸기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에(사실 어떤 동성애자의 출생전 환경을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바꾸기란 어려운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 일단 본성(=>생물학적 원인, 유전자, 숙명, 고정불변, 따라서 함부로 언급하면 위험)과 양육(=> 사회적 원인, 환경, 쉽게 바꿀 수 있음, 따라서 언급할수록 바람직)의 이분법부터 버려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동성애는 운명이다" 이런 기사를 보게 되길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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