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나는 집단 선택 탐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목표는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 Critique of Some Current Evolutionary Thought』 같은 위대한 책을 쓰는
것이다. 꿈은 원래 크게 잡아야 하는 법이니까. 편의상 내가
쓸 책을 <집단 선택 완전 정복>이라고 지어보자. 영어로 쓸 생각이며 제목을 그런 식으로 짓지는 않겠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겠다.
<집단 선택 완전 정복>은 나 혼자만의
“박사 학위 논문”이다. 나를 조롱하고 싶다면 그 책을 다 썼는데 아무도 박사 학위 급 논문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도 될 것이다.
이 여행을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영어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번역을 해 주는 수고까지 감수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집단 선택 문제는 겁나게 복잡하고 어렵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에 비하면 아주 쉽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양자 역학보다는 쉽지만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리고 이 탐험 중에 내가 실컷 이야기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 길이 아닌가벼”라고 말한다고 해도 너무 핀잔을 주지 말기 바란다. 완성된 책이
나오기까지 온갖 뻘짓을 하더라도 완성품이 좋으면 그리 욕할 일이 아니다. 나의 뻘짓을 보고 싶지 않다면
완성품인 <집단 선택 완전 정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 그것을 읽으면 된다. 내가 결코 제대로 된 진화 생물학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내가 하는 짓을 다 무시하면 된다.
오늘은 가볍게 시작하자. 아래 모음집에 실린 글을 몽땅 읽어보는 거다.
THE FALSE ALLURE OF GROUP SELECTION
(Steven Pinker)
Stewart Brand, Daniel Everett,
David C. Queller, Daniel C. Dennett, Herbert Gintis, Harvey Whitehouse &
Ryan McKay, Peter J. Richerson, Jerry Coyne, Michael Hochberg, Robert Boyd
& Sarah Mathew, Max Krasnow & Andrew Delton,Nicolas Baumard, Jonathan
Haidt, David Sloan Wilson, Michael E. Price, Joseph Henrich, Randolph M. Nesse,
Richard Dawkins, Helena Cronin, John Tooby.
http://edge.org/conversation/the-false-allure-of-group-selection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을 어느 정도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필진의 화려함이 정말 장난 아니다. Edge에서 착한 일 한 번 잘 했다.
집단 선택은 죽지 않았다.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에
치명타를 입고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진화 윤리학 쪽 문헌을 꽤 많이 읽어봐서 아는데 특히 그 쪽에서 집단 선택론의 영향력이 장난이 아니다.
이 모음집에는 진화론와 관련된 저명한 과학자들이
집단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나와 있다. 지면의 성격상 아주 가볍게 자신의 입장을 소개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아래와 같은 뒷담화를 보는 재미도
있다.
Finally, much of the work on group
selection has been funded by the John Templeton Foundation, an enormously
wealthy organization with an agenda to harmonize faith and science. The idea of
group selection, with its spiritual and religious connotations—the process is
often used to explain the prevalence of religion and societal harmony—is right
up their alley. So the proponents of group selection monopolize not only the
megaphones but the funding. In science, money talks.
(Jerry Coyne의 글 중)
http://edge.org/conversation/the-false-allure-of-group-selection
집단 선택은 개념, 모델, 이론 등의 측면에서 전문가로 통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집단 선택” 개념 자체를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쓰는 것 같다. 뭐 하나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는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인다. 그런데도
다들 자기가 옳다고 상당히 확신하고 있다.
이 모음집을 읽고 집단 선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대단한 논쟁 주제이며,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고 헷갈린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자. 만약 이덕하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집단 선택 완전 정복>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진화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느낌도 들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이 문제를 쌈박하고도 친절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글 내용과는 상관없는 얘기인데, 저는 '뒷담화'는 원래 '뒷다마'가 맞는 걸로 생각합니다. 당구다마, 전구다마, 다마네기 하는 그 다마 말입니다. 그래서 '뒷담화를 하다'란 표현보다는 '뒷다마를 까다(뒤통수를 때리다,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수군거리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고 말이죠. 제가 '뒷담화를 하다'라는 말을 처음 듣기 훨씬 이전부터 '뒷다마를 까다'라는 표현이 존재했습니다. 일본어 '간지(かんじ, 感じ)'에서 온 표현인 '간지나다(멋있다, 폼나다)'를 가지고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모르던 '간지다(간드러진 멋이 있다)'란 한국어를 찾아내 억지로 갖다 붙여서는 그 유래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인 경우로 보입니다.
'뒷담화'와 '뒷다마'에 대한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의 글:
http://www.korean.go.kr/09_new/dic/article_view.jsp?idx=5948
http://www.korean.go.kr/09_new/dic/article_view.jsp?idx=8481
'간지나다'의 어원에 대한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온라인 가나다 문답:
http://www.korean.go.kr/09_new/minwon/qna_view.jsp?idx=27008
요이, 땅. (달리기 할 때 “준비, 출발”)장 께이 셔츠. (가위 바위 보)다마 구리 (구슬 치기, 다마 굴이?)
㈜예수 님, 이덕하 님, “뒷담화”와 “뒷다마”는 원래 뜻이 전혀 다른 용어들입니다. 각각의 독자성, 독자적 의미가 있는 낱말들입니다. 즉 하나는 추상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명사입니다. 따라서 그 각각이 가리키는 대상은 애초부터 다릅니다. 다만 “뒤 + ㅅ(사이 시옷)”이라는 동일한 접두사로써 파생된 단어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나중에 둘 사이의 의미 유사성이 유추적으로 따라붙은 것일 뿐입니다.
이런 현상을 “사후 합리화”에 빗대 “유추적 의미 합리화 → 유추적 사후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두 분(김한샘, 김선철)의 설명/해석은, 제가 판단하기에, 뒷담화/뒷다마에 대한 어원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사후의 유추적 해석”에 가깝다고 봅니다. 어떤 실증 자료를 가지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항간의 떠도는 민간어원설과 그럴듯한 추정에 근거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장점은 접두사 · 접미사 · 조사 따위를 활용해 거의 무궁무진한 낱말을 만들수 있고, 다양하고 미묘한 의미 분화를 생성해낼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을 상황과 때에 따라 아주 적절하고도 마춤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뒷담화와 뒷다마는 애초에 존재했던 단어 “담화”와 일본쪽 외래어 “다마”에 우리말의 유연한 조어능력을 대표하는 접두사 “뒤(뒷)-”가 (어느날) 아주 자연스럽게 가서 붙은 결과로 만들어진 “즉석 조어”라는 것이죠. 아무런 언어학적/의미론적/문법적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 혹은 언중이 즉석에서 만들어 쓴 새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말의 아주 큰 장점입니다. 아무나 즉석에서 그럴듯한 신조어를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나중에 언어학적으로 문법적으로 분석해도 거의 문제가 없는 완벽한 조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말의 새말 생성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뒷담화와 뒷다마는 각각의 어원적 생성 기원이 따로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들에 비춰보면, 위에서 ㈜예수 님이 〈'뒷담화'는 원래 '뒷다마'가 맞는〉다고 주장한 것은 옳은 설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님의 주장은 뒷담화와 뒷다마가 공통의 단일한 유래를 지닌다는 얘기인데요. 이런 설명은 옳은 정설로는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둘은 각각 추상명사와 사물명사로서 서로 본적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론적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유래가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우리말의 탁월한 조어 능력이 즉석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낸 서로 다른 개별적인 단어들로서, 얼마든지 그 각각이 독자적 의미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렇게 쓰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뒷담화와 뒷다마를 동일한/유사한 어원으로 해석/설명하는 것은 “사후의 유추적 합리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은 일종의 잘못된 유추의 오류(false analogy)입니다.
문화/예술/과학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