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하 님과 피노키오 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논의들이 생명(life)의 창발(emergence)이나 눈(eyes)이나 뇌(brain)와 같은 복잡계(complex systems)의 발생과 진화에 관련된 논의라면 “주사위 던지기” 수열 사례에 유추한 설명들은 그다지 적절한 설명은 아닌 듯합니다. 

우연, 질서, 기적, 신기함 그리고 과학적 발견 ― 이덕하 님
생명체의 존재는 정말로 '과학적으로' 주목해야할 특별하고 신기한 현상인걸까? ― 피노키오 님

왜냐 하면, 주사위를 여러 번 던져서 생성되는 수열은 그것이 무작위(random)한 형태를 보여주는 수열이든 규칙적/법칙적인(law-like) 형태를 보여주는 수열이든 모두 선형성(linearity)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포, 눈, 각종 신체 기관, 뇌 등등의 물리적 계 자체와 생명의 창발, 의식의 창발 현상 등등은 근원적으로 비선형적 속성(nonlinear properties)이 내재된 복잡계이고 복잡한 현상입니다.

 

즉 주사위 던지기로 나오는 수열은 (관련 논의에서 제시된 이덕하 님과 피노키오 님의 주사위 사례에 국한해서 보자면) 일종의 통시적(diachronic) 변화 양상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창발과 진화, 눈과 뇌 같은 복잡계의 생성과 발달/진화는 통시적 변화와 공시적(synchronic) 변화가 씨줄과 날실처럼 엮여나오는 다중적/입체적 변화(변이) 양상이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덕하 님과 피노키오 님의 주사위 사례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sensitivity to initial conditions)과 직접 관련된 여러 가지 변수를 거의 완전 누락한 사례이기 때문에 지극히 불완전한 사례입니다. 즉 ① 주사위를 던지기 전 주사위의 6면 가운데 어느 면을 위/아래, 동서남북으로 설정하고 던질 것인가, ② 주사위를 어떤 방향, 각도, 속도로 얼마의 거리만큼 던질 것인가, ③ 주사위의 재질은 돌, 금속, 고무, 나무 따위 가운데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 ④ 주사위를 던질 땅바닥은 어떤 상태로 해놓을 것인가, ⑤ 실험 공간의 기온, 습도, 공기 밀도, 풍향 따위 환경적 조건은 어떻게 설정하고 실험 지속 시간 동안 얼마나 동일하게 유지할 것인가, 따위 등등 수많은 초기 조건을 엄밀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이런 핵심 사항들을 누락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초기 조건들은 아주 조금만 다르게 초기 설정돼도 그 각각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초기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 주사위 수열 가정은 생명 창발과 눈/뇌 따위의 생성 · 진화를 설명하는 데는 그 의미가 무가치할 만큼 하락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앞서 거론한 초기 조건을 과학적으로 초정밀하게 설정하고 주사위를 던질 경우 원하는 수열을 얼마든지 얻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초기 조건의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주사위 수열 사례의 핵심 논리적 무기인 무작위성(randomness)이 완전 사라지고 결정가능성(determinability)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뇌/생명 현상의 우연성, 설계(자), 물리주의적 결정론 따위와 관련된 논란에 주사위 수열 사례를 끌어들이는 시도는 논리적 사고 실험으로서의 가치를 대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 눈의 신비, 뇌의 신비, 의식의 신비, 생명의 신비 따위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 “창발(emergence)”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창발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있죠.

The whole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ts.

 

이 구절은 알다시피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생명의 기원, 그 수수께끼 혹은 신비를 거론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애용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쯤부터는 인문학자,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까지도 창발 개념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며 창발 개념 아래에서 자연 현상, 생명 현상을 연구한 본격 과학 논문을 속속 발표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창발 개념의 학문적 복권 혹은 그 개념의 철학적 정립에 중심적 역할을 한 분이 바로 미국 브라운 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고 계시는 김재권 교수님입니다. 지금 21세기 초에 창발 개념은 인문학, 철학, 과학을 통틀어 가장 각광받는 논제의 하나가 되었고 자연 현상, 생명 현상, 의식 현상 따위의 수수께끼를 궁극적으로 푸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아크로에서 생명의 신비와 관련하여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창발 개념에 관한 언급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되는 논의에 기대를 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