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이 바뀌었다. 펠레델키노에 사흘 머무는 사이 민박집에 새 손님이 들어온 것이다. 전에 쓰던 앞쪽 방은 중국에서

온 여성 안마사가 차지했고 반대편인 후면의 모퉁이 방이 내게 배정되었다. 내가 짐을 들고  그 방으로 들어갔을 때 처

음 보는 어떤 청년이 침대 위에 길게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가 벌덕 일어나 내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어슬렁

어슬렁 복도로 나갔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먼저 후면 전망이 있는 창 앞으로 다가갔다.

 아파트 뒷 마당에서 도로를 건너면 넓은 구역을 차지한 주유소 건물이 있고 주유소 뒷쪽으로 기다란 숲이 이어지고 있

다. 그 숲을 지나면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의 아파트 단지들이 눈길이 미치는 끝까지 이어지고 있다. 체르무쉬끼 지역

이 모스크바 중심에서는 한참 벗어난 외곽지역이란 점을 감안하면 대체 이 도시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가?

 주유소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있다. 오전에는 날씨가 맑았는데 잠깐 사이에 하늘

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기온도 갑자기 내려간듯 하다.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싼 행인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 방이 젤 조용한데, 방이 맘에 드세요?"

이진이 문을 살짝 열고 방을 기웃거렸다.

"전망이 시원해서 좋아요. 또 추워진 것 같은데."

"따뜻한 차를 준비했으니 거실로 나오세요."

거실 탁자 주위에 중국여인 안마사와 방금 방에서 나간 낯 선 청년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쪽은 슈메이, 이쪽은, 박군, 박군이 직접 인사드려."

이진의 짤막한 소개가 끝나자,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중국여인이 활짝 웃어보였다.

"저는 박강수라 합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요."

청년이 이번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박군은 우라디보스톡에서 온지 얼마 안되요."

"그러면 한국인?"

"아버지께서 우라디보스톡에서 사업하시는 바람에 거기서 대학을 나왔구요. 물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박이 웃었다.

"박군은 지금 잠시 저를 도와주러 왔어요. 어떤 허가신청을 하는데 러시아 행정실무를 제가 잘 몰라서 박군

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한 탓인지 박강수는 그 또래 청년 치고는 성숙하고 당돌한 인상을 주었다.  차를 마시는 중

에도 그는 앞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서류작성을 하느라고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선생님을 거기 모셔다 드리고 돌아올 때 차오한테 제가 뭐라 한줄 아세요? 틀림없이 사흘 이상 못 견디고 저

희 집으로 오실거라고 했지요."

이진의 눈썰미는 무섭도록 정확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A와 나 사이에 러시아 땅에서

이루어진 7년만의 해후, 그 전후 과정에 관해 이진은 전혀 모르는 입장이지만, 도리어 그때문에 그녀의 관찰

과 판단은 더욱 정확할 것이다. 손님을 맞은 그곳 분위기가 그만큼 싸늘했단 얘기다. A를  믿고 기대를 놓지 않

았던 나는 그런 분위기에 둔감할 수 밖에 없었다.

" 그 할머니에게 가시는 건 어찌 되었죠?"

"A가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어요. 날씨도 너무 춥고. 이번엔 여기까지 온 걸로 만족해야겠어요. 니나도 내 마음

을 이해할 거요.'

"포기하지 마세요. 가브리노라고 하셨죠? 제가 모시고 갈게요. 차도 있고 운전할 사람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

에요?  

 "고맙지만,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거요. 나는 여기서 그쪽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걸. 가다가 차도에서 숲길

로 접어드는데 그런 진입로가 수십개도 더 되요. 하루 종일 헤메다가 돌아올 거요."

"박군, 지도 사다가 가브리노 찾아봐요. 할 수 있죠?"

"그건 어렵지 않아요. 제가 거기 위치를 찾아낼게요."

우라디보스톡에서 온 박군이 자신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그때 그 음악 듣고, 음악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은 거기 꼭 가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진이 이렇게까지 가브리노 행에 마음을 써주는 건 칼 다비도프(Karl Davidof-1838-1889)의 그 짧은 곡 때문

인가. 페레델키노로 가기 전 나는 거실 탁자 위에 있는 노트북에서 다비도프의 짧은 첼로곡 <무언의 로망스>

를 찾아냈다. 이 음악은 이번 여행 초기에 내 마음을 잘 대변하는, 게다가 가브리노 일대의 풍경과도 잘 어울

리는 곡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진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것 좀 들어봐요. 이 음악이 이번 내 여행의 주제곡이랍니다."

여행의 주제곡? 그런 것도 있었나? 엉뚱스런 손님의 권유에 마지못해 옆에 앉아 음악을 듣는척 했으나  바쁜

여주인의 눈길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음악을 떠올리고 있다. 그때는 관심을 보이

지 않았지만 그 음악의 잔상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차를 타고 중국시장으로 나갔다. 차오가 차를 몰았고 중국여인 슈메이도 함께 갔다. 중국

화폐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슈메이가 환전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고 나는 겨울용 내복을 구하는 게 당장 급한

일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사람들은 내복을 입지 않는다. 대신 겉옷을 두터운 겹옷으로 입고

추위를 견뎌낸다. 중국시장은 아주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중국인들이 여기에도

그만큼 다수가 진출해 있다는 증거였다. 가게 주인 가운데는 중국출신 조선족도 가끔 보였다. 중국에서 생산

된 각종 의류들, 간단한 생활용품들이 이 시장에서 팔리는 주력 품목이었다. 이진은 조선족 가게 주인을 만

날 때마다 반갑게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눴다. 조선족들 사이에 이진은 얼굴이 많이 알려진 유명인사?인 셈이

었다. 이진은 슈메이를 환전하는 사람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해주고 혼자 돌아왔다.

"이제 선생님 내복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이진과 나는 오누이처럼 나란히 서서 옷가게 앞을 걸어다녔다. 이곳저곳 옷가게를 기웃거렸으나 내복은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한바퀴 돌았다. 역시 내복은 구경할 수 없었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네요. 그냥 내려가지요."

다시 일층으로 내려왔는데 슈메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 여자 어디서 뭘하지?"

조선족 가게 앞에서 이진이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환전을 소개해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슈메이가 벌써 떠난지 오래라는 대답을 들었다.

"돈도 자그만치 몇만 달러나 갖고 있던데 참 맹랑한 여자네요. 이 넓은 시장을 다 찾아볼 수도 없고."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다니는 건 아닐까요?"

나이답지 않은 슈메이의 천진난만한 얼굴표정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선생님은 차오한테 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좀 찾아볼께요."

이진은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긴 회랑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차오는 차 안에 앉아 귀에

리시버를 꽂은채 졸고 있었다. 그와 나는 짧은 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슈메이가 여기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차오가 머리를 흔들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나는 차오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잘 생겼고 예의가 바른 이 중국 청년에게 나

는 궁금한 게 많았다.

"러시아엔 뭘 공부하러 왔나?"

"테니스를 배우러 왔는데 이젠 방향을 바꿔야겠어요."

"어떤 쪽으로?"

"이것 저것 생각중인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요."

"여자 친구는 있는가? 미남이라 따르는 여성이 많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차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이미 결혼했고 딸도 있으며 변두리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노라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진이 나타나지 않아 걱정도 되었지만 나는 슈메

이란 철없는 중국여성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중국시장에서 일을 마치면 바로 툴스카야로 함께 가는

걸로 이진과 약속했던 것이다. 이진의 바쁜 일정을 볼 때 너무 늦어지면 모처럼 기회를 얻은 툴스카야

 행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툴스카야, 내 마음은 이미 7년만에 찾아가는 그곳에 가 있었다. 마침 그때 이진이 슈메이를 데리고 나

타났다. 야단을 맞았는지 슈메이는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