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을 위해서, 이덕하님의 '난수표의 비유'를 차용하겠다.

 

사건1) 어떤 컴퓨터에 난수를 출력하라고 명령했더니, '51829643751829' 라는 숫자 하나를 출력했다.

 

사건2) 어떤 컴퓨터에 난수를 출력하라고 명령했더니, '12345678912345' 라는 숫자 하나를 출력했다.

 

우선 사건1에 대해서 신기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 같다. 난수 생성 프로그램에 인위적 개입이 있었으리라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거같고, 구태여 해당 컴퓨터가 무수히 많은 난수 출력 작업을 하였으리라 추론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2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몹시 신기해할 것 같다. 난수 생성 프로그램에 인위적 개입이 있었다고 의심할 것이고, 해당 컴퓨터가 무수히 많은 난수 출력 작업을 하였으리라 추론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 태도가 맞다. 성급한 사람들은 결코 우연의 일치일리가 없다면서 과학자들에게 해명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1과 사건2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길래 전혀 다른 반응을 하게 되고, 사건2는 과학적으로 특별한 취급과 의미부여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사건1과 사건2가 발생할 확률은 정확히 똑같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략 100조분의 1쯤 될 것 같다. 그러므로 '대단히 낮은 확률'만을 이유로 유독 사건 2에 대해서만 신기해하고 인위적인 개입을 의심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사건1 역시 발생할 확률이 대단히 낮은 것은 똑같으니 당연하다.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건2만을 무수히 많은 난수 출력이 존재했다는 근거로 사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사건1 역시 무수히 많은 난수 출력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건1과 사건2의 과학적 의미의 우열을 따져보는 것은 결코 확률에 달려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 자명하다.

 

그럼 사건1과 사건2를 다르게 대접해야만하는 차이점이란 무엇일까? 직관적으로 보기에 사건1은 흔히 있을 수 있는 랜덤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서, 사건2의 난수는 '인간들끼리 약속한 자연수의 표기 순서'와 겉모양이 완전히 똑같다는 것 밖에는 없다. 결국 사건2가 과학적으로 특별하게 대접받아야만 하는 근거는, 인간들이 자연수의 표기 순서를 '123456789' 라고 하자고 약속했다는 사실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인간들이 자연수의 표기 순서를 지금과는 달리 '518296437' 의 순서로 하기로 약속했었다면? 그러니까 어떤 물건이 하나일 때 표기하는 기호가 1이 아니라 5라고 하자고 약속하고, 아홉개가 있을 때 9가 아니라 7이라 표기하자는 식으로 약속했었다면? 그럼 그 때는 거꾸로 사건1이 과학적으로 뭔가 특별한 사건이 되고 인위적인 개입이 없었는지 규명하고 과학적으로 해명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인간들끼리 합의한 약속이 '어떤 컴퓨터가 아무 생각없이 출력한 어떤 난수의 과학적 의미'의 우열을 가리는 변수나 기준이라는 인식에 동의하기 어렵다. 컴퓨터는 난수를 생성할 때 인간들끼리 약속한 자연수의 표기 순서 따위에 영향을 받은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존재하는 사건'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생명체 역시 '물질과 에너지가 구성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형태' 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우주 입장에서는 '토성의 띠'처럼 흔히 있을 수 있는 매우 하찮은 현상일 수도 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신들의 존재를 신기해하고, 우연의 결과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희귀하고 확률이 낮은 기적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건 인간의 오만한 착각일 뿐이지 않겠는가. 생명체의 존재가 우주의 법칙과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뭔가 특별한 사건일 것 같지는 않다.

 

기우삼아 그럼에도 인간 각자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자신이 생성되었다는게 너무나 신기한 사건인건 분명하고, 우주가 수천억번 빅뱅과 소멸을 반복하더라도 다시는 재연되기 어려운 특별하고 경이로운 사건이기에, 각자가 자신들을 우주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 또한 당연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