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좋아하는 저급한 정열은 인간의 맹장 같은 운명이다.
- 김상용, 백리금파에서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와 자셔도 좋소. 왜사냐건 웃지요'.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심초의 노래 가삿말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일제 강정김에 적극성/소극성을 떠나 일제나 일제 강제 동원을 찬양하는 논조의 격문이나 문학작품을 써낸 문필가들은 참 많다. 익히 알려진 서정주 씨, 이광수 씨 등을 배제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를 지나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보다는 대개 형편 때문에, 처한 실존 때문에 마지 못해 나선 사람들이 많다고 보는 게 낫다. 빼어난 서정시인들, 박목월 등등도.


저 빼어난 글을 쓴 김상용 씨는 인생을 회고하는 글을 쓰면서  '비록 일제 시대에 일제 강제동원을 찬미하는 글을 신문에 쓰는 우를 범했지만.....'이라는 말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그런데 조금이나마 불가피하게 친일에 동원되어 글을 쓴 작가들 중에 자신을 주제로 삼아 고스란히 이를 반성하는 글을 직설로 펴낸 사람은 내가 파악하기에는 군산 사람 채만식이 유일하다.


해묵은 친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 말대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재하는 게 좋다고 본다. 박정희 평가를 두고서 그리들 말하듯이.


문인들 시비를 세우고 싶으면 세우되 그 한편에 이러한 오점도 있었다고 짤막하게 새겨두는 것. 그걸로 역사의 평가는 족하지 않을까? 물론 적극적 친일 행각을 보인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은 무리라 보고.


어린 왕자로 알려진 생땍쥐베리는 2차 대전 중에 아마 폭격을 나갔다가 추락해 죽은 것으로 안다. 몇 년 전에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타고 있던 지점을 복원하는 사업도 펼쳐진 것으로 알고. 1차 대전인지 2차 대전인지 가물거리기도 하고 저 내용이 정말 바른가 확인해 보는 게 내 방식이지만 요샌 귀찮다. 클클 내가 이렇게 대충 기억하고 있는 게 주변에 어지간한 부류들에 비해 정확도가 높더라.


우리나라에 밀하자면 생땍쥐베리처럼 저항시인의 길을 줄곧 갔던 사람들이 없느냐 하면 적지도 않다.
수인번호 이육사의 시 청포도. 그의 생애는 짧았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어쩌면 당시 다른 시인들이 이육사에 비해 문학적 성취는 높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게 인간을 논할 때 전부는 아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바로 지금 여기'나 카르페 디엠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 행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법이다. 그 순간이 인생의 무게를 저울질한다. 모두들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보드라만. 홍성원 씨의 무사와 악사(전에 미몹에 글 쓸 때 한승원 씨로 잘못 알아더랬다)를 보면 지식인들의 고뇌가 우수 어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 주인공과 주변인들이 일제 학병 출정식에서 보이는 모습이 인간으로서 모순 중 극단에 속하는 지점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비열함이라는 건 시비 한편에 그러나 이러이러한 오점도 있었다라고 짤막하게 새겨두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태도이다. 김연아의 연습 동영상에서 자꾸 진로를 방해하고 위험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일본 피겨 선수들(?)의 모습. 그것 자체는 비열하지 않다. 거기까지는 그냥 어린 것이다. 저기서 비열함이라는 수식어는 그들의 성체들을 향해야 하고.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그런 적이 없다고 안면 몰수하는 것 그것이 비열함이다. 아마 그 어린 선수들은 성체들이 주입한 상승욕구와 인정 욕구에 빠져 그리 행동했을 터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그런 동물성이 있는 법이고 성체들이 그걸 소환해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뛰어났다는/뛰어나다고 하는 자들은 그런 비열함을 체화한 상태이다. 일본 피겨 선수들의 모습이 그 농과 담을 떠나 자신의 어린 시절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그런 자신의 옛날을 돌이켜보며 계면쩍게 슬쩍 웃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인간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다면 그건 어린 것이다. 자신이 그러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법이다.


그런 부류는 결코 타인을 개체 대 개체로 만나지 못한다. 몸에 체화된 비열함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서 회피하게 만드는 탓이다.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되 조건이 있다. 그 과거를 직시하고서 용서하는 것. 그거 넘어서지 못하면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감어인, 무감어수.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본 과거 어린 자신의 모습을 아직 용서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아이를 마구 패는 것이다. 그 역시도 그 나이 적에 그러했으면서.